청와대 앞(서울 종로 청운·효자동 주민센터)에 진도와 안산이 주저앉았다.
아들딸을 찾지 못한 진도의 타는 가슴과 아들딸을 영정으로 남긴 안산의 끓는 가슴이 가난한 마음의 진입을 허락지 않는 ‘불신의 땅’에서 꽁꽁 에워싸였다.
5월의 새벽, 아직 벗지 못한 겨울 점퍼“우리가 국민인가.”
실종자·희생자 가족들이 가는 곳마다 장벽이 솟았다. 그들을 가로막은 차벽은 팽목항 바다만큼이나 거대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가족들은 그 앞에 설 때마다 아득했다. 가족들을 응원하는 시민들이 노란 종이배를 접어 차벽에 붙였다. 팽목항 저편에 있는 아들딸도, 차벽 너머에 있는 대통령도, 가족들이 배로 가닿을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가족 200여 명을 막기 위해 청와대 주변 도로와 골목마다 경찰버스와 경찰이 흐드러졌다. 시위를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정부는 시위대로 취급했다.
5월의 새벽은 초겨울만큼이나 스산했다. 부모들은 아직 벗지 못한 겨울 점퍼 옷깃을 여몄다. 손에는 한겨울에나 어울릴 핫팩을 들었고, 하얀 마스크로 가린 얼굴은 바짝 메말랐다. 부모는 아들딸의 영정을 아들딸처럼 끌어안았다. 걸을 때도, 쪽잠을 잘 때도 영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영정 속 얼굴에 먼지라도 묻을세라 아빠는 딸의 얼굴에 입김을 불고 정성스레 어루만졌다. 고개 숙여 잠깐 졸 때도 영정 위로 얼굴을 묻은 채였다. 아이들이 추울까, 담요로 영정을 폭 감쌌다. 낮에는 아이들 사진이 바랠까, 담요로 영정을 또 감쌌다.
5월8일 밤 경기도 안산 합동분향소(화랑유원지)에서 영정을 뽑아들었을 때 부모는 아들딸의 얼굴에 의지해 격한 숨을 골랐다. 장례를 치를 때와 같은 비통함으로 가족 200여 명은 영정을 안고 버스 5대에 나눠 탔다. 버스는 서울 여의도 KBS 본관으로 향했다. KBS 앞에서 그들을 맞은 것도 경찰이었다.
이날 오후 조문하러 합동분향소를 찾은 임창건 보도본부장과 이준안 취재주간 등 KBS 임직원들을 가족들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들을 밖으로 끌어내고 김시곤 보도국장의 사과를 요구했다.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라는 김 국장의 발언(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주장)은 이제 영정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아이들을 다시 물속으로 밀어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 국장은 지난 4월28일 오후 뉴스를 진행하는 여성 앵커가 검은색 정장을 입고 오자 ‘검은 옷을 입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와 가족들의 분노를 샀다. 밤 10시께 KBS에 도착한 가족들은 김 국장의 사과를 요구하며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가족들은 아이들의 영정을 쳐들고 싸웠다. 보도국장은 나타나지 않았고 길환영 사장은 면담을 거부했다. KBS는 대신 보도자료를 내어 가족들의 ‘폭력 행위’를 강조했다. “보도국장은 그런 말(세월호 참사 피해자가 교통사고 피해자보다 적다)을 한 적이 없다”고도 했다. 이 참사의 한가운데서 새누리당은 이날 오전 KBS 수신료 인상 승인안을 야당 의원들의 불참 속에 국회에 기습 상정했다.
만나러는 와주지만 만날 수는 없는 사람“우리가 국민인가.”
면담이 무산된 뒤 가족들은 KBS를 바라보며 외쳤다. 새벽 2시를 넘어서까지 KBS 앞을 지키던 가족들은 사과를 구걸하지 않겠다며 청와대로 이동했다. 가족들 앞을 꽁꽁 틀어막은 차벽은 움직이지 않았다. “청와대에 민원사항이 있으면 대신 전달해주겠다”고 종로경찰서 관계자는 말했다.
한 가족이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의 휴대전화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진도에서 그는 가족 대표에게 전화번호를 주고 갔다. 가족 대표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장관 비서관이었다. 장관은 끝내 전화에 응답하지 않았고, 청와대에서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국가가 죽인 아이들을 데리고 온 상주를 대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유가족들은 민원인처럼, 시위대처럼 취급당했다.
세월호 실종자·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겠다며 진도와 안산을 찾았던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을 만나고 싶다며 찾아온 가족들을 만나는 데는 인색했다. 가족들은 대통령이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나, 대통령은 가족들이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기다렸다. ‘기다리는 근육’이 단련된 그들이었다. 밤새워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식의 구조를 기다렸던 사람들은 만나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어디서든 앉고 어디서든 누울 수 있었다.
“우리가 국민인가.”
가족들은 끝까지 꼿꼿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90도로 허리를 세운 채 몇 시간째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ㅂ군 아빠에게 누군가 담요를 덮어주려 했다. 그는 손으로 담요를 밀쳐냈다. 대신 영정을 쥐고 있던 양손을 불끈 다잡았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였다. 5월9일 아침 방송뉴스에서는 전날 밤 KBS를 항의방문 했던 가족들의 모습이 단신으로 소개됐다. “유족들이 집회를 벌였습니다”란 방송기자의 멘트가 들리자마자, 유족 중 누군가 자조하듯 내뱉었다. “집회랍니다.” 유족들은 한사코 ‘집회·시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우린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대화하러 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5월9일 오전 10시45분. 안산에서 생존자 가족 40여 명이 도착했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가 처벌될 때까지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하겠다”고 생존자 가족 대표인 장동원씨는 말했다. 희생자 유가족 중 한 명은 “너희라도 살아와줘서 고맙다”고 소리쳤다.
너희라도 살아줘서 고맙다오후 3시30분께. 길환영 KBS 사장이 가족 앞에 머리 숙여 사과했다. 그는 “KBS가 마음에 깊은 상처를 드린 데 대해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김시곤 보도국장이 이날 오후에 낸 사표를 수리했다.
길 사장의 사과 직후 생존 학생 대표인 신아무개군과의 전화 통화가 연결됐다. 앰프로 유가족들을 향해 확대된 신군의 목소리는 떨렸다. “친구들을 다 같이 데려오지 못해 죄송하다”는 그의 말에 가족들은 모두 흐느꼈다. 결국 가족들은 대통령을 만나지 못한 채 청와대 앞을 떠났다. 시민들이 묶은 리본들이 청와대 앞을 노랗게 물들였다. 나타나지 않은 대통령 앞에 진도와 안산이 바짝 다가와 있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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