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통치의 귀결이다.
한국 사회를 1970~80년대의 살풍경으로 후퇴시킨 ‘유우성 간첩 증거조작 사건’은 공안의 논리에 기대 영향력을 유지·확대해온 국가정보원과 검찰의 합작품임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며 그들의 언어로 정국을 돌파해온 박근혜 정부의 필연적 산물이기도 하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이 앞장서고 뒤받치며 사법제도의 근간을 뒤흔든 책임의 뿌리는 정권의 심부로 뻗어 있다.
대통령 발언 전후로 ‘배치’된 반응들
박 대통령은 3월10일 오전 “증거자료에 위조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에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검찰은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하고 국정원은 검찰 조사에 협조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건 발생 이후 박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첫 발언이었다. 그의 발언 전후로 국정원-검찰-청와대 사이에서 ‘조율’된 것으로 보이는 반응들이 배치됐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전날 오후 “신속하게 법과 원칙대로 철저히 수사하라”고 지시했고, 국정원은 같은 날 밤 “물의를 일으킨 데 사과”를 언급하며 수사 협조를 다짐했다. 3월10일 박 대통령의 발언 이후 검찰은 국정원을 압수수색했다.
지난해 8월 1심 재판부가 유씨의 간첩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자 국정원은 증거 보강을 위해 중국 내 ‘협조자’ 김아무개(61)씨에게 돈을 주고 3건(북한-중국 출입경기록, 출입경기록 발급 확인서, 삼합변방검사참 답변서)의 문건을 입수했다. 이 문서들은 검찰을 거쳐 법원에 제출됐고, 2월14일 중국은 위조 사실을 한국 법원에 통보(이틀 뒤 국정원은 “어떤 조작도 없었다”며 거짓 반박)했다. 김씨는 자살을 시도(3월5일)하며 남긴 유서에서 “가짜 서류 제작비 1천만원”과 증거조작 사실을 털어놨다. 김씨가 탈북 브로커로 활동하다가 국정원의 협력자가 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은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터졌다. 3월9일과 10일 여권의 반응은 악화되는 여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나온 대응이다. 진상 규명 의지를 읽기보다 위기 타개 수단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사태는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모양새로 진행되고 있다.
“국민께 심려를 끼쳐 송구스럽다”는 국정원의 사과 발표문(3월9일)은 ‘유우성은 간첩’이란 주장에서 한 치의 물러섬이 없다. 국정원은 “화교 유우성이 2004년 4월 위장 탈북자로 국내에 정착해 탈북청년 회장과 서울시 계약직 공무원 등으로 공직활동의 토대를 구축하고, 2006년부터 2012년까지 5회에 걸쳐 밀입북해 북 보위부로부터 간첩교육을 받아 공작원으로 활동하면서 탈북자 200여 명의 성명과 주소 등 신원자료를 북한에 보고한 사실을 알아냈다”며 유씨의 간첩 행위를 거듭 강조했다. 증거조작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저희 국정원으로서도 매우 당혹스럽다”며 모든 책임을 협조자 김씨에게 돌렸다. 국정원은 발뺌하는 과정에서 증거 문서 3건을 모두 위조했다는 사실까지 천기누설해 조롱의 대상이 됐다. 유씨의 출입국기록 확인서를 중국 선양 총영사관의 이인철 영사(국정원 파견)가 허룽시 공안국에서 팩스로 받았다는 그동안의 주장도 거짓말이었다.
공소 유지 자체가 얼굴에 먹칠하기유우성씨의 간첩 혐의 입증에 집착하기는 검찰도 국정원과 다르지 않다. 공소 유지를 위한 발버둥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정원의 간첩 조작이 ‘사실’이 되면 국정원의 수사를 토대로 재판을 끌고 온 검찰은 ‘공범’이 되고 만다. 검찰이 국정원의 수사를 지휘하는 형식이지만, 내용에선 검찰이 국정원의 수사에 기대고 있다. 증거조작 정황이 밝혀지면서 항소심 결심(3월28일)까지 공소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분위기다.
유우성을 기소했던 검찰 공안부는 사실상 국정원과 한배를 타고 있다. 국정원의 증거조작에 동조했거나 묵인한 정황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검찰은 2월14일 중국의 증거 위조 통보 뒤 “위조일 리 없다”며 국정원을 비호했다. 유씨가 2012년 1월22~23일 중국에서 통화한 기록을 확보(2012년 12월)하고도 유씨 기소(2013년 2월) 땐 1월23일 입북했다고 공소장에 썼다. 해당 기간 동안 중국에서 찍은 사진도 압수(노트북 하드디스크)했지만 재판에 증거로 내지 않았다. 지난해 7월 대검찰청은 중국 지린성 공안청에 유씨의 출입경기록 발급을 요청했다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뒤 검찰은 국정원이 비공식 루트로 확보한 기록을 법정에 냈다. 당시 입수 경로를 묻는 재판부의 질문에 검찰은 “공식적 루트로 입수했다”며 거짓으로 답했다.
검찰 공안부가 전산시스템 전문가를 증인으로 신청한 것도 유씨의 간첩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검찰은 2월28일 공판에서 “유씨가 증거로 제출한 출입경기록에 진위를 의심할 부분이 있다”며 전문가 검증(북한-중국 출입경기록의 ‘출-입-입-입’이 전산 오류로 발생할 수 있는지 확인)을 요구했다. 하지만 서울고등법원은 3월13일 검찰의 증인 신청을 기각했다. 전날 유씨가 참고인 신분으로 서울고검에 출석했을 때도 검찰의 질문은 출입경기록 등 중국 정부 문서의 입수 과정에 집중됐다. 증거조작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던 유씨와 변호인단은 간첩행위 입증에 무게를 두는 듯한 수사 방향에 의구심을 표하며 1시간여 만에 자리를 떴다.
증거조작을 수사하는 검찰이 과연 ‘한 식구’의 잘못을 밝혀낼 수 있을지를 두고 의심의 눈초리가 많은 이유다. 검찰의 국정원 압수수색을 두고는 사전 조율 가능성이 제기되는가 하면 실효성에 대한 우려도 크다. 국정원은 증거조작 부서로 지목되는 대공수사국 수사팀 명단도 검찰에 제공하지 않고 있다. 특별검사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분출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국정원 압수수색 당일 검찰이 탈북 브로커 납치를 시도한 북한 ‘직파간첩’ 적발 사실까지 공개해 ‘물타기’ 논란도 일었다.
박 대통령은 남 원장을 포기할까꼬리는 어디쯤에서 잘릴까. 검찰이 증거조작 관련자들에게 국가보안법상 무고·날조 혐의(제12조)란 ‘역사적 법적용’을 할지 주목된다. 김씨에 대해선 위조사문서 행사 혐의만 적용했다. 예상됐던 바다. 자신을 향할 수도 있는 칼날을 검찰이 꺼내들 가능성은 낮았다. 검찰이 김씨에게 국보법 제12조를 적용하면 조작에 가담한 사람들도 같은 혐의를 피해가기 어렵다. 유씨에게 적용된 간첩 혐의 형량은 사형·무기징역 또는 징역 7년이다. 무고·날조 혐의가 인정되면 똑같은 형량이 적용된다. 통합진보당은 3월11일 남재준 국정원장과 이인철 영사, 협력자 김씨와 담당 검사들을 국보법 제12조 위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남 원장은 박 대통령이 벼린 칼이다. 지난해 박 대통령은 남 원장을 앞세워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의 난국을 헤쳐왔다. 대선이 ‘다가올 미래’가 아니라 ‘지나온 과거’란 사실이 민심에 맞선 강공을 가능하게 했다. 지방선거를 앞둔 박 대통령이 증거조작 파장을 돌파하기 위해 남 원장을 포기할까. 정몽준·이재오 의원 등 새누리당 의원들도 남 원장 사퇴를 촉구하고 있다. 간첩몰이에 힘을 보태거나 사건을 외면·축소 보도하던 보수언론들의 태도 변화는 특히 드라마틱하다. 3월10일 전후 일제히 국정원을 겨냥해 날을 세우며 남 원장 책임론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김진태 검찰총장도 책임을 비켜갈 수 없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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