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 생활에 대한 판타지가 방송가에 넘실거린다. 정작 싱글들은 쓸쓸해서 보기 힘든 방송이 대부분이다. 왼쪽부터 MBC <나 혼자 산다>, tvN <식샤를 합시다> 방송 화면 갈무리.
10년 전에 사주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어둡고 음침하며 과묵한 것이 왠지 영험해 보이던 아저씨는 내 사주를 짚더니 대뜸 한마디를 했다. 팔자에 남자도 없고 돈도 없어.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지! 아저씨, 돗자리 까셔야겠어, 아니, 벌써 깔고 있나.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그 시절에 이미 남자도 없고 돈도 없어서 충분히 없이 살고 있다고 믿었지만 없는 것은 훨씬 많아졌다. 놀아줄 사람도 없고 밤을 지새울 체력도 없고 저녁도 없다. 뭐 이렇게 없는 게 많은지 모르겠다.
힘 좋고 성격 나쁜 남편을 갖고 싶다, 카트 밀게그리하여 몇 년째 나는 연고라고는 없는 신도시 오피스텔에 처박혀 TV와 만화책을 벗 삼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다. (집값이 너무 비싸 서울에서 쫓겨났다.) 혼자라도 괜찮다, 돈도 아끼고, 시간도 아끼고…일 리가 없잖아, 아주 외로워 죽겠다.
처음엔 일본 드라마 과 , 일본 만화 처럼 안주가 될 수 있는 것들을 고르곤 했다. 그러고 나는 술만 마시는 거다, 어묵탕과 생선회와 갈비와 전골 같은 맛있는 것들은 (그리고 1인분은 안 파는 것들은) 눈으로만 보면서. 옛날이야기를 읽던 어린 시절엔 내가 이런 자린고비 며느리 같은 짓을 할 줄은 몰랐는데, 상관없다, 그 시절에 몰랐던 것들이 한두 가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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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주말, 음식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낮술을 마시다가 식욕을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나도 고기 구워 먹고 싶었다. 씻지 않은 얼굴을 모자와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나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인 코스트코로 향했고… 지옥을 만났다. 나한테는 그냥 주말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그날은 추석 직전의 주말이었던 것이다. 전부터 항상 궁금했는데, 왜 코스트코에는 3대가 함께 장을 보러 오는 걸까, 대한민국은 핵가족 중심 사회라는데. 카트마다 대여섯 명이 달라붙은 가족들 사이에 끼어 오도 가도 못하면서 나는 사무치게 외로웠다. 나도 저 아저씨들처럼 힘 좋고 성격 나쁘고 무례한 남편을 가지고 싶었다. 그래야 카트를 밀고 이 지옥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고기 한 팩을 끌어안은 가슴에 상처를 받고 돌아온 나는 새로운 친구를 찾았다. 드라마 과 다음 미즈넷. 따뜻하고 푸짐한 저녁상이 그리운 명절이나 크리스마스에 특히 좋다. 속옷을 맨손으로 빨게 하는 시누이, 대낮부터 술에 취해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시아버지, 인감을 훔쳐다 며느리 명의로 대출을 받은 시어머니 이야기를 홀린 듯이 읽다보면 남편이 없으니 시댁도 없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막장 드라마에서도 비슷한 효험을 얻을 수 있지만 언제나 해피엔드이기 때문에 중간까지만 봐야 하는 단점이 있다.
뭐지, 저 좋은 집과 훌륭한 취미 생활은말하자면 나는 신포도를 찾은 셈이다. 손등에 보디로션을 묻혀 최대한 등짝 한복판까지 발라보려고 노력할 때면, 그러다가 오십견이 오면 이 짓도 끝장이겠지, 수심에 잠길 때면, 나도 결혼하고 싶다. 하지만 결혼하면 귀찮은 일도 많아지겠지. 게다가 나는 3×년을 한결같이 싸가지 없다는 소리만 듣고 살았잖아? 그래서 나는 타인의 불행에 탐닉한다. 그렇게 썩 좋지도 않은 것들을 부러워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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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나와 내 주변의 미혼 친구들은 오히려 싱글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도 20대에는 나이 먹으면 드라마 처럼, 명품 구두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괜찮은 구두를 신고 앉아 가난했던 20대를 추억할 거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연봉 동결 또는 삭감과 퇴직금을 받은 아버지들의 투자 또는 사업 실패와 그런 사정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올라버린 물가 또는 집값에 힘입어 우리는 그나마 부유했던 20대를 슬프게 추억하고 있다.
그런 싱글들은 케이블 TV 드라마 를 좋아한다고 한다. 나도 몇 번 보기는 했다. 그런데 볼수록 쓸쓸해지기만 했다. 무슨 친구가 이래. 명색은 그렇다, 돈 없는 이혼녀가 밥 하나 위안으로 삼고 사는데 함께 먹을 사람은 없고 세상은 무서워서 문득 쓸쓸하다는 이야기. 하지만 혼자 사는 여자 이수경이 같은 건물에 사는 잘생긴 남자와 귀여운 여자와 밥 먹는 친구가 되는 걸 보면 이건 그냥 판타지인 거다. 우리 옆집엔 누가 살고 있는가. 남자는 남자이되, 밤마다 개를 패는 사이코가 산다. 방음이 안 돼 개가 맞는 소리를 고스란히 듣다보면 내 삭신이 쑤실 지경이다.
그래도 울적한 금요일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단체로 나오는 프로그램 는 제법 번듯한 친구 노릇을 해주리라 믿었다. 다 남자잖아, 혼자 사는 남자들은 대부분 궁상맞다고. 김태원이 번데기 통조림을 통째로 데워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흐뭇했다. 저것이 설거지거리를 줄이는 방법, 나도 두부를 팩에 담긴 그대로 먹지, 프라이팬 씻기 싫다며 익히지도 않고 생으로. 그런데 어째서 시간이 지날수록 내 마음은 이토록 서글픈 것일까. 김태원이 사는 방이 이토록 불쌍해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아, 맞다. 나 저 방에 살지. 사기 아니다. 나는 김태원과 같은 건물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방이 똑같다는 얘기다. 방은 두 개인데 창문은 하나, 커튼만 치면 암실이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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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김태원과 원룸에 사는 이성재가 빠지면서 는 가까이해서는 안 될 프로그램이 되고 말았다. 뭐지, 저 좋은 집과 훌륭한 취미 생활은?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그들을 보고 있으면 먹여살릴 가족도 없는 주제에 작은 집의 절반을 빚으로 메운 나의 싱글 생활이 부끄러워진다.
결핍은 무언가를 아는 데서 온다이러면 안 된다. 혼자 사는 사람에게 남들이 덧입힌 판타지란 자린고비의 굴비와도 같다. 그거 하나라도 매달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는 거다. 동갑내기 유부녀가 시간을 아끼기 위해 회사 근처에서 장 본 비닐봉지를 들고 끙끙대며 만원 지하철에 오를 때, 나는 요가 팬츠와 책 한 권 담은 백팩을 가뿐하게 메고 필라테스 학원으로 향하는, 화려하고 자유로운 싱글의 판타지. 그녀가 4인용 식탁에 둘러앉는 시간에 나는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설거지 안 하려고) 생채소와 생두부를 먹는 현실은 묻어두도록 하자.
다음날 지각하지 않으려고 재빨리 집으로 기어들어와 맥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결핍은 무언가를 아는 데서 오는 거라고. 산동네에서 살던 어린 시절, 나는 아는 것이 없어서 부족한 줄 몰랐다. 왕자와 공주가 나오는 동화책과 TV 만화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이 혼자 사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TV를 볼 때마다 나는 더욱 외로워지곤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과 내가 사는 세상 사이에 놓인 깊고 깊은 도랑. 그 머나먼 거리를 느낄 때마다 결핍은 외로움이 되어 나의 텅 빈 술상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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