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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정부가 원하는 ‘정답’을 만들다

삼성 제조라인 정밀검사한 인바이런 ‘청부과학’ 혐의, 대규모 국책사업에는 청부용역 논란 빠지지 않아
등록 2013-12-13 12:58 수정 2020-05-02 04:27

“삼성전자 반도체 제조라인 근무자의 발암물질 노출과 백혈병 발병 사이의 상관관계를 찾지 못했다.”
미국 산업안전컨설팅업체 ‘인바이런’의 폴 하퍼 박사는 2010년 7월14일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열린 ‘반도체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 기자회견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도체 공장 근무자들의 백혈병 발병 사실이 드러나 사회적인 논란이 일자, 삼성전자가 인바이런에 의뢰한 정밀조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날 삼성전자는 ‘영업비밀’을 이유로 들어 구체적인 조사 결과가 담긴 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그해 12월부터 2011년 1월 중순까지 1회 2~8시간으로 제한해 삼성전자 기흥캠퍼스에서 ‘영문 보고서’를 열람토록 했을 뿐이다. 2012년 3월 인바이런 조사팀은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국제산업보건위원회(ICOH) 학술대회’에서 이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뒤 삼성전자는 “산업보건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학술대회를 통해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 근무환경이 이상이 없다는 인바이런사 재조사 내용을 검증받았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이에 대해 국제산업보건위원회는 “(학술대회에서) 발표되는 연구 결과를 검증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인바이런, 담배·고엽제·크롬 연구에서 활약

전문가들은 삼성전자와 인바이런 사이에서 일어난 거래를 ‘청부과학’이라고 부른다. 특정 업계의 이익을 대변해주기 위해 이들이 발주한 용역 연구를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포장하는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청부과학 시장은 담배업계뿐만 아니라 석유업계, 독극물 제조업계, 제약업계 등 광범위하게 뻗쳐 있다. 공통된 특징은 업계의 금전적 후원을 받는 중립적인 연구소나 법률회사 등이 과학자들에게 연구 용역을 발주한다는 것이다.

당시 권오현 삼성전자 사장(반도체사업부장)이 “가장 공신력 있는 기관 중 하나”라고 말했던 인바이런도 청부과학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업체다. 인바이런은 미국에서 벌어진 담배업체와 폐암 환자 간 소송에서 담배업체를 대변했으며, 미국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들이 고엽제 후유증을 호소할 때도 그 연관성을 부인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또 미국 정부가 발암성 물질인 크롬의 작업장 기준을 낮추려 할 때, 크롬의 위험성이 알려진 것보다 낮다는 보고서를 발표해 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청부과학은 기업체뿐만 아니라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국책사업에서도 유통된다. 정책 추진의 근거가 되는 연구 결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가 4대강 사업을 추진할 당시,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의 김이태 연구원은 “매일매일 국토해양부 (4대강 추진) TFT로부터 대운하에 대한 반대 논리에 대한 정답을 요구받고 있다”며 “4대강 정비 계획의 실체는 운하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정책 효과를 ‘뻥튀기’해 논란이 된 경우도 많다. 정부가 2008년 종합편성채널 허가 등을 위해 미디어법 개정안을 추진하면서 국책연구원은 “미디어법 통과로 방송국과 관련한 일자리만 2만5천여 개가 늘어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지난 9월에는 한국교통연구원이 서울 수서발 고속철도(KTX)의 하루 평균 이용객을 지난해 4만4천 명에서 올해 10만 명으로 2배 이상 부풀린 보고서를 내놓아 논란이 일었다. 과연 당신은 청부과학자의 보고서를 가려낼 수 있는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


참고 문헌 (존 스토버·셸던 램튼·2006), (데이비드 마이클스·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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