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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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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묘한 타이밍, 신의 한 수

국정원이 조직의 명운을 걸고 던진 ‘반격의 승부수’
‘여론재판’ 분위기 속 ‘촛불’의 고민도 깊어져
등록 2013-09-05 10:55 수정 2020-05-03 04:27
국가정보원이 정국의 중심에 섰다. 국정원 직원들이 지난 8월28일 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의원회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려다 당 관계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국가정보원이 정국의 중심에 섰다. 국정원 직원들이 지난 8월28일 밤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의원회관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려다 당 관계자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한겨레 이정우

내용은 충격적이고, 시점은 미묘하다. 국정원이 이토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던가. 국정원이 들고나온 ‘21세기 내란음모죄’는 정국을 단숨에 뒤흔들었다. 대선 개입 댓글을 달고,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한 국정원에 대한 개혁 요구가 거센 상황에서다. 온갖 혐의가 나불대고 종북의 칼이 춤추는 가운데 ‘사실과 증거’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국정원은 ‘공안 당국’이라는 이름 뒤에서 정국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충격적인 내용을 미묘한 시점에 공개한 국정원은 과연 ‘신의 한 수’를 둔 것인가.

자신만만 “다 확보해놓고 한다”

국정원은 2008년께부터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 이른바 ‘경기동부연합’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내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8월28일 체포된 이상호 수원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등 3명의 체포영장을 보면, “2008. 8부터 위 지하혁명조직 ‘RO’ 산하 경기남부지역책으로 활동해오던 중”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국정원이 이때부터 이들의 동향을 파악해오다 2010년 검찰을 통해 감청 영장을 발부받았다는 보도도 나왔다. 지난 1월에는 국정원 직원이 이상호 센터장을 미행하다 발각돼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무직이고 PC방 아르바이트나 대리운전을 한다”고 거짓 진술을 하다 신분이 들통 나는 사건도 벌어졌다. 국정원은 전격 압수수색을 통해 공개수사로 전환한 이유에 대해 “이런 수사는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공개수사에 착수할 때는 (혐의를 입증할 내용을) 다 확보해놓고 한다”고 말했다. 자신 있다는 얘기다. 국정원은 최근 5월12일 서울 합정동 종교시설에서 열린 모임 녹취록 등의 증거를 확보한 뒤 수사를 공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건의 실체와 무관하게, 국정원이 ‘타이밍 정치’를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진다. 국정원 개혁 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려는 상황에서 사건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댓글 사건에 대한 53일간의 국회 국정조사로 국정원의 정치 개입 실상이 드러났다. 8월26일 열린 원세훈 전 원장의 첫 공판에서 검찰은 국정원의 댓글 작업에 대해 “그릇된 종북관에 따라 근거 없이 무차별적으로 종북 딱지를 붙이는 신종 매카시즘 행태”라고 말했다. 9월2일 시작되는 정기국회에는 국정원 개혁 논의가 예정돼 있다.

국정원은 이번 통합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존재 이유를 과시하면서 국내 파트 존속, 수사권 강화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혐의가 입증돼야 가능한 일이다.

민주당은 국정원의 대공 수사권 폐지, 국내 정보 수집권 폐지를 뼈대로 하는 국정원 개혁안을 마련했다. 국정원 예산 투명화, 국정원 요원의 국회 출입 금지 등도 요구하고 있다. 새누리당도 조직 일부 축소 등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국정원이 박근혜 대통령의 주문대로 ‘셀프 개혁안’을 내놓는다 해도, 국회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적다는 얘기다. 궁지에 몰린 국정원이 조직의 명운을 걸고 ‘반격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통합진보당 사건은 민주당의 원내·외 병행 투쟁 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민주주의 수호·민생경제 회복’을 위한 의원 워크숍. 한겨레 신소영

통합진보당 사건은 민주당의 원내·외 병행 투쟁 전략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29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민주주의 수호·민생경제 회복’을 위한 의원 워크숍. 한겨레 신소영

남재준 국정원장의 ‘절묘한 타이밍’은 이미 전례가 있다. 남 원장은 지난 6월24일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무단으로 공개했다. 여야가 국정원 댓글 국정조사에 합의한 직후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 와중에 군사작전 하듯 회의록 전격 공개라는 강수를 둔 것이다. 남 원장의 이런 ‘상상초월’ 행동으로 정국은 급속도로 대화록 정국으로 전환됐다. “나도 정치 중립을 지킬 테니 정치권도 지켜달라”던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안보 정치’ 논리로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야권은 박 대통령에게 남 원장의 해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엄중한 일… 대통령은 보고를 받았을 것”

남 원장의 이런 ‘전과’뿐 아니라 그가 평소 밝혀온 ‘소신’을 고려하면, 수사 공개 시점의 타이밍과 내란음모죄라는 어마어마한 죄목 적용이 어느 정도 설명되는 부분이 있다.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남 원장은 정권과 조직의 보위를 최우선시하는 인물이다. 별명이 ‘(육사)생도 3학년’일 만큼 ‘융통성 없는 강경 군인’으로 여겨졌다. 국익을 내팽개친 대화록 공개와 관련해, 남 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비난의 목소리를 간단히 뭉갰다. 그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현역 군인과 학생군사학교 생도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통해 “다시는 이 땅에 좌파들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그 토양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이들을 뿌리째 뽑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3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는 “우리나라 상황은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다. 북한은 지금 현재도 심리전·통일전선전술 이런 것을 지속적으로 획책하고 있는데, 그런 전쟁 양상에서는 전방도 중요하지만 국민의 의지를 결집시키고 통일전선전술의 침투를 막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건 국가 생존에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것을 일반 검찰에 넘기면 안 된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이번 통합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존재 이유를 과시하면서 국내 파트 존속, 수사권 강화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물론 혐의가 입증돼야 가능한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조직 개편을 비롯한 국정원 개혁은 벌써 시작됐다”고 말했다. 야당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남 원장이 진행해온 국정원 조직개편을 개혁으로 규정한 것이다.

야권에서는 국정원이 사건을 3년여 동안 내사한 점을 들어, 청와대가 수사 상황을 파악하며 이 사건을 정국 운영에 활용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도 보내고 있다. 청와대는 지난 8월28일 압수수색 직후 “엄중한 일이어서 대통령은 보고를 받았지 않았겠는가 싶다. 사실이라면 정말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정말 경악할 일”(이정현 홍보수석)이라는 공식 반응을 내놓은 뒤 별다른 말이 없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5월12일 모임 녹취록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주목할 만한 건 이틀 전 박 대통령의 발언이다. 박 대통령은 8월26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야당이) 작금에는 (3·15) 부정선거까지 언급하는데, 나는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고 선거에 활용한 적도 없다”며 “야당에서 주장하는 국정원 개혁도 반드시 이뤄낼 것이다. 우리 안보를 책임지는 국정원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국정원 조직개편을 비롯한 국정원 개혁은 벌써 시작됐다”고 말했다. 야당으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남 원장이 진행해 온 국정원 조직개편을 ‘개혁’으로 규정한 것이다.

중요한 이슈는 다 묻혀버리고

지금까지 상황으로는, 국정원은 ‘국면 대전환’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압수수색 직후 언론을 통해 온갖 혐의가 흘러나오면서 이미 ‘여론재판’이 벌어지는 분위기다. 검찰에서도 “우리도 모르는 피의사실이 언론에 공표되고 있다”는 불만이 나올 정도다.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는 “사건의 진위는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국정원은 국정원 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낮추는 소기의 성과를 이미 거뒀다고 본다.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후퇴 등 중요한 이슈들이 다 묻혀버리고 있다”고 말했다.

야권의 처지는 매우 곤란해졌다. 민주당은 ‘종북 프레임’에 휘말릴까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 벌써부터 “이석기 의원이 국회에 입성한 것은 민주당 책임”(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민주당은 지난해 총선 때 통합진보당과 야권 연대를 했지만, 총선 직후 불거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태 이후 거리두기를 해왔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통합진보당이 참여하는 촛불집회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국정원 용공조작’ 등의 손팻말이 등장하는 방식에 대한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민주당은 국정원 압수수색 전 ‘통합진보당 간첩단 사건’이 터질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이번 사건의) 실질적인 타깃은 통합진보당이지만, 정치적인 타깃은 민주당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당장 9월 초 국회에 제출될 것으로 보이는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를 어떻게 할지도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윤희웅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조사분석실장은 “민주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였다. 장외투쟁의 동력을 이어나가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촛불’의 고민도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사건에 대해 “국정원 정치 개입 문제와 별개로 대응할 일”이라고 말하지만, 내부 온도 차이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시민사회 시국회의’(국정원 시국회의)가 결속력이 강한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단체별로 이견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수사를 더 지켜봐야 하지만, 여론이 걱정된다는 것이다.

불법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있는 게 본질

‘내란 음모’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미묘한 시점에 대한 해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국정원이 대선 개입 댓글을 달고 대화록을 무단 공개하는 등 정치 개입을 했다는 사실이다. 박용진 민주당 대변인은 “군대가 오늘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어제 저지른 군사 쿠데타 행위를 용서받을 수 없는 것처럼, 국정원이 이번 사건에 어떤 성과를 낸다 한들, 국기 문란 행위에 대한 책임을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국정원이 지난해 대선 개입, 남재준 원장의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이번 압수수색의 시기 선택,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아주 공공연하게 때로는 불법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있는 게 본질이고, 이 문제는 이 문제대로 해결해야 한다. 이번 (통합진보당) 사건 때문에 그런 걸 다 봐줄 수 있다, 이렇게 넘어가면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이 국정원의 정치 개입 문제를 물타기하거나, 국정원 개혁을 가로막는 수단으로 이용돼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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