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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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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 없는 복지’ 유체이탈 궤변의 막장극

당·정·청 협의를 거쳐 확정한 정부안에 대해 박 대통령은 ‘원점 재검토’ 한마디로 책임 회피… 세금 파동을 계기로 ‘복지수정론’ 제기돼
등록 2013-08-21 09:19 수정 2020-05-03 04:27
박근혜 대통령은 8월12일 수석 비서관회의에서 세법개정안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다. ‘구경꾼정치’라는 비판이 나온다.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은 8월12일 수석 비서관회의에서 세법개정안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다. ‘구경꾼정치’라는 비판이 나온다.청와대사진기자단

세금 파동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유리 지갑’도 아니고,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은 “원점 재검토”라는 말 뒤로 숨었다. 기획재정부 관료들은 밤을 새워 하루 만에 수정안을 내놓았다. 8월8일 발표된 세법개정안에 반발하는 ‘중산층’ 가운데 일부를 ‘증세 대상’에서 빼주는 땜질 처방이었다. 대기업·고소득자 증세에 대한 요구는 원점 재검토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점 재검토’였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급한 불은 껐다.

하루 만에 접은 민주당의 ‘저지 서명운동’

박 대통령은 ‘증세 없는 복지 확대’를 공약했다. 증세는 절대 하지 않는다면서 복지 공약 후퇴는 없다고 말한다. 세법개정안은 이런 정책 기조에 맞춰 생산된 것이다. 모순된 정책 기조 탓에 세금을 늘리면서 증세가 아니라는 궤변이 등장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여전히 나와는 관계없다는 식이다. 유체이탈 화법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세법개정안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출범 이후 7개월여 동안 당·정·청이 협의해 만들었다. 공식 발표를 사흘 앞둔 지난 8월5일 당·정·청 회의에서 새누리당은 ‘형평성’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세율 인상, 세목 신설 등 직접 증세가 아닌 비과세 감면 정비 등 과세 기반 확대를 우선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그러나 세 부담은 납세자가 타당하다고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므로 세법개정에 대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며 중산층 세 부담에 대해 유념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아무런 내용 변화 없이 8월8일 세법개정안이 발표됐다. 세 부담 증가 기준은 연소득 3450만원으로 설정됐다. 새누리당은 다음날 주요당직자회의에서 수정·보완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원안 고수에 무게를 뒀다.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이날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저도 제 주머니에서 16만원 빼가는 것 싫어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봉급생활자들은 다른 분들보다 여건이 낫지 않나” “마치 거위에게서 고통 없이 털을 뽑는 방식으로 해보려고 한 것” 등의 발언을 쏟아냈다. ‘거위 깃털론’은 수많은 거위(봉급생활자)들을 자극했다.

주말을 거친 뒤 8월12일 박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다. 발표 나흘 만에 이뤄진 후퇴였다. 이날 오전 ‘중산층·서민 세금폭탄 저지 특별위원회’를 발족한 민주당은 ‘대국민 세금폭탄 저지 서명운동’을 하루 만에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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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후퇴는 이례적이다. 그만큼 민심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도 반발하는 상황에서 하반기 국정 운영이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 같다. 중산층의 민심 동요는 10월 재·보궐 선거와 내년 지방선거에서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당정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이날 오전·오후 두 차례에 걸쳐 긴급 당정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다음날 발표된 수정안은 세 부담 증가 기준을 5500만원으로 높였을 뿐이다. 애초 추정보다 줄어들게 된 세수 4400억원을 어디에서 충당할지도 밝히지 않았다.

줄어든 세수는 어디서 충당할 것인가

이번 세금 파동에는 당·정·청의 정무·홍보 기능 마비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부자 증세에 대한 방안 없이 봉급생활자를 어떻게 설득하려 했는지 고민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봉급생활자의 반발을 우려하면서도 청와대가 하자니 그냥 따라가는 태도를 보였다. 여당으로서 정책 조정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 채 문제가 커지자 기획재정부를 탓하고 있다. 새누리당 안에서는 현오석 부총리를 경질하라는 주장도 나온다. 기획재정부는 박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지시에 적잖게 당황한 눈치다. 당·정·청 협의를 거쳐 확정한 정부안에 대해 책임을 뒤집어쓰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세금 정책을 놓고 대통령의 한마디에 당정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1인 통치’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기획재정부는 박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지시에 적잖게 당황한 눈치다. 국민 생활과 직결된 세금 정책을 놓고 대통령의 한마디에 당정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1인 통치’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민주당은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탐내 정책적 가치를 스스로 훼손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증세는 세금폭탄’이라는 잘못된 프레임을 앞세워 조세 불신을 조장했다는 비판이 거세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 4개 복지·시민 단체는 8월11일 공동성명에서 “보편 복지를 지향하는 정당이 무시무시한 세금폭탄론을 꺼내다니 복지국가에 대한 기본 철학을 지니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보수 정당이라면 중간 계층에게 월 1만원의 ‘부담’만을 강조하며 조세 저항을 부추기겠지만, 보편 복지 정당이라면 근래 누리는 무상급식·무상보육 등을 강조하며 월 1만원의 ‘책임’을 제안하는 게 옳다”고 비판했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증세는)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통념에 구속돼 정부든 야당이든 증세를 회피하려는 꼼수를 부린 게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며 “증세가 부담스러우니 복지를 안 하겠다는 것보다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증세가 필요하다고 국민들께 솔직히 설명하는 게 정치의 본분이자 책임 있는 정치 지도자의 자세”(8월14일 기자회견)라고 비판했다.

보수 언론 아예 ‘복지수정론’ 설파 나서

박 대통령은 ‘증세 없다’는 기조를 확실히 하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는 법인세율 인상이나 소득세 과표구간 변경에 대해서는 전혀 검토나 고려를 하고 있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증세 없는 복지’는 결국 복지 축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미 박 대통령의 복지 공약이 곳곳에서 후퇴하고 있다. 65살 이상 노인과 중증장애인에게 기존보다 2배 인상된 기초연금을 지급하겠다는 공약은 지난 7월 대상자가 하위 소득 노인 70~80%로 줄었다. 새누리당 안에서도 복지 공약 축소론이 불거지고 있다. 보수 언론은 아예 이번 세금 파동을 계기로 ‘복지수정론’을 설파하고 나섰다. 봉급생활자들의 조세 형평성에 대한 불만을 ‘증세에 대한 거부감’으로 규정한 뒤 ‘복지를 줄여라’고 주문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는 ‘모든 계층에 혜택주는 무차별 복지는 우선 조정해야’라는 제목의 기사(8월14일치)에서 ‘보편적 복지’를 ‘무차별 복지’로 규정했다. ‘증세 없는 복지 축소’가 구체화한다면 세금폭탄론을 꺼내들었던 민주당은 뭐라고 말할 것인가. 세금폭탄은 안 되니 복지를 축소하라? 복지 확대를 위해 세금폭탄을 퍼부으라?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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