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이제 복지를 위한 증세는 사실상 상수가 됐고, 비용 부담을 나누는 방식만이 변수로 남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고집이 단숨에 꺾인 데서 알 수 있듯, 증세의 원칙을 정하는 건 정부가 아니다. 납세자의 다수이며, 미래 복지의 수혜자이며, 핵심 유권자인 중간 계층이다. ‘복지 증세′의 캐스팅보트를 쥔 중간 계층에게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조금 덜 내고 계속 불안하게 살 것인가, 좀더 내고 안전한 삶을 누릴 것인가. _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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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입사 14년차인 최아무개(39)씨는 세금 걱정을 해본 일이 없다. 연봉이 7천만원 정도로 꽤 많아도 실제 내야 하는 근로소득세는 거의 없는 까닭이다. 지난해에도 원천징수로 수백만원의 세금을 떼였지만 이듬해 연말정산에서 대부분 환급받아 결국엔 100만원가량만 납부한 셈이 됐다. 세 자녀의 교육비로 750만원, 양가 부모님의 의료비로 600만원 등 각종 소득공제 혜택을 받은 덕에 연봉의 대부분이 소득으로 계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font size="4">내고 돌려받고… 세금 사실상 ‘제로’</font>
그가 내는 세금은 사실상 계속 ‘제로’지만 그가 받는 복지 혜택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올해부터 무상보육이 전면 시행되면서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의 보육비로 매달 22만원, 집에서 돌보는 막내의 양육수당으로 매달 10만원을 지원받고 있다. 내년부터는 양가 부모님에게 많게는 20만원까지 기초연금이 나온다고 하니 용돈 부담도 살짝 줄어든다. 게다가 정부의 약속대로라면 앞으로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학비가 공짜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의료비 부담도 크게 줄어든다. 이런저런 혜택을 생각하면 정부가 지난 8월8일 내놓은 세법개정안에 따라 한 달에 추가로 내야 하는 1만3천원의 세금이 아깝지 않다. 오히려 갑자기 세법개정안 수정안이 튀어나오면서 추가 세 부담이 2500원으로 크게 줄어 “약속한 복지가 줄어드는 건 아닐까” 하고 불안해졌다. “젊어서 이렇게 뼈빠지게 일하는데 늘 노후 불안에 떨고 있다. 노후 걱정을 덜기 위해서라도 복지는 확대돼야 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세금은 더 걷어도 된다. 다만 내가 낸 돈이 4대강 사업처럼 엉뚱하게 쓰이지 않고, 복지 확대에 쓰인다는 확신을 정부가 줘야 한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50%" align="right"><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ffffff"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fffff"><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size="3"><font color="#666666">민심의 잣대로 여겨지는 중간계층이 복지 증세를 원하고 실제로 팍팍한 살림살이를 쪼개 세금을 더 낸다면, 정부와 보수 진영이 지금처럼 대기업·고소득층에 유리한 쪽으로 세제 혜택을 줄 명분이 약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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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어설픈 세법개정안의 ‘최대 피해자’로 꼽히는 중간 계층(중산층·중위소득 50~150% 소득자) 직장인의 상당수 속내는 이렇다. 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복지 혜택만 늘어난다면, 정부가 세금을 조금 더 걷어도 수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같은 ‘편익(복지)-비용(세금)’ 분석을 해보면, 이번 세법개정안 원안이 총급여(연간 급여에서 비과세 항목을 뺀 금액) 3450만~7천만원인 중간 계층 직장인 324만 명에게 추가로 지우려 했던 세 부담은 이들이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근로소득세 공제 방식이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바뀌면서 중간 계층이 추가로 내야 하는 세금은 한 달에 1만3천원꼴(연간 16만원)로, 박근혜 정부가 약속한 복지 시리즈가 실현될 경우 얻게 될 혜택에 비해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간 계층은 고소득 직장인과 비슷한 복지 혜택을 누리더라도 감당해야 하는 세금 부담이 훨씬 적다. 소득세 실효세율(비과세·감면 혜택을 제외하고 실제 부담하는 세부담률)이 급여 구간에 따라 1.9~4.4%에서 0.3%포인트씩 늘어나는 정도다. 총급여가 7천만원이 넘는 고소득 직장인은 추가 세 부담이 한 달 2만7500~72만원으로 중간 계층보다 2~55배 많다. 누진세 원리에 따라 실효세율이 0.5~2%포인트씩 가파르게 오르는 까닭이다.
<font size="4<b">그들이 언제 ‘조세저항’ 한 적 있었나</font>그러나 이렇게 중간 계층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소득세제의 누진성은 강화하는 정부의 세법개정안은 민주당을 비롯해 일각에서 제기한 ‘세금폭탄’ ‘중산층 증세’ 따위의 여론몰이에 밀려 결국 크게 손질됐다. 수정안에 따르면, 총급여 7천만원 초과 고소득층은 원안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내지만, 총급여 3450만~5500만원인 중간 계층의 추가 세 부담은 사라지고, 5500만~7천만원의 경우엔 한 달 1600~2500원만 내면 된다. 이런 구조조정으로 4천만원 이하 직장인의 세 감면 혜택은 되레 줄어들었다.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의 지적은 이렇다. “상위 28%(원안에서 추가 세 부담을 지운 총급여 3450만원 이상 직장인 비율)는 충분히 한 달 1만3천원 이상의 추가 세 부담을 질 수 있는 계층이다. 고소득층의 세 부담은 늘고 저소득층은 줄면서, 조세 체계의 누진성이 강화되고 과세 형평성도 좋아진다. 그런데도 세금폭탄이라며 과세 구간을 오히려 후퇴시켜버린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중간 계층도 한 달 1만3천원의 추가 부담을 감당 못할 ‘폭탄’으로 느껴 정부의 세법개정안에 반대했던 건 아니다. 이들을 가장 분노하게 한 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직장인들에게만 일방적으로 부담을 강요하는 ‘과세의 공평성’ 훼손 문제다. 정부가 사회적 부를 독식한 대기업·자산가·고소득 자영업자 등에는 공정한 납세의 책임을 묻지 않으면서 직장인들 간 형평성만 따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이번 세법개정안에서는 이명박 정부 때 감세정책으로 특혜를 입은 대기업의 법인세 실효세율을 높이려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변호사·의사 등 고소득 자영업자의 소득 탈루를 막기 위한 적극적인 조처도 없었고, 자산가들의 금융거래에 대한 과세를 강화하는 내용도 빠졌다(자세한 내용은 36~37쪽 참조).
직장인 10년차인 이아무개(40)씨의 비판은 이렇다. “중간 계층이 ‘조세저항’을 한다고들 말하는데 매우 기분이 나쁘다. 나는 조세저항을 한 적 없다. 지금껏 꼬박꼬박 세금을 내왔고, 정부가 더 내라고 하면 더 낼 거다. 다만 나보다 더 많이 벌면서 세금은 안 내는 이들보고 제대로 내라고 요구하는 것뿐이다.”
소득세만 손질한 정부에도 할 말은 있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소득세 비중은 3.6%(2010년 기준)로 법인세나 재산세 등과 달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8.4%)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게 정부 주장이다. 각종 비과세와 공제 혜택으로 근로소득세를 내지 않는 면세자가 36%가 넘고, 소득세를 내더라도 실효세율이 평균 4.4%에 불과한 탓이다. 특히 상위 1%의 초고소득자는 실효세율이 20.9%에 이르지만, 상위 50% 이내 중간 계층까지 포함하면 근로소득세 실효세율은 0.9%에 그친다. 그만큼 중간 계층이 근로소득세를 적게 내고 있다는 뜻이다. 강병구 참여연대 조세재정개혁센터 소장(인하대 경제학과 교수)의 설명이다. “국내에서 소득세 비중이 낮은 데는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고소득층에 비과세·감면 혜택이 집중된데다, 근로자의 임금소득 자체가 적기 때문이다. 여기에 정부가 소득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자영업자와 소득이 100% 드러나는 근로자 간의 과세 형평성을 맞춘다며 자꾸 근로소득 공제를 해준 이유도 있다. 그러다보니 세금을 내지 않거나 적게 내는 비율이 복지국가에 비해 높다.”
<font size="4">징벌적 성격 강한 선별증세·부자증세</font>
진보 진영에서 중간 계층 직장인의 손에 보편적 복지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가 쥐어져 있다고 보는 건 이 때문이다. 경제의 허리를 담당하면서도 세금은 상대적으로 적게 내는 중간 계층이 세금을 조금 더 내야 ‘보편 복지’에 필수적인 ‘보편 증세’의 길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상위 1%의 대기업과 부자를 대상으로 한 ‘부자 증세’를 내세우는 목소리도 있지만, 징벌적 성격이 강한 선별 증세는 보편 복지의 원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해서 얻어진 세수도 미미하다는 게 문제다.
중간 계층 직장인의 증세 참여는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민심의 잣대로 여겨지는 중간 계층이 복지 증세를 원하고 실제로 팍팍한 살림살이를 쪼개 세금을 더 낸다면, 정부와 보수 진영이 지금처럼 대기업·고소득층에 유리한 쪽으로 세제 혜택을 줄 명분이 약해지는 까닭이다. 여권과 보수 언론에서 “중간 계층의 조세저항이 심하니 복지 공약을 축소해야 한다”는 퇴행적 주장이 쏟아지는 건, 뒤집어 말하면 중간 계층의 정치적 힘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복지 증세가 중간 계층에 단지 사회적 책임만 지우려는 건 아니다. 복지가 확대되면 중간 계층의 생활도 크게 나아진다. 대기업과 고소득층이 더 낸 세금이 저소득층뿐 아니라 중간 계층으로도 흘러들기 때문이다. ‘내가만드는복지국가’가 개발한 ‘복지 체험앱’을 활용해 보편 복지가 이뤄질 경우 소득수준별로 누리게 될 복지 수준과 추가로 내야 하는 세금을 비교해보면 재분배 효과가 쉽게 확인된다.
연 가구소득 2500만원, 6500만원, 1억5천만원인 세 가구가 있다. 이 가구들은 모두 부부, 70살 노모, 대학생 자녀, 고등학생 자녀 등 5명으로 구성됐다. 똑같이 자가 주택에 살고 있고, 연 400만원의 의료비를 지출한다. 만약 무상의료, 대학 반값 등록금, 기초연금 등 보편적 복지가 실현된다고 하면, 연소득 6500만원인 중간 계층이 누릴 수 있는 복지 수준은 현재 월 50만원에서 132만원으로 크게 뛴다. 이를 위해 더 내야 하는 세금은 한 달 10만7천원 정도다. 그러나 1억5천만원의 고소득 계층은 똑같은 복지 수준을 얻는 데 한 달 55만3천원을 더 내야 한다. 중간 계층의 5배에 이르는 돈이다. 반면 2500만원의 저소득 계층은 지금보다 대략 월 3만원만 더 내면 된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경제학)는 지난 8월12일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보편적 복지를 하지 않으면 복지 수혜를 받는 사람들은 낙인이 찍히게 되고,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중산층(중간 계층) 이상에서는 불만이 생긴다”며 “스웨덴이나 덴마크 등에서 복지제도 자체에 큰 불만이 없는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내면서도 받을 건 다 받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font size="4<b">‘복지 증세’ 논쟁은 이제 시작</font>
정부가 재빨리 수정안을 내면서 ‘중산층 증세’ 논란은 잠시 수그러들었지만, ‘복지 증세’ 논쟁은 이제 시작이다. 박근혜 정부는 임기 중 소득·소비세 비중은 높이고 법인세·재산세는 성장친화적으로 조정한다는 조세정책 목표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인세와 재산세 부담을 낮춰주면서 135조원에 이르는 복지 등 공약 재원을 마련하려면, 내년에는 다시 소득세 과세 확대와 부가세 인상을 들고나올 가능성이 높다. 보편적 복지를 위한 보편적 복지 증세 원칙에서 더 멀어질뿐더러, 대기업·고소득층과 서민·중간 계층 간 과세 형평성도 더 왜곡시키는 방향이다.
이에 맞서 진보 진영에서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두 트랙으로 함께 올리는 방안과 아예 복지만을 위한 목적세인 ‘사회복지세’를 신설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내놓으며 ‘복지 증세’를 위한 논쟁에 불을 붙이고 있다. 강병구 소장의 말이다. “중간 계층은 이미 운동장이 기울어진 상태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 역진적인 조세 체계를 바꾸지 않고 중간 계층에 더 큰 세 부담을 더 요구하면 당연히 반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불평등한 상황에서도 중간 계층이 ‘나도 낼 테니, 당신도 내시오’라고 한다면 복지를 위한 증세 논의에 큰 동력이 될 것이다.” 증세 논란의 중심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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