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불법적인 선거 개입 지시를 실행에 옮긴 국정원 간부와 직원들을 전원 기소하지 않고 이를 외부에 알린 내부고발자만 불구속 기소했다. 이종명 전 3차장, 민병주 전 심리전단장, ‘국정원 여직원’ 김요원(가명)씨 등 직원 3명과 외부 조력자 이아무개씨 등이 ‘면죄부’를 받았다. 고발되지 않은 나머지 심리전단 직원 70여 명도 모두 입건유예 처분했다. 검찰이 밝힌 이유다. “원장의 지시에 따라 범행했고 상명하복 관계의 조직 특성 등을 감안했다.”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가 지난 6월1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서울고검 기자실에서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안경을 매만지고 있다.한겨레 김태형
검찰의 이러한 판단은 대법원 판례에 어긋난다. 1997년 대선에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의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원세훈 전 원장처럼 공무원 지위를 이용해 불법 선거운동을 했다.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낙선시키려고 재미동포를 포섭해 “김 후보가 김정일에게 돈을 받았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게 했다. 그럼에도 김 전 대통령이 당선됐고 검찰은 권 전 안기부장 등 안기부 직원 6명을 안기부법·선거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일부 직원들이 “안기부는 엄격한 상명하복의 관계에 있는 조직”이라며 “강요된 행위라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은 1999년 4월23일 이렇게 판결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적법한 공무 수행 명령에 복종할 의무만 있다. 선거를 앞두고 특정 후보에 대한 반대 여론을 조성할 목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명백한 불법 명령을 직무상 명령이라 할 수도 없고 따를 의무도 없다.” 상명하복이 엄격한 조직이라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안기부 직원의 정치 참여가 법률로 엄격히 금지돼 있고 권영해 전 부장의 의도를 다른 직원들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피고인의 경력과 지위 등을 비춰보면 강요된 행위라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권 전 부장(징역 5년)과 더불어 다른 직원들은 모두 유죄를 확정받고 안기부는 국가정보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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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거꾸로 흘러 2013년 6월14일 검찰은 국정원의 상명하복을 인정했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의 박주민 사무차장(변호사)은 “권력기관 직원들이 윗선의 불법적 지시를 잠자코 수행하면 보호하겠다는 암묵적 메시지를 담은 게 아니냐”고 지적했다. 장정욱 참여연대 시민감시팀장은 “검찰의 논리대로라면 조직폭력배와 공무원이 다를 바 없어진다. 제2의 원세훈·김용판(전 서울경찰청장)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검찰의 국정원 직원 기소유예 처분에 불복해 민주당은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을 냈고 민변은 서울고검에 항고했다.
민간인 사찰 총리실 말단 직원에겐 실형‘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에서 증거인멸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받은 장진수(40) 주무관(7급 공무원)이 말한다. “나는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가장 말단 직원에 불과했다. 윗선의 지시에 따라 증거를 인멸했지만 재판에 넘겨져 실형을 받았다. 국정원 직원도 실형을 받을 경우 나처럼 양심고백을 할지도 모른다. 사건이 더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을 검찰이 고려한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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