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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대한민국은 왜 세습에 분노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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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세습에 분노하지 않는가

등록 2013.01.10 08:59 수정 2020.05.01 19:27

재벌은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재벌 2세는 아무나 되지 못한다. 2세는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그렇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부와 지위에 따라 자녀의 삶이 결정되는 사회는 불공정하다. 국적·인종·성별로 차별하는 나라가 부당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더이상 세습에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자 부모, 힘센 부모를 둔 그들을 선망한다. <한겨레21>은 신(新)신분사회에 관대해지는 2013년 한국 사회를 분석한다.

대기업에서 10년간 일했던 이지운(38)씨는 “대기업에는 신분이 있다”고 했다. 오너의 자식은 성골, 임원의 자식은 진골, 이도저도 아닌 사람은 육두품이다. 신분을 망각하고 날뛰다가는 단칼에 날아간다. 감히 권력 세습을 부정하고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다는 주장을 펴면 목숨을 잃던 왕조시대와 다를 바 없다. “무역 관련 부서에서 경력사원을 뽑았는데 현직 임원의 아들이 들어왔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할 실력이 되지 못해 협력업체에서 경력을 쌓게 한 뒤 데려온거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부모 잘 만나면 저렇게 쉽게 사는구나’라며 다들 부러워만 했다.”

재벌장상의 씨는 따로 있다
초등학교 6학년·5학년 딸과 5살 아들을 둔 이계화(39)씨는 “계층을 뛰어넘으려면 부모의 재산이 필수”라고 했다. 의사로 10년간 일한 남편 덕에 세 자녀를 뒷바라지하지만 한계가 분명하다. 부모가 대형병원을 세워준 ‘부의’(富醫)와 월세 수백만원에 허덕이는 ‘빈의’(貧醫)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달리기로 비유하자면 이렇다. 예전에는 누가 쉬지 않고 빨리 달리느냐가 관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가 사준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은 슬슬 페달을 밟지만 격차가 자꾸만 벌어진다. 죽어라 뛰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구조다. 자전거가 부러운 게 당연하다.”

세습에 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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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이 두잇서베이와 함께 2012년 12월28~31일 20살 이상 2790명을 대상으로 온라인 여론조사한 결과, 3명 중 2명(61.4%)이 ‘한국 사회에서 세습이 강화되고 있다’고 답했다. <한겨레>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가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 의뢰해 2012년 12월22~23일 전국 성인 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도 3명 중 2명(61.6%)이 한국 사회를 ‘부모의 지위에 따라 자녀의 계층 상승 기회가 닫혀 있는 폐쇄적 사회에 가깝다’고 진단했다. 특히 20대와 30대에서는 그 비율이 75% 안팎으로 올라갔다. 자녀가 성공하는데 ‘부모의 경제적 지위’와 ‘개인의 노력’ 중 어느 것이 더 영향을 끼치는지 물어보니, 부모의 경제적 지위라는 답변(54.9%)이 개인의 노력(44%)보다 우세했다. 역시 40대 이하 젊은 층에서는 60% 이상이 부모의 경제력을 꼽았고, 25∼29살에서는 그 비율이 71.9%나 됐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렇게 분석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20대가 현실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 없이는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젊은 층이 부의 대물림에 더욱 민감하다.” 한 집안에서 축적된 부가 여과 없이 대물림되는 ‘부의 세습’이 한국 사회에 이미 만연해 있다. 설문조사 결과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한국 사회에서 심화하고 있는 격차의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31%가 ‘부의 세습으로 인한 계층 이동의 어려움’이라고 답했다. 그다음으로는 비정규직 양산과 차별 같은 ‘노동시장의 불평등’(22.2%), ‘과도한 학벌사회’(16.5%), ‘부족한 사회안전망’(14.7%)이 뒤를 이었다. 주로 40대 이하(37.2%), 대학 재학 이상(38%), 월평균 가구소득 400만원 이상의 중·상위 소득(40.5%), 자영업(40%)·화이트칼라(38.4%) 응답자가 부의 세습을 양극화 심화의 제1원인으로 지목했다. 이지운씨나 이계화씨처럼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대물림을 경험한 이들이다.
돈이 어디서 오는지 확인해보면 부의 세습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가늠할 수 있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는 2012년 7월 한국 부자들이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조사했다. 10억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 부자들 14만2천 명을 대상으로 했는데, 절반가량(45.8%)이 부동산으로 재산을 모았다. 그다음으로는 개인사업이 28.4%, 상속이나 부모의 지원이 13.7%, 월급을 저축해서 재산을 모았다는 사람은 3.9%였다. 그렇다면 부동산 종잣돈은 어떻게 모았을까? 개인사업(32%)과 부동산 투자(29.1%)가 엇비슷했고 부모의 지원·상속(21.2%)이나 월급(11.4%)이 뒤를 이었다. 연령대별로 구분하면 더 흥미롭다. 50살 이상은 48.7%가 근로소득으로 종잣돈을 모은 반면, 49살 이하는 부모의 지원과 상속이 29.9%에 이른다. 50대 이상은 자수성가로 종잣돈을 모았다면, 50대 미만은 부의 대물림으로 부자가 되는 경향이 강한 셈이다. 조준현 부산대 교수(경제학)는 “대물림하지 않고는 부자가 될 수 없는 부의 양극화 현상이 그만큼 고착화됐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부끄러운 일’ 아닌 ‘부러운 일’
평균 자산 규모를 비교해봐도 그렇다. 2012년 11월 통계청이 발표한 ‘가계금융동향조사’를 보면, 20대의 경우 평균 순자산이 7042만원이다. 그러나 50대는 3억2663만원으로 4.6배가 넘는다. 과거에는 부모 세대가 힘들게 벌어 자녀 세대를 공부시키고 결혼시키느라 ‘가난한 아빠, 부자 아들’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는데, 이제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들’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하는 아들보다 부동산에 투자한 아빠가 소득이 훨씬 많은 탓이다. 반면 부동산값이 치솟아 아들은 월급을 모아 내 집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결혼할 때 부모가 집을 사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부러운 일’이다. <한겨레21>의 설문조사를 보면, 부모가 결혼하는 자녀에게 집값을 지원하는 경우 ‘세습이 아니다’(46.9%)라는 의견이 ‘세습이다’(33.4%)라는 의견을 압도했다. 세법상 증여세를 내야 하는 일인데도 말이다(36~37쪽 기사 참조). 부모의 결혼 ‘선물’에 세습이라는 부정적 단어를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한겨레21> 설문조사에서도 ‘부의 세습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32%였다.
부의 세습을 용인하면 경영권 세습에 가까워진다. 재벌 총수들에겐 기업은 ‘내가 키운 것’이고 ‘내 소유’라는 인식이 확고하다. ‘내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무슨 문제냐’고 주장한다. ‘내 재산’에는 기업 경영권도 포함된다. 문제는 기업이 총수가 멋대로 처분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냐는 점이다. 2012년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집단(재벌)의 소유 현황을 보면, 재벌 총수 일가의 지분은 많아야 4∼5%에 그친다. 예컨대 재계 1위인 삼성은 이건희 회장 일가의 지분율이 0.95%에 불과하다. 법률적으로 기업의 주인이 주주라는 점에 비춰보면 지분율 0.95%의 이 회장 일가가 주인 행세를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처럼 총수가 적은 지분만으로도 재벌을 지배할 수 있는 건 계열사가 가진 지분 덕분이다. 재벌의 계열사 지분은 평균 50.65%에 달한다. 이건희 총수 일가는 실제 소유권 0.95%에 계열사 지분 58.75%를 더해 이른바 ‘황제경영’을 한다.
유전될 리 없는 경영 능력인데
“경영권 세습은 2020년 올림픽 대표팀을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식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워런 버핏
보유 지분을 상속하면 경영권도 따라간다고 재벌은 주장한다. 하지만 소유와 경영은 동의어가 아니다. 보유 지분을 상속하는 것이야 세금만 제대로 낸다면 개인의 자유지만, 기업을 지배하고 경영할 수 있는 경영권은 사유물이 아니다. 특히 한국 재벌은 개발 과정에서 국민의 뒷받침과 희생, 국가 지원을 통해 성장했다.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의 설명이다. “1972년 8·3 조치(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의 긴급명령 15호)로 망해야 할 기업의 채권을 국가가 탕감해줬다. 부실 기업을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시장을 일부 기업에 몰아주고 철도·전기 요금 등 온갖 혜택을 국민의 세금으로 안겨줬다. 그런데 재벌들이 과거를 잊고 황제처럼 군림하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해 대기업을 “국민기업”이라고 불렀다.
게다가 경영 능력은 부와 달리 상속될 수도, 유전될 수도 없다. 경영권 세습은 비합리적인 선택이다. 미국 뉴욕 월가의 전설적인 주식 투자가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경영권 세습은 2020년 올림픽 대표팀을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식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한국 사회는 자격 없는 2세들의 경영권 세습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이미 1997년 경제위기 때 경험했다. 30대 재벌 중 16곳이 간판을 내린 ‘대마불사 붕괴’의 바탕에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2세들의 무리한 차입 경영과 사업 다각화가 있었다.
그런데도 재벌 3세의 경영권 세습은 초고속으로 진행되고 있다. 경제개혁연구소가 2012년 9월 발표한 ‘20대 기업집단(재벌)의 경영권 승계 보고서’를 보면, 재벌 3세가 입사 뒤 회사의 임원이 되는 데 평균 6.5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졸 신입사원의 경우 부장까지 평균 17.3년, 임원까지 21.2년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승진 특혜다. 이들은 대학 졸업 직후 형식적 입사를 통해 적을 만들어놓고 수년간 해외 유학을 다녀오는 관행도 따른다. 실제 경영 수업 기간은 더욱 짧다는 얘기다.
그들만의 리그 된 외교관
아버지와 아들, 딸이 삼성에 함께 다니는 경우는 유달리 많다. 어떤 임원의 딸은 삼성에 들어간 뒤 삼성의 엘리트 직원과 결혼해 아버지와 딸, 사위가 ‘삼성 가족’을 이루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세습은 재벌·교회·정치 권력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려다 배임죄로 2009년 8월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법정에 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명진 기자

한국 사회에서 세습은 재벌·교회·정치 권력으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려다 배임죄로 2009년 8월 서울 서초동 서울고법 법정에 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명진 기자

부의 세습을 넘어 경영권 세습이 널리 퍼지자 이번에는 대기업 임원들이 신분을 세습한다. ‘현대판 음서제도’인 임원 자녀 우대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삼성의 경우 입사 면접 때 ‘20년 이상 장기근속 직원의 자녀’에게 5∼10점의 가산점을 주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 딸이 삼성에 함께 다니는 경우가 유달리 많다.
‘삼성의 2인자’로 불렸던 이학수 삼성전자 고문(전 그룹전략기획실장·부회장)은 두 아들이 모두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삼성전자의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내며 이건희 회장의 ‘집사’로 불렸던 최도석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우 아들은 삼성전자에, 딸은 금융 계열사에 입사했다. 삼성전자 미래전략실장을 맡았던 김순택 전 부회장의 아들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어떤 임원의 딸은 삼성에 들어간 뒤 삼성의 엘리트 직원과 결혼해 아버지와 딸, 사위가 ‘삼성 가족’을 이루기도한다. 이들은 부자 부모를 만나 좋은 교육을 받고 한국 최고의 직장까지 보장받은 것이다. 현대자동차도 뒤질세라 직원 자녀를 우대해 채용하기로 2011년 노조와 합의했다. 2012년 7월 기술직 신입사원 채용 때 처음 적용했는데 합격률이 일반 지원자보다 3배나 높았다.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 관료의 인사 청탁은 더 노골적이다.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을 총괄했던 조준웅 변호사의 아들 조아무개(39)씨가 이건희 회장에 대한 대법원 선고가 내려지자 2010년 삼성전자 과장으로 특채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같은 해에는 유명환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 딸의 외교부 계약직 특별채용과 관련해서도 특혜 의혹이 일었다. 외교부에는 ‘외교관 가족’이 많다. 1997년에 도입한 ‘외무고시 2부’ 때문이다. 당시 외무고시 2부는 “우수한 재외동포를 외교관으로 유치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워 생겼다. 기존 외무고시가 1·2차 시험을 통틀어 11과목이었던 데 비해, 2부는 영어를 포함해 6과목뿐이었다. 상대적으로 시험 준비가 수월했다. 첫해 5명이 선발됐는데, 그중 3명이 외교관 자녀였다. 해마다 전체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그랬다. ‘외국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정규과정을 6년 이상 이수한 사람’이라는 응시 자격 제한 탓에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한 것이다. 논란 끝에 2부 제도는 폐지됐다. 하지만 로열패밀리는 그 뒤에도 승승장구했다.
2012년 10월 교회 세습을 천명한 서울 동작구 신림동 왕성교회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는 방인성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류우종 기자

2012년 10월 교회 세습을 천명한 서울 동작구 신림동 왕성교회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는 방인성 교회개혁실천연대 집행위원. 류우종 기자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수행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왼쪽부터) 한겨레자료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수행하는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왼쪽부터) 한겨레자료



신분 세습은 교회에 이어 정치권력으로 번졌다. 한국·중국·일본에서 잇따라 새 지도자로 선출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시진핑 총서기, 아베 신조 차기 총리는 대통령·총리를 지내거나 혁명 원로로 유명한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를 두고 있다. 북에서도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이어 3대 세습으로 정권을 잡고 있다. ‘왕조 세습’에 가깝다. 일본의 경우 세습 정치가 상당히 오래됐지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이남주 성공회대 교수(중국학)는 이렇게 설명했다. “누군가의 아들딸이라는 건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다. 연예인 2세와 비슷하다. 대중의 주목을 받을 수 있고 네트워크를 쉽게 형성할 수 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실제 정치 활동에도 유리하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문화인류학)는 좀더 비판적이다. “정치적 카리스마의 세습은, 경영 세습을 하는 재벌과, 교회를 세습하려는 목사와, 또 혈연·지연·학연을 통해 크고 작은 특권을 유지하고 세습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아 오늘의 정치 현실을 만들고 있다. 권력 세습은 독재자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체제의 모든 기득권 세력의 특권 세습과 맞물려 있다.”(<프레시안> 2012년 12월14일) 한국 사회에서 ‘세습’은 왜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되는가? 이남주 교수는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으로 붕괴된 지배계급이 재형성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경제적·문화적·정치적 권력을 차례로 장악한 파워엘리트가 네트워크를 확대하며 전면에 나서고 있다.”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일본학)의 진단도 일맥상통한다. “근대사회에서는 사회 유동성이 크기 때문에 세대 간 직업 이동이 광범위하고 격렬하게 일어났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선 아버지와 자식의 직업 사이에 세대간 직업 이동의 가능성이 점차 적어진다. 그래서 권력·재산·소득의 위계는 현재이면서 미래이기도 하다. ‘9회말 역전’이나 ‘개천에서 용날 가능성’은 거의 없거나 있어도 바늘구멍이다.”
부모 월소득 100만원 많아지면 토익 16점 높아져
중학교 2학년생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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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서 제구실을 못하는 것도 주요 원인이다. 가구 소득 수준과 자녀 성적 순위는 일치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연구 결과를 보면, 부모의 월소득이 100만원 많으면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 점수 백분위가 2.9단계 올라간다. 같은 조건일 때 국어는 2.2단계, 수학은 1.9단계 높아졌다. 토익 점수도 비슷하다. 수능 영어 점수가 같더라도 부모 소득이 100만원 많으면, 자녀의 토익 점수가 16점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영어 사교육에 대한 투자, 해외연수 등이 소득이 높을수록 많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로 KDI는 분석했다. 공교육을 받으며 혼자 열심히 공부하는 ‘용’의 승천을 사교육이 가로막는 것이다.
영어 격차는 자녀의 취업 기회 및 연봉과도 궤를 같이했다. 토익점수가 높으면 정규직 일자리를 얻거나 대기업에 입사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됐다. 토익 점수가 100점 높은 노동자는 연봉을 170만원 더 받는다. <한겨레>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의 설문조사에서도 63.8%가 ‘교육이 오히려 양극화를 확대·심화한다’고 답했다. ‘격차를 줄인다’는 응답은 절반(31.6%)에 그쳤다. 한귀영 연구위원은 “그동안 교육은 중간층의 계층 이동의 중요한 통로였지만 지금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가난한 아이들도 암울한 현재와 미래를 직시하고 있다. 2012년 7월 <한겨레>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참교육연구소와 함께 중학교 2학년생 19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보니, 가난한 집 공부 잘하는 아이(77.4%)가 잘사는 집 공부 못하는 아이(81.2%)보다 꿈이 적었다. 살아온 삶에 대한 만족도나 행복도도 잘사는 집 공부 못하는 아이(74.1%, 70.1%)가 가난한 집 공부 잘하는 아이(56.1%, 63.7%)보다 더 높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지적처럼 교육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불평등을 유지·강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고 홍성민 동아대 교수(정치학)가 말했다. “학벌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좋은 대학을 나오면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는다. 삼성그룹의 이재용씨가 미국 하버드대를, SK그룹의 최태원씨가 시카고대를 나온 것은 경영권 세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장경섭 서울대 교수(사회학)는 “한국 사회에서 학벌은 단순히 지적 훈련의 정도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정치·사회·문화적 위계상의 위치를 가르친다. 자녀 교육에 대한 투자는 사회계급적 위치의 확보와 상승을 위한 사회적 투쟁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빌미만 있으면 폭력적 형태로 터져나올 것”


부와 신분, 권력의 세습이 확대될수록 양극화 현상은 심화된다. 잘사는 이는 더 잘살게 되고 못사는 이는 더 못살게 되면, 중산층이 무너진다. 조준현 교수는 한국 사회를 이렇게 전망했다. “빈곤층이라 하더라도 중산층으로 상승할 가능성이 열려 있으면 자신이 속한 사회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계층 이동에 힘쓴다. 하지만 양극화된 사회에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희망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당연히 구성원 간에 불신과 갈등이 쌓이고 없는 자에 대한 경멸과 있는 자에 대한 분노가 빌미만 있으면 폭력적인 형태로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참고 문헌: <중산층이라는 착각>(조준현·위즈덤하우스), <가족·생애·정치경제>(장경섭·창비), <아이비리그의 빛과 그늘>(강준만·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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