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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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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꾼 물로 본 포털에 일침

검경 요청 있으면 예외 없이 인적사항 제공한 네이버에 개인정보 자기결정권과 익명 표현의 자유 침해했다고 판결한 서울고법
등록 2012-12-21 21:14 수정 2020-05-03 04:27

2010년 3월 취업준비생이던 차경윤(32)씨는 서울종로경찰서에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됐으니 피의자 조사를 받으라는 거였다. 재밌다고 생각한 게시물을 네이버 카페에 올린 게 문제였다. 게시물은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 선수가 귀국할 때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을 피하는 듯한 장면을 편집한 동영상과 사진이었다. 이른바 ‘회피연아’다. 유 장관은 명예훼손이라며 누리꾼을 경찰에 고소했다.
전기통신사업법 ‘통신자료 제공’ 근거

고객의 신원정보를 국가정보원·검찰·경찰 등의 수사기관에 넘긴 포털과 이동통신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소송단이 꾸려지고 있다. 사진은 소송 참여자를 모집하는 참여연대 누리집 갈무리.

고객의 신원정보를 국가정보원·검찰·경찰 등의 수사기관에 넘긴 포털과 이동통신사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소송단이 꾸려지고 있다. 사진은 소송 참여자를 모집하는 참여연대 누리집 갈무리.

고소당한 차씨는 취업을 걱정하던 평범한 20대 청년이었다. 3년4개월간 학사장교로 군 복무를 마친 터라 뒤늦게 영어 공부를 하며 스펙을 쌓는 중이었다. 회피연아 게시물도 차씨가 다니던 영어학원의 인터넷 카페 유모게시판에 올렸다. 느닷없이 경찰서에서 수사받으라는 전화를 받고 차씨는 당황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마침 누리꾼을 고소한 유인촌 장관을 비판하는 성명을 참여연대가 발표해 도움을 요청했다. 이지은 참여연대 간사는 “신상정보를 어떻게 확인했는지 경찰에 문의하라”고 조언했다. 차씨도 비실명 게시판에 올렸는데 경찰이 어떻게 이름과 연락처를 알았는지 궁금했다. 경찰은 네이버에서 받았다고 밝혔다. 네이버도 인정했다. 차씨는 “포털이 개인정보를 소중히 다루기는커녕 마음대로 내 정보를 수사기관에 넘겼다”고 말했다. 유인촌 장관이 고소를 취하해 명예훼손 수사는 중단됐지만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차씨는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과 함께 네이버를 상대로 2천만100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개인정보를 보호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인터넷 업체가 경찰·검찰·국가정보원 등 수사기관에 신상정보를 무더기로 제공하는 관행을 문제 삼았다. 자신도 모르게 수사기관 등에 신상정보가 넘어가는 경우는 실제로 비일비재하다. 2009년 56만1467건, 2010년 59만1049건, 2011년 65만1185건에 이른다. 지난해 전국 모든 법원의 영장 발부 건수(28만1944건)의 2배가 넘는 수치다. 문서 한 건당 포함된 전화번호 수는 8∼12개로, 2011년에만 584만8991개의 개인 전화번호가 수사기관에 넘어갔다. 하루 평균 1만6천여 건의 신상정보가 제공되고 해마다 10명 중 1명이 수사를 받는 꼴이다. 이지은 간사는 “정부의 외환정책을 비판했다가 구속된 미네르바 박대성씨나 ‘쥐코’ 동영상을 올렸다가 고통을 당한 민간인 불법사찰 피해자 김종익씨가 이렇게 신분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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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업체는 수사기관에 신상정보를 넘기는 근거로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의 ‘통신자료 제공’을 내세운다. “전기통신사업자는 법원, 검사, 수사기관이 수사 등을 위해 이용자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아이디, 가입·해지 일자 등 6개 정보를 요청하면 이에 응할 수 있다.” 전기통신사업자에는 인터넷 업체는 물론 SK텔레콤 등 이동통신사도 포함된다. 이들은 기계적으로 수사기관에 고객의 개인정보를 제공해왔다. 사전이든, 사후든 고객에게는 아예 통지하지도 않았다.

 

“네이버는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기만 하면 예외 없이 이용자의 인적 사항 일체를 제공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과 익명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 개인정보를 제공할 것인지 여부 및 어느 범위까지의 개인정보를 제공할 것인지에 관한 세부적 기준을 마련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충분한 조처를 취할 의무가 있다.” -서울고법 민사24부
포털, 고객정보 제공 중단

차씨는 이렇게 반박했다. “법률은 ‘응할 수 있다’고 규정할 뿐 ‘응해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다. 전기통신사업자는 수사기관이 정보 제공을 요청하더라도 심사를 통해 제공하지 않거나 제한적인 범위에서 제공해야 한다.” 헌법이 명시한 ‘영장주의’ 원칙에도 어긋나 위헌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2011년 1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재판장 이은애 부장판사)는 네이버의 손을 들어줬다. “범죄 성립 여부에 대한 판단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분야라 전기통신사업자에게 책임을 부담하는 데 신중할 필요가 있다.” 비전문가인 사업자는 수사기관이 요청하면 개인정보를 제공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항소심은 서울고법 민사24부(재판장 김상준 부장판사, 배석판사 심경·김태균)가 맡았다. 변론 종결과 재개를 반복하며 고심을 거듭했다. 지난 8월23일 헌법재판소가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을 1심 재판부와 다르게 해석해 기울기가 확 바뀌었다. 헌재는 형식상 각하 결정을 내렸지만 내용상 차씨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률은 ‘응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어 사업자에게 통신자료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을 뿐 어떠한 의무도 부과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헌재는 인터넷실명제(제한적 본인확인제)가 위헌이라고 결정하며 “표현의 자유에는 신원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아니할 자유도 포함된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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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18일 항소심 재판부가 “네이버는 차씨에게 5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했다. “네이버는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기만 하면 예외 없이 이용자의 인적 사항 일체를 제공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과 익명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 개인정보를 제공할 것인지 여부 및 어느 범위까지의 개인정보를 제공할 것인지에 관한 세부적 기준을 마련해 개인정보 보호를 위한 충분한 조처를 취할 의무가 있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터넷을 통한 대국민 사찰을 종식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항소심 판결 직후 네이버·다음·네이트 등 포털 3사와 카카오톡을 운영하는 카카오는 수사기관에 고객정보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네이버 홍보실 조정숙 차장은 “강제성이라 보고 개인정보를 제공했는데 항소심 판결에 따라 응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네이버 쪽은 상고해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기로 했다. 조 차장은 “사업자가 개인정보 제공 여부를 자체 심사하기보다는 정부가 법률로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통사는 여전히 고객정보 제공

이처럼 발 빠르게 대처한 속내는 ‘집단소송’의 우려 때문이다. 차씨처럼 가입자들이 하나둘 손해배상 소송에 나서면 엄청난 부담을 사업자가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는 현재 소송단을 꾸리고 있다. 먼저 본인의 정보를 정보·수사 기관에 넘겼는지 각 업체에 전자우편으로 질의한다. 정보 제공이 확인되면 소송단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 업체들은 최근 1년간 자료만 확인해준다. 이전 자료는 폐기해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SK텔레콤 등 이동통신사는 아예 확인해주지도 않는다. 이통사 관계자는 “수사 기밀을 보호하기 위해 고객에게 알려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터넷 업체와 달리, 항소심 판결 이후에도 고객정보를 수사기관에 계속 제공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1심과 2심 판결이 엇갈렸으니 3심, 대법원 판결을 기다려보겠다는 것이다. 한 고개 넘으면 또 한 고개가 기다린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심사위원 20자평▶
김보라미 무분별한 압수수색, 법원의 제한은 계속되어야 한다
양홍석 무력화된 영장주의 복원, 정보인권 보호를 위한 결단!
한가람 “고객님의 소중한 정보, 경찰에 넘겼습니다”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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