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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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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할수록 곤란해지는 이상한 기부법

등록 2012-08-30 17:41 수정 2020-05-03 04:26

“이 추운 겨울날, 밥도 못 먹고 지내야 하는 대한민국 결식아동 100만 명의 밥값을 우리가 모금해 지급하면 어떨까요?”
2010년 12월 박원순 당시 아름다운재단 총괄상임이사는 정부의 예산 지원이 중단된 방학 중 결식아동들에게 밥을 먹이자며 ‘결식아동 제로(0) 캠페인’을 제안했다. 기부문화를 확산하려고 세워진 비영리 재단법인 아름다운재단 계좌에 정성을 모아달라는 호소였다.

‘해피빈’과 ‘희망해’도 1천만원 넘기면…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이 제안은 트위터·페이스북 등 온라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시민들의 뜨거운 반응 덕에 재단은 뜻하지 않은 곤란에 처하게 됐다.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기부금품법)’ 제4조 1항에 따르면 1천만원 이상의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는 자는 모집 목적·목표액·방법·기간 등을 작성해 행정안전부 장관 또는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 등에게 등록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모금액이 1천만원에 다다를 것으로 보이자, 재단은 서둘러 서울시에 등록 문의를 했다. 시에선 우선 모금을 중지하고, 등록을 하는 동안 1천만원이 넘을 경우 받은 돈은 다시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등록에는 2주가량이 걸린다. 당장 겨울방학이 닥친 상황이라 등록이 되기만을 마냥 기다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초 모금에는 재단 회원·비회원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다. 재단은 우선 비회원 대상 모금 창구를 폐쇄하고, 회원 가입을 유도했다. 현행법상 재단 회원이 내는 각종 회비는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재단은 홈페이지에 공지했던 계좌번호를 삭제했지만 SNS에서 돌고 도는 멘션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익명이나 닉네임으로 모금에 참여한 이들을 찾아 회원 가입을 요청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기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자 정보기술(IT)을 접목한 새로운 모금운동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행법은 이런 시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해석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규정이 많아 기부문화 확산에 되레 장애물이 되고 있다.


누리꾼들이 쉽게 모금 단체의 정보를 살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조차 마련하기 어렵다. 온라인·방송·거리 모금 등 다양한 모금 형태에 따른 세부적인 기부자 보호 가이드라인도 없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을 운영하고 있는 NHN과 다음커뮤니케이션은 각각 ‘해피빈’과 ‘희망해’라는 모금 플랫폼을 통해 누리꾼과 모금 주체를 이어주고 있다. 해피빈의 경우, 모금 주체를 비영리단체로 한정하고 모금 액수도 1천만원 미만으로 제한하는 등의 법 위반 예방 장치를 마련했다. 사안에 따라 누리꾼들의 참여가 폭발적일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는 해당 단체에 기부금품법에서 요구하는 등록을 요청한다. 희망해는 단체뿐 아니라 기업이나 누리꾼이 모금 제안을 하면 전문기관과의 파트너십을 통해 모금 심사 및 배분을 하고 있다. 이렇게 전문기관을 통해 모금을 배분함으로써 신뢰성과 투명성을 확보하고, 모금 제안자가 기부금품법상 등록을 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도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사회공동복지모금회의 경우, 사회복지공동모금회법에 따라 운영되기 때문에 1천만원 이상 모금을 하더라도 기부금품법에 따라 따로 등록을 할 필요가 없다.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시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 현행법은 이런 서비스를 구현하는 데 걸림돌이다. 미국 비영리 단체 ‘키바’는 기부자가 수혜자에게 돈을 주면, 수혜자가 돈을 되갚는 방식의 웹사이트를 운영 중이다(맨 아래).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제도적 제약 때문에 이런 기부 사이트를 구축하기 어렵다. 각 사이트 캡처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기부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시대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 현행법은 이런 서비스를 구현하는 데 걸림돌이다. 미국 비영리 단체 ‘키바’는 기부자가 수혜자에게 돈을 주면, 수혜자가 돈을 되갚는 방식의 웹사이트를 운영 중이다(맨 아래). 국내에서는 여러 가지 제도적 제약 때문에 이런 기부 사이트를 구축하기 어렵다. 각 사이트 캡처

‘금융업’으로 규정된 새로운 기부 모델

최근에는 소셜펀딩(크라우드펀딩) 방식의 기부 사이트도 확산되고 있다. 소셜펀딩은 누구든지 모금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방문자들이 SNS 등을 통해 입소문을 내주고, 이에 공감하는 불특정 다수가 소액을 기부 또는 투자해 프로젝트가 실현되는 방식이다. 기부자들은 기부금액에 따라 ‘후원의 밤’ 초대권 등 소소한 보상을 받게 되며,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아름다운재단은 지난해 말 소셜펀딩 사이트 ‘개미스폰서’ 시범 서비스에 나섰는데, 이 사이트에서 기부금품법 규제 대상이 되는 모금 주체를 프로젝트 제안자로 볼지 아니면 플랫폼 제공자로 볼지를 놓고 논란이 일고 있다. 재단 관계자는 “사이트에 제안이 올라온 모든 프로젝트의 모금액 총합계가 1천만원 이상이 되면 개미스폰서를 등록시켜야 한다는 행안부 답변이 있었다”며 “이 경우 플랫폼 제공자와 프로젝트 제안자를 이중으로 규제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비판했다. 이런 플랫폼을 통해 진행된 모금운동에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운영업체가 어느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현행법대로라면 국내에선 ‘키바’(www.kiva.org)와 같은 새로운 기부 모델이 등장하기 어렵다. 키바는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올 초 기부 재단 창립 기자회견에서 언급해 주목받았던 미국의 비영리단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웹사이트를 통해 돈이 필요한 이유와 액수를 직접 설명한다. 이를 본 사람들은 특정인에게 25달러를 기부하고, 수혜자는 문제를 해결한 뒤 기부자에게 돈을 되갚는 형식이다. 돈을 돌려받지 않는 전통적인 기부 방식과 다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대출이 금융업으로 규정돼 있는 등 키바 같은 기부 사이트 구축에 제약이 많다.

IT 업계 관계자들은 현행법으로는 모금운동의 투명성 확보나 기부 활성화를 구현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누리꾼들이 쉽게 모금 단체의 정보를 살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시스템조차 마련하기 어렵다. 온라인·방송·거리 모금 등 다양한 모금 형태에 따른 세부적인 기부자 보호 가이드라인도 없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육심나 사회공헌팀장은 “IT 기업으로선, 온라인 모금의 경우 그 내용과 기부 내역이 공개되고 있는 만큼 기존 오프라인 모금과 차별화된 관리 지침이 필요하다”며 “기부금품 모집과 관련한 각 기관의 법적 자격을 기부 참여자가 쉽게 알 수 있도록 하는 정책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훨씬 더 많은 아이들이 밥 먹도록

현장에서 지적된 여러 문제점은 선진국과는 사뭇 다른 국내 기부 관련 법·제도와 맞닿아 있다. 미국·영국 등의 법률은 기부자가 불법 모금에 현혹되지 않고 자율적으로 기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부가 중심이 돼 모금 목적 등이 무엇인지 살펴 모금을 규제하는 방식이다. 기부하는 주체인 ‘시민’을 보호하기보다는 행정 편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셈이다. 양용희 호서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선진국에선 기부금 모집 범위를 등록제로 폭넓게 허용하는 대신 모금의 다양한 방식에 따라 지켜야 하는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며 “영국 등에서는 모금 기관과 전문가들이 정부와 협력해 모금 활동에 대한 윤리헌장을 만드는 등 자율적인 관리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0년 겨울, ‘결식아동 제로’ 모금 캠페인은 우여곡절 끝에 4주간 이어졌다. 이렇게 모아진 정성으로 4천여명의 아이들이 방학 중에 허기진 배를 채웠다. 법과 제도가 제대로 마련됐다면 훨씬 더 많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가 못한 일을 시민들이 대신하겠다는데 그조차 가로막는 이 엽기적 현실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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