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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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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찌르고 싶었어요” “나 같아도 그랬겠네요”

치유받은 사람만이 치유하는 ‘치유의 메커니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란 공감을 통한 ‘씻김굿’
등록 2012-06-15 18:52 수정 2020-05-03 04:26

‘치유란 치유받은 ‘내’가 ‘나’들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또 ‘나’들을 치유하며 ‘내’가 더 치유된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는 치유의 본질을 이렇게 정리했다. “치유는 책상머리 이론이나 공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치유의 과정에서 마음과 몸으로 느끼고 실감하며 얻은 나와 나들의 본질, 즉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암묵지다.” 치유받은 사람만이 치유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가 ‘나들’을 치유한다
정씨는 “충고나 교훈, 계몽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걸 적극적으로 방해한다”고 했다. 까닥 잘못하면 공부한 사람들이 ‘지적질’을 하는데 그건 치유를 전혀 모르는 행위라는 것이다. 치유란 동굴 속에 숨은 사람을 억지로 끄집어내는 게 아니라 그의 옆에서 어둠을 함께 감내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그가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나오게 된다.
마음의 상처가 끔찍할수록 대면하기가 어렵다. 물리적 상처로 치면, 염증이 있고 속이 썩어가는 경우다. 그냥 진통제로 막고 덮어두는 게 우선은 덜 아프다. 마취제도 없는데 생살을 째고 그 안에 들어가 그 뿌리를 갈아내는 것은 굉장한 심리적인 힘이 필요하다. 봉은사 고문치유모임에 참여한 고문생존자들은 삶과 죽음을 오가는 고문의 고통을 다시 떠올리며 그 과정을 용감하게 들여다보았고, 그러며 치유의 본질을 깨달았다.
59일간 단 1초도 인간으로 대접하지 않는 고문 끝에 ‘조총련 간첩단’ 수괴로 조작돼 7년간 감옥에서 산 김성규(72)씨의 말이다. “참혹한 고통은 지우려고 할수록 더욱 단단히 내 삶을 지배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모두 꺼내놓고 봐야 한다. 내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던 과거의 기억을 변호사, 동료와 나누며 마음이 오히려 가벼워지는 걸 깨달았다.” 김씨는 특히 재심 재판을 치유적인 감동으로 지켜봤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것은 국가나 법원이 아니라 바로 진실이구나. 진실은 그 무엇으로도 가릴 수 없는 그 자체로 힘이 있구나.’ 고통의 세월을 꿋꿋이 견뎌낸 동료와 함께 보상금의 일부를 내어 자신보다 힘겹게 사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먹은 이유다.
송소연 진실의힘 이사는 재심 재판을 ‘씻김굿’이라고 표현했다. “간첩으로 조작돼 처음 재판을 받았을 때는 아무도 고문생존자의 편이 되지 않았다. 변호사도 검사와 다를 바 없이 유죄를 인정하라고 다그쳤다. 하지만 재심 재판에서는 조용환 변호사가 피고인을 200% 신뢰하고 법정에서도 수사관의 고문과 조작을 밝혀내니까 피고인들도 당당히 무죄를 요구하고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

고문생존자 김태룡(왼쪽)씨가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함께 임민욱 작가가 연출한 공연 에 출연한 모습. 임민욱 제공.

고문생존자 김태룡(왼쪽)씨가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함께 임민욱 작가가 연출한 공연 에 출연한 모습. 임민욱 제공.

2010년 10월 27년 만에 김성규씨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자, 또 다른 고문생존자인 김양기씨와 아내 김희유씨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진실의힘 제공.

2010년 10월 27년 만에 김성규씨가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자, 또 다른 고문생존자인 김양기씨와 아내 김희유씨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진실의힘 제공.

우레 같은 박수가 낸 ‘균열’

고문생존자의 마음에서 치유가 일어나는 과정은 이처럼 다양하다. 첫째, 자신의 감정을 깊이 표현한 뒤에도 여전히 내가 타인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이다. 고문을 가한 수사관을 총으로 쏴 죽이고 싶고 칼로 찌르고 싶다고, 그런 끔찍한 감정을 표현했는데도 비난하지 않고 “나 같아도 그랬겠네요”라고 상대방이 동의하면 안도감을 얻는다. 깊은 상처를 입은 고문생존자들은 남들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나는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그게 아니구나’라는 의외의 경험을 하면 자기 안에서 균열이 생긴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자녀들을 위한 치유 공간인 ‘와락’ 개소식을 앞두고 고문생존자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 이웃도, 심지어 가족도 ‘빨갱이’라고 멸시했는데, 자신들이 와락 개소식에 가면 오히려 폐가 되지 않을까 해서다. 와락 기부금을 처음 낸 단체가 진실의힘인데도 말이다. 용기를 내어 찾아갔더니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고 존경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달라지지 않았는데 상대방의 반응이 긍정적으로 바뀌면 치유적 경험이 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깨달음도 치유적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보편성이다.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은 고립감을 안고 인생을 보낸다. 나만이 유일하게 외롭고,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 문제가 내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적 고립이 자꾸 깊어진다. 내 문제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면 강한 안도감을 느낀다. 동시에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자기 통제력을 얻는다. 비슷한 경험을 가진 집단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보편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이 치유적인 경험으로 쌓인다. 이를테면 국가폭력 때문에 고통스럽고 죽고 싶었던 경험을 고문생존자가 털어놓으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더한 경우도 있구나’ 하며 안도하고, 허우적거리던 자신의 상황에서 한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집단상담은 집단 구성원에게 큰 도움을 준다. 개인상담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이타주의 덕분이다. 비슷한 문제를 공유하고 서로가 지지하는 집단에서 상담하면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반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내 경험을 진솔하게 얘기했을 뿐인데 다른 사람이 큰 도움을 받았다고 얘기하는 경우다. 그럴 때 내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렇게 자존감이 쌓이다 보면 고통을 견디는 심리적 에너지가 된다. 잘못했다고 지적하려 들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겪었던 아주 깊은 경험, 그 감정을 잔잔히 얘기하다 보면 누군가는 통찰의 깨달음을 얻는다고 정혜신씨는 말했다. “어떤 관계에서 상대방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치유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면 그 순간 내가 그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다.”

치유가 치유를 부르는 치유의 도미노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을 끌어당기는 힘인 집단 결속력도 치유의 강력한 힘이다. 결속력 있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깊이 수용하고 지지하며 서로 좋아해서 그 집단을 통해 더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결속력이 강한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좋은 치료적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다. 개인상담에서도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가 치료 효과를 좌우하듯이 말이다.

치유는 또 다른 치유 도미노를 부른다. 정혜신씨가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을 집단상담할 때 고문생존자들이 매주 참관했다. 그 모습에 힘을 얻은 해고노동자들이 이번에는 동국대 총장실에서 폭행당하며 끌려나온 대학생들을 지원하려고 나섰다. 그 치유상담이 끝나자 동국대 학생들이 쌍용차 희망텐트에 와서 자원활동을 한다. 정혜신씨는 “고문생존자가 내민 손길이 연쇄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만들어내며 즐거운 도미노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치유는 이미 시작됐다.



“재심 재판은 씻김굿이었다. 조용환 변호사가 피고인을 200% 신뢰하고 고문과 조작을 밝혀내니까 피고인들도 당당히 무죄를 요구하고 승리감을 맛볼 수 있었다.”-송소연 진실의힘 이사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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