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정당한 구실을 못하는 정당

돈봉투·디도스 같은 문제가 생겨도 검찰 수사만 지켜보는 ‘철면피’ 한나라당…쇄신, 재창당 운운해도 유권자가 정당에 부여한 책임 전혀 하지 못해
등록 2012-01-19 13:32 수정 2020-05-03 04:26

다시 ‘혼란’과 ‘쇄신’의 계절인가? 기존의 질서는 붕괴한 듯 보이고, 새로운 질서를 자임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깃발을 든다. 굿판을 가득 메운 수많은 만장들처럼, 눈앞의 광경은 사람들의 눈을 어지럽히고 무언지 모를 분위기만이 사람들을 압도한다. 마치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데, 행렬 가운데 있는 사람도, 한발 비켜 지켜보는 사람도 그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저 순간순간 바뀌는 각양각색의 만장들 속에서 혼미해지는 그런 기분….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가?
최근 연일 뉴스를 쏟아내는 한나라당을 보며 드는 느낌이다. 매일매일 그 안의 누군가는 무엇을 보았다 하고, 누군가는 아니라 한다. 누군가는 자신이 음해당하고 있다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음해당하는 것이 그가 아니라 자신이라 주장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치부가 드러나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 뿐 아니라, 마치 더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싸움판을 구경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 같다는 점이다. 매일 어제보다 더 경악스런 치부를 들춰내며 검찰에 수사를 촉구한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검찰의 몸놀림이 참으로 민첩하다. 온갖 정신없는 ‘의혹’들을 재깍재깍 받아서 수사할 뿐 아니라, 매일 유권자에게 수사 진행 상황을 친절하게 알려준다. 방송 뉴스도, 인쇄매체도, 인터넷 매체도 1면 톱뉴스를 할애하며 아침저녁으로 새로운 정보를 물어나른다. 참으로 놀랍다. 아침저녁으로 생산되는 이 다량의 정보는 대체 누가, 왜, 어떤 루트를 통해 제공하는 것인지….
세상사 가장 재미난 일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 했던가? 어느새 추리소설에 몰입하는 독자가 된 것처럼, 그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망을 좇아가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그것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등의 다른 생각들은 잊어버린 채, 아귀가 맞지 않는 진술들의 진위를 가리며 범인 찾기 놀이에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래서, 대체 뭐가 어떻단 말인가?’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일개 유권자인 내가, 한나라당 안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에 이리 몰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한나라당 안팎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들은, 구체적인 사건의 ‘범인’이 누구든 간에 어차피 조직으로서 그 정당이 집단적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다.
당 대표 선거에서 혹은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돈이 오갔든 아니든, 그것은 그들이 규명하면 될 일이고, 규명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면 된다. 국민의 세금을 받아 운영되는 공적 조직이고 더군다나 집권당으로서, 당 리더십과 고위직들이 줄줄이 거론되는 범법행위 의혹들에 대해 스스로 아무런 것도 규명하지 못하고 제재도 하지 못한 채, 검찰과 언론을 동원해 동네방네 소문만 내고 있는 것 자체가 철면피한 일이다. 고위 당직자와 당 출신 국회의장과 대통령의 보좌진들이 관련되었다는 선거부정 사건에 대해서도, 그 집단은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저 모든 문제가 생기면 검찰에 던지고 ‘지켜보겠다’고 한다. 이제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니, 정당 내부 선거의 모든 절차를 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하겠다고 한다. 의혹이 발생하면 검찰에 맡기고, 내부 선거에 문제가 발생하면 선관위에 맡기고, 위기에 처한 정당의 구명은 외부 전문가에게 맡기고 나면, 조직으로서 그 정당에 남겨진 일은 무엇일까? 그래서 그 정당이 외부에 위탁하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남게 될까?

»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비대위원 등이 1월1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새해인사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비대위원 등이 1월1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새해인사회를 열고 있다. <한겨레> 김정효

아무런 내부 제재가 없는 정당

비단 한나라당만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의 많은 정당들은 검찰과 사법부와 언론과 여론에 너무 의존적인 존재가 돼버렸다. 문제가 생기면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며’ 여론조사 결과를 ‘반영하고’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한다’. 물론 이것이 모두 나쁘다는 게 아니다. 정당은 법을 존중해야 하고 유권자의 의견에 민감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 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더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직으로서 정당은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자체 기율을 가질 수 있어야 하며,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과는 별도로 정당 스스로의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검찰의 조사와 사법부의 판단과는 별도로, 정당 내에서 스스로 사태를 규명하고 필요하다면 제재를 가할 수도 있어야 한다. 유권자의 처지에서, 정당의 구성원이 심각한 범법행위에 관련됐다는데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 “법적 절차를 존중하겠다”는 말은 “정당으로서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당이 아닌 개개인 유권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며, 정당으로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여러 사건의 대상자들이 각기 다른 사건에 대해 서로 옥석을 가리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다.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유권자가 그들 내부의 계파정치까지 모두 이해하고 옥석을 가려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정당도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내부 집단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내부 정치를 하더라도, 최소한 하나의 정당 틀 안에 공존하는 이상 계파를 뛰어넘어 전체로서 정당의 정체성과 책임성은 있어야 한다. 유권자가 선거로 대통령직을 구성해주고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해주는 것은, 후보 개인이 아니라 그들 각각이 모인 정치집단인 정당에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무소속 후보나 작은 정당 후보들이 아닌 집권이 가능한 큰 정당의 후보로서 이점을 취했다면, 그에 합당한 집단적 책임 역시 져야 한다.



유권자의 처지에서, 정당의 구성원이 심각한 범법행위에 관련됐다는데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 “법적 절차를 존중하겠다”는 말은 “정당으로서의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당이 아닌 개개인 유권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며, 정당으로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최소한 정당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그 집단적 책임 방안 가운데 하나로 ‘쇄신’이냐 ‘재창당’이냐는 대안이 논쟁 중이라 한다. 둘의 차이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방법을 택하든 그것은 집단으로서 그들의 선택이다. 하지만 쇄신을 하든, 다시 창당을 하든 최소한 과거에 저질러놓은 일들에 대해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지는 내놓아야 한다. 지금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여러 사건과 곧 ‘검찰의 수사 결과를 지켜보게 될’ 여러 사건들을 그냥 뭉개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정당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잘못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정당 차원에서 ‘검찰 수사와 사법부의 판단과는 별도로’ 진상을 규명해 유권자에게 설명하고, 유권자의 머리를 어지럽게 한 잘못에 대한 죄를 청하며, 죄가 있다면 ‘사법부의 판결’과 별도로 정당 차원에서 제재를 가해 다음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집단적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