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의 일부 협상에서 문제가 크다. 투자자-국가 소송제(ISD)의 경우 대법원 판결이 났더라도 미국이 뒤집을 수 있다. 한국의 헌법 체계와 사법주권 체계 자체를 부정하는 협상은 큰 문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한나라당의 홍준표 대표가 야당 시절인 2007년 5월에 한 발언이다. 한-미 FTA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던 홍 대표는, 지난 11월2일 “여야 원내대표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한-미 FTA(는 물론) 이행법안 14개도 오늘부터 상임위를 열어 공격적으로 처리 절차에 들어가달라”고 요청했다.
홍 대표가 반대에서 찬성으로 바뀌었다면,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은 그 반대의 경우다. 정 최고위원은 지난 10월21일 ‘반성문’을 썼다. 국회 경제 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참여정부에서 한-미 FTA가 타결됐을 때 저는 조건부 찬성 입장이었다. 미래를 꿰뚫어보지 못했던 안목의 부족함을 고백한다. 반성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인지 지난 10월20일 국회 끝장토론에서 김종훈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정 의원이 정부에 계실 때 제가 (미국과) 협상할 때 많은 도움을 주셨다. 늦었지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고 비꼬는 듯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 의원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반발했다.
» 참여정부에서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위)와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각각 반대에서 찬성으로, 찬성에서 반대로 의견이 바뀌었다. 사진공동취재단
참여정부에서 시작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두고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위)와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아래 사진 가운데)은 각각 반대에서 찬성으로, 찬성에서 반대로 의견이 바뀌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미 FTA를 두고 찬성에서 반대로, 반대에서 찬성으로 태도를 바꾼 이들이 적지 않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재협상을 강조했다. 노 전 대통령은 퇴임 뒤인 2008년 11월 자신이 개설한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에 올린 글에서 “상황이 변했다. 모든 정책은 상황이 변화하면 다시 검토해야 한다”며 “이렇게 하는 게 실용주의이고, 국익외교”라고 밝혔다. 노 전 대통령은 “한-미 간 협정이 체결된 뒤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해 우리 경제와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며 “국제적으로 금융제도와 질서를 재편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하고, 고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한다”며 “어차피 재협상 없이 발효되기 어려운 협정이므로, 재협상을 철저히 준비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동영 최고위원의 태도 변화도 유사하다. 그는 최근 소설가 서해성씨가 기획·연출한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금융위기를 보면서 가장 부끄럽고 눈을 뜬 계기였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시절 법무부 장관을 지낸 천정배 민주당 최고위원도 같은 프로그램에서 “법무부 장관이었음에도 협상이나 과정을 제대로 알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미국의 재협상 요구를 전후해 태도를 바꾼 경우도 있다. 한-미 FTA 협상 실무주체인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는 국내의 FTA 반대 여론에는 “협정문에서 점 하나도 넣거나 빼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완강하게 ‘협정문 수정 불가’ 태도를 고수하다가 미국 쪽의 재협상 압박이 거세지자 “(협정문을) 수정하려면 할 수 있다”로 순식간에 말을 바꿨다. 재협상의 동인이 미국 쪽의 압박에서 비롯된 탓인지, 그 결과 미국이 요구한 제한된 분야에서만 재협상이 이뤄졌다. 한국 쪽은 한해 50억달러 안팎의 수출시장(한국산 자동차)을 양보하고 1억7천만달러 크기의 수입시장(미국산 냉동 돼지고기)을 따내, 큰 이익을 포기하고 잔챙이만 챙겼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런 재협상의 문제점을 들어 한-미 FTA 찬성에서 반대로 태도를 바꾼 이들도 있다.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와 김진표 원내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손학규 대표는 2006년 7월 한나라당 대선주자의 길을 닦기 위한 ‘민심 대장정’을 할 때도, 통합민주당 대표를 맡은 2008년 4월에도 한-미 FTA에 찬성했다. 하지만 미국 쪽의 요구로 이명박 정부가 2010년 재협상을 벌인 뒤에는 반대로 태도를 바꿨다. 손 대표는 지난 11월3일 “이명박 정권이 FTA 재협상을 통해서 국익에 손해를 보는 FTA, 충분히 준비하지 않은 졸속 FTA, 서민층이 많은 피해를 보는 FTA, 특히 주권 침해 요소가 있는 FTA, 이것을 그대로 강행 통과시키려 하는 것을 강력히 저지하겠다”고 밝혔다. 김진표 원내대표도 지난 6월3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참여정부 시절 4년여에 걸친 협상에서 어렵게 이익 균형을 맞췄으나, 현 정부는 졸속 재협상을 벌여 이익 균형을 박살내고 말았다”고 말했다. 김 원내대표는 “깨진 균형을 바로잡는 재재(再再)협상”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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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사죄, 박근혜의 변화
참여정부의 핵심 인사들 가운데에도 태도를 바꾼 이들이 있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참여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한-미 FTA는 체결됐으면 한다. 정부 각료로서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것뿐 아니라 경제학자로서 내 소신”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유 대표는 최근 전국농민회총연맹을 방문해 한-미 FTA와 관련해 사죄했다. 또 그는 올해 초 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원칙적으로는 자유무역에 찬성한다. 그러나 모든 FTA가 선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이익 측면에서 본다면 개정된 한-미 FTA는 찬성할 수 없다. 무게중심이 미국 쪽으로 갔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이라면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밝혔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지난 2월 와의 인터뷰에서 “노 전 대통령은 국익을 철저히 따져 이익이 없으면 하지 말라고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협상 과정에서 많은 것을 따냈다. 이 정부 들어 재협상을 통해 많은 것을 내주었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FTA와 관련한 발언의 강조점을 미묘하게 바꿨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그해 2월 미국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을 방문한 그는 “한-미 FTA 협상이 성공적으로 매듭되면 한-미 관계의 미래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는 큰 걸음이 될 것”이라고 원칙적 찬성 뜻을 밝히면서도, “최소한 양국 어느 쪽이라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보는 국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양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심할 경우 한-미 관계의 후퇴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최근에는 ‘조속한 비준’ 쪽으로 발언의 강조점을 옮겼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1월3일 “한-미 FTA는 이번에 처리되는 게 좋겠다”며 “(한-미 FTA 처리가) 늦어질수록 국익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력 정치인들의 이런 태도 변화와 관련해 이해영 한신대 교수(경제학)는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상당수가 (FTA) 찬성에서 반대로 변했다”며 “세계적 경제 흐름의 변화를 읽은 태도 변화와 야당에서 여당이 돼 입장을 바꾼 것을 똑같이 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미국 쪽에서는 협정문을 의원뿐만 아니라 시민단체에까지 설명했지만, 한국 정부는 협상 전략이라는 이유로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며 “이 때문에 소수의 통상 관료들만 정보를 독점해 한-미 FTA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기 힘든 이유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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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가 처음 추진될 때부터 국내에서는 줄곧 찬성과 반대가 엇갈렸지만, 비교적 일관된 태도를 고수해온 이들도 있다. 대체로 찬성 쪽에는 참여정부 인물과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 인물들이 섰고, 반대 쪽에는 민주노동당 등 진보정당, 시민단체와 참여정부의 일부 경제 관료들이 그렇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표적인 찬성론자다. 2007년 12월 대통령 당선자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한-미 FTA를 체결한 것은 잘한 일”이라며 “농촌 지역 의원들도 농민을 설득해 (노 대통령 임기 중인) 2월 임시국회에서 비준동의안이 통과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지난 10월12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미 FTA는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양국 간 투자를 더욱 확대해 동반성장을 강화하는 새로운 동력이 될 것”이라며 “양국 모두에 승리를 가져다주는 협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정부의 핵심 인사 가운데에도 여전히 찬성 태도를 고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최근 국정감사에서 “노무현 정부의 협상은 잘됐지만 이명박 정부의 재협상으로 나빠졌으니 비준에 반대한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고 말했다. 안 지사는 이어 “재협상은 미국 자동차업계의 주문을 반영한 것으로 재협상 전과 (이익 균형에서) 큰 차이가 없다”며 “FTA를 찬성하면 보수고 반대하면 진보라는 구분에 동의할 수 없고, 이는 국민의 눈높이와도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역시 올 초 과의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성과로 한-미 FTA 비준을 꼽았다.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안보정책실장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 송민순 의원도 “현실적으로 미국과의 재재협상은 불가능하다. 보완 대책을 강화할 수 있다면 비록 개악된 상태라도 국가의 미래를 고려해 한-미 FTA가 필요하다”고 했다.
민주노동당·진보신당·민주노총 등 진보세력 쪽은 참여정부 때부터 시종일관 반태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진보정당은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언론노동조합·민주노총 등과 함께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해 FTA 반대에 당력을 쏟고 있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경북대 교수, 참여정부 대통령 국민경제비서관 출신인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소’ 소장 등은 한-미 FTA를 반대해 청와대를 떠났고, 지금도 한-미 FTA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열심이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경제학)도 반대 쪽의 유력 인사에 해당한다. 장 교수는 지난해 12월2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새로운 자본주의와 한국 경제의 미래’ 강연회에서 “수준 차이가 나는 나라와 FTA를 맺으면 시장 확대로 단기적 이익은 얻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뒤떨어진 나라가 앞선 나라를 따라잡는 데 장애가 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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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바뀌어도 협정은 여전해
외교부의 한-미 FTA 협정문 오역의 문제점을 밝히는 등 줄곧 FTA 추진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송기호 변호사는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쪽에서 받았다는 취업비자 서한 같은 서류가 공개되지 않는 등 한-미 FTA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고 있다”며 “특히 협정문 내용에 난해한 국제통상법 용어가 가득해 일반인들이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송 변호사는 이어 “한-미 FTA는 애초 신자유주의가 인기를 끌던 시절에 추진되기 시작했는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패러다임이 공공성과 금융 규제 강화 등의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며 “역사적 상황이 달라진만큼 한-미 FTA를 두고 면밀한 검토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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