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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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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높고 쓸쓸한 당신, 노동자


삼성전자 노동자 고 김주현씨 가족의 외로운 1인시위와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의 고공 농성과
쌍용차 노동자의 쓸쓸한 복직투쟁…
등록 2011-04-14 15:18 수정 2020-05-03 04:26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 조종석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창틀을 붙잡고 있다. 35m의 높이는 90일이 넘는 농성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 조종석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 창틀을 붙잡고 있다. 35m의 높이는 90일이 넘는 농성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100일이다. “폭설로 인한 지각을 회사가 이해해주셔서 고마움을 느꼈다”는 20대의 한 청년이, “삼성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설레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노동자가, 스스로 기숙사 난간에서 몸을 던진 지 4월20일이면 100일이다. 삼성전자 액정표시장치(LCD) 천안공장에서 일하던 고 김주현(25)씨. 그는 아직도 일터를 떠나지 못하고 이승을 서성인다. 공장 인근 순천향병원 안치실에 그의 주검이 아직도 누워 있다. 병원 밖 세상 4월의 봄은, 안치실 영하의 냉기로 그의 주검까지 다가서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서늘한 공기를 외면한다. 하루 종일 쏟아지는 뉴스는 더 이상 그 죽음을 되새기지 않는다. 이렇게 망각은 빠르게 전염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자에게 그 100일은 고립이었다. 한진중공업 현장에서 일했던 50대의 늙은 노동자가 정리해고를 반대하며 35m의 85호 크레인에 스스로를 유폐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 4월15일이다. 대한민국 최장기 해고노동자 김진숙(52)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이 그다. 김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오르자 회사는 직장 문을 닫고 그를 경찰에 고발했다. 그의 동료 노동자 두 사람이 85호 크레인과 마주 보고 있는 50m 높이의 17호 크레인에 올랐다. 그 뒤로 다시 50일이 훌쩍 지났다. 회사는 말이 없다. 크레인 위 세 노동자의 절규는 바닷바람에 가뭇없이 흩어진다.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 노동자도, 복직을 기다리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도 세상의 침묵에, 메아리 없는 외침에 몸도 마음도 병들어가고 있다. ‘그들’은 아직 겨울 바닷가 맵찬 바람을 뒤집어쓰고 외로이 서 있다. 봄이 왔다지만, 아직은 봄이 아니다.

#1. 침묵

여명에 눈이 떠졌다. 고 김주현씨의 누나 김정(29)씨는 숙면을 잊은 지 오래다. 어머니 송치화(57)씨는 꿈속에서 늘 운다. 아침에 깨어보면 눈두덩이 부어올라 눈을 제대로 뜰 수 없다. 지난 4월5일 인천 남구의 고 김주현씨 집을 찾았다.

두 모녀는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낮 11시30분부터 서울 강남 삼성전자 본관 앞에서 1인시위를 한다. 지난 2월부터 계속되고 있다. 1인시위를 위해 서울 강남 삼성 본관으로 가야 하는 두 모녀의 아침은 길고 느렸다. 아침밥을 입에 욱여넣는다. 말이 없다. 유령처럼. 주현씨의 방은 달라진 게 없다. 3층 책꽂이 위 농구공도, 대학 편입을 위해 장만한 도 그대로다. 주현씨가 즐기던 담배도 늘 있던 자리 그대로다. 김주현, 그만 없다.

» 고 김주현씨의 어머니는 카메라를 바로 보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주현씨의 방은 그가 떠나기 전 그대로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 고 김주현씨의 어머니는 카메라를 바로 보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주현씨의 방은 그가 떠나기 전 그대로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고 김주현씨는 삼성전자 LCD 천안공장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피부병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두 달의 병가를 마치고 복귀한 다음날인 1월11일 기숙사 13층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누나의 삶은 동생이 몸을 던진 그날에 머물러 있다. 누나는 입술을 만지작거릴 뿐 립스틱을 바르지 못한다. 동생이 세상을 뜬 뒤 직장에 사표를 냈다. 서울의 한 사립대 음대를 졸업했고, 비정규직 피아노학원 선생님이었다. 어머니는 누나가 멈춘 시간보다 더 먼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아직도 주말이면 가슴이 설렌다. ‘삼성에 취직했다’며 좋아하던 아들이, 주말이면 현관문을 밀고 들어올 것 같아서다. 아들은 오지 않고, 설렘은 어머니의 가슴에 상처가 된다.

기자가 피아노대회 사진을 들여다보자, 어머니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번진다. “체르니 100번을 쳤어요. 대회 때는 브루크 뮐러의 곡이었는데….” 주현씨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책상 위엔 주현씨의 유치원 졸업사진과 영정사진이 나란하다.

오전 10시30분께, 개인택시를 운전하는 주현씨의 이모부와 이모가 모녀를 데리러 왔다. 1인시위를 함께하려는 것이다. 택시운전을 하는 이모부는 사실상 영업을 접었다. 40여 분을 달려 서울에 들어서자 3만5천원이 훌쩍 넘었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쳤고, 누나는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렸다. 그 무거운 고요는 택시도 침묵하게 했다.

오전 11시30분, 주현씨 모녀의 1인시위가 시작됐다.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이 함께했다. 아무 말 없이 피켓만 들고 있는 보통의 1인시위와 달랐다. 모녀는 삼성 쪽에서 친 바리케이드를 잡고 흔들며 울부짖었다. “이게 어떻게 남 일이냐고.” “당신들과 똑같은 삼성 사람이었어.” “니들은 아들이 죽으면 가만히 있겠냐.” 점심을 먹으러 오가는 삼성 직원들은 모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아무 말이 없다. 비난도 위로도 동조도 없다. 그저 흘끔거릴 뿐이다. 세상 젊은이들이 선망하는 ‘삼성맨’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지 않는 아들의 동료를 기다리는 아버지

같은 시각, 충남 천안 순천향병원 장례식장. 김주현씨의 아버지 김명복(57)씨는 아들의 빈소를 지키고 있다. 김씨는 지난 3월 1인시위 도중 쓰러졌다. 심장수술을 받았다. 아들의 직장 동료 가운데 조문을 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힘들면, 얼마나 눈치 보이면 오지 않겠습니까. 모두를 경쟁에 몰아넣고 주현이를 낙오자로 만드는 그곳이 삼성이에요. 그것을 아마 그 사람들도 모르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힘없는 그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4월7일에는 삼성전자에 다니다 뇌종양에 걸린 한혜경(34)씨 등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들이 1인시위에 함께했다. 백혈병을 앓던 남편을 잃은 정애정(35)씨도 옆에 섰다. 이날 한씨 등 7명은 서울행정법원에 산재소송을 냈다. 지난해 10월 백혈병 사망자인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56)씨 등 6명이 낸 데 이어 집단 산재소송으로 두 번째다. 이들은 근로복지공단이 산재 승인을 거부하자 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냈다. 시민단체인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에 접수된 백혈병 등 전자산업 관련 피해 제보자는 120명에 이른다. 삼성 쪽에서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사이 46명이 세상을 등졌다. 대부분의 피해자는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른 20~30대다. 삼성의 견고한 침묵의 벽을 넘어서기엔 그들에게 남은 삶의 시간이 얼마 없다.

지난 4월11일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은 고 김주현씨 사건에 대해 검찰 지휘를 요청했다. 근로기준법의 근무시간 초과 위반(주당 연장 근로시간 12시간 초과근무 금지 규정), 기숙사 규정 위반(교대 근무시간이 겹치는 자들은 한방에 기숙할 수 없다는 규정), 산업안전보건법 복직규정 위반(질병에 걸린 근로자를 복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 등에 대한 판단이다. 고용노동부 천안지청은 검찰의 의견을 받아 늦어도 5월까지 검찰에 사건을 송치할 예정이다.

#2. 고립

부산의 바닷바람에도 벚꽃은 만개했다. 지난 4월6일 부산 영도구에 위치한 한진중공업 내 생활관 3층 농성장. 30여 개의 텐트가 곳곳에 들어서 있다. 생활관은 원래 조선소 노동자들이 작업복을 갈아입던 곳이다. 한진중공업은 지난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적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그런데 회사는 지난 2월14일 직장 폐쇄 조처를 취했다. 회사는 대신 비정규직을 투입해 선박을 계속 만들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직장이 폐쇄됐는데도 조선소 노동자들이 생활관을 농성장으로 쓰며 춥지 않게 잘 수 있는 건 공장을 돌리는 비정규직 덕분이다. 눈물 나는 역설이다. 낮잠을 청하는 늙은 해고노동자의 머리 위로 “이곳은 청정지역, 훌라(등 카드) 절대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그러나 이미 대여섯 명은 카드게임 삼매경에 빠졌다. 기자가 다가가는 줄도 모른다.

농성장엔 이렇게 희비극 같은 나른한 웃음이 퍼진다. 그러나 농성장 곳곳의 낙서는 점점 격해지고 있다. ‘2003년을 기억하라. 교육자, 불참자, 도망자=살인자다.’ 2003년, 대규모 정리해고에 맞서 85호 크레인에서 홀로 점거농성을 벌이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김주익 지회장은 129일을 마지막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농성을 마감했다. 크레인 아래에서 지지 농성을 벌이던 동료 노동자 일부가 파업을 철회하고 공장을 빠져나간 다음날이었다. 낙서는 그날의 기억을 환기한다. 이탈자에 대한 저주 퍼붓기지만, 실은 애절한 호소다. 함께 살자는. 그러나 이미 농성투쟁 이탈자는 전체 600여명 가운데 100명 선을 넘어섰다. 그만큼 고립의 상처도 깊어지고 있다.

농성장 양쪽 17호, 85호 크레인에서는 고공농성이 벌어지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1월6일 85호 크레인에 올랐고, 그 뒤 40일이 지나 170명의 해고가 확정된 2월14일 채길용 금속노조 한진중공업 지회장과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문철상 지부장이 17호 크레인에 올랐다. 4월6일 낮, 17호와 85호 크레인 앞은 족구하는 조합원들로 왁자지껄하다. 17호 크레인 옆에서는 조촐한 술판도 벌어졌다. 크레인을 지키는 도장팀 소속 조합원들이 직접 낚았다는 숭어 한 점과 소주 한 잔을 종이컵에 담아 기자에게 내민다. 어젯밤에는 자신들이 만들던 6만t급 특수선 아래로 낚시대를 드리워 감성돔 대여섯 마리를 건져올렸단다. “바다 건너에서 온 일본 핵을 먹고 자란 ‘핵’돔”이라며 자지러진다. 그들은 그렇게 카드를 치고, 족구를 하고, 때로는 ‘핵’돔을 낚으며 크레인을 지키고 있다. 평생을 머리가 아니라 몸을 부리며 가슴으로 살아온 이들은 고립의 두려움을 헛헛한 낙관으로 견딘다.

“손을 흔들어주세요.”

사진기자의 요청에 환하게 웃는 17호 크레인의 두 남자. 비슷한 높이의 건물 6층 옥상에 올라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했다. 인터뷰를 위해 크레인 위 농성장에 진입하려면 바닥을 해체해야 한다. 그러면 농성자가 위험해질 수 있다.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 크레인 위 농성장 바깥으로 나온 채 지회장은 힘겨워 보였다. 그는 고소공포증이 있다. 바닷바람은 크레인을 빙빙 돌렸다. 크레인 브레이크를 풀어놓았기 때문이다. 브레이크를 고정시키면 크레인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수 있다. 바람이 강한 이틀 전 지회장은 멀미로 구토를 했다.

잊을 수 없는 이름, 김주익 그리고 김진숙

농성 91일차 김진숙 위원은 80일 전에 만났을 때(845호 사람과 사회 ‘얼지마, 울지마, 죽지마, 철의 노동자여’ 참조)보다 훨씬 더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맞았다. 농성 시작 뒤 하루도 운동을 거르지 않았단다. 운동이라고 해봐야 크레인 위 난간 턱을 계단 삼아 오르내리는 정도다. 하지만 김 위원은 그 시간 동안은 전화 인터뷰도 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웠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잃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크레인 아래 세상 사람들과는 트위터로 대화한다. 농성 이탈자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어도 “언제나 생길 수 있는 일이니 마음 굳건히 먹자”며 오히려 아랫세상 농성자들을 다독인다. 자는 곳과 씻는 곳을 촬영해달라며 카메라를 크레인에 올려보냈다. 카메라를 담은 주머니가 바람에 심하게 요동쳤다. 그곳도 바람이 불면 멀미가 날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아래 조합원들은 “괜찮다” “행복하다”는 한결같은 그의 말이 오히려 불안하다.

35m 크레인에서도, 50m 크레인에서도 그들은 동료들의 숨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아랫세상의 위태로움을 잘 알고 있었다. 회사가 농성을 와해시키려고 운용하는 교육장 탓에 농성 이탈자가 늘기 시작한 것이다. 회사는 정리해고자를 제외한 500여 명에게 회사 바깥 교육을 통보했다. 1월15일 정리해고 통보 직후였다. 그 뒤 회사는 교육장으로 출근하지 않고 점거농성을 벌이는 직원들을 건조물주거침입과 퇴거불응을 이유로 경찰에 고소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17일 35명을 시작으로 3월9일 32명까지 대략 250여 명이 이렇게 고소를 당했다.

회사는 이분법으로 노동자를 대했다. ‘정리해고자냐, 살아남는 자냐’ ‘교육 참가자냐, 파업 참가자냐’다. 이런 회사의 나눗셈법은 치밀하고 집요했다. 농성 노동자들에게 교육 참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저편으로 가는 결단이다. 교육을 받으러 가는 노동자에겐 가족의 생계와 일터를 부여잡으려는 마지못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농성장에 남은 노동자에겐 비수나 다름 없는 배신을 의미했다. 각 층에는 농성 이탈자의 명단이 나붙었다. 벽보에 실린 이름 옆으로 “사장보다 더 나쁜 새끼” 등 욕설이 가득했다. 그러나 마나 회사는 파업·농성 이탈을 유도하려고 갖은 방법을 썼다. 농성장만 떠나면 교육에 참여하지 않아도 교육을 받은 것으로 간주했다. 등산을 가거나 어디 멀리 놀러갔다 와도 상관없다. 교육에 참가한 직원들이 받는 교육 내용은 ‘신노사문화 교육’으로 알려졌다. 노조 쪽에서는 이런 교육 방식과 내용에 대해 “반노조 교육이며 부당노동행위”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농성 노동자에게 시급한 문제는 이탈자를 방지하는 일이다.

4월27일로 예정된 부산지방노동위원회의 정리해고에 대한 법적 판단은 이번 파업의 진로를 가를 결정적 고빗길이다. 한진중공업 사태가 비등점을 향해 달아오르고 있는 셈이다. 농성장에 있든 없든 한진중공업 노동자에겐 트라우마와 다름없는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 129일차. 김주익 지회장이 목숨을 끊은 날, 85호 크레인에 매겨진 숫자다. 바로 그 크레인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100일 가까이 홀로 서 있다.

#3. 침묵, 고립, 그 뒤

현대차 사내하청 문제도 침묵의 소용돌이에 빨려들고 있다. 이상수 지회장은 지난해 12월 25일 동안의 점거농성을 끝냈다. 대신 지난 1월 서울로 올라와 단식농성을 벌였다. 2차 파업도 예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조 전 간부의 ‘양심선언’이 있었다. 지회장을 포함한 조합 간부들이 공금을 유용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노조 지도부는 총사퇴했다. 4월 현재 비상대책위가 꾸려져 있지만 사내하청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소송이나 파업 뒤 징계 문제 등 현안 대응마저 쉽지 않은 현실이다.

최병승 금속노조 미조직비정규실 국장은 현대차 비정규직으로 소송에서 복직과 정규직화를 일궈낸 당사자다. 최 국장은 “길고 긴 소송과 복직 투쟁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절박한 상황과 따로 노는 듯한 그 말투의 담담함이 낯설다. 회사 쪽은 애초 30명으로 징계 수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노조가 와해되고 비대위 체제로 들어가자마자 징계에 나서 벌써 40명 이상을 해고했다. 정직, 감봉까지 포함하면 징계자는 539명에 이른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신음은 훨씬 더 깊고 길다. 올 6월이면 2년이 된다. 벌써 13번째 동료와 그 가족의 죽음을 겪었다. 동료들은 차 안에 연탄불을 피워놓거나,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소리 없이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난 동료도 있다. 그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일은 이창근 쌍용차지부 기획실장의 몫이다. 이창근 실장은 웃음을 잃은 지 오래다. 지난 4월5일에는 ‘쌍용자동차 구조조정 노동자 3차 정신건강 실태조사 보고’가 있었다. 우울증 항목에 응답한 노동자 190명 가운데 8할이 중등도 이상의 우울 증상을 보였다. 중등도 이상이면 심리상담 전문가를 찾아가야 한다.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도 95명, 절반이었다. 고도 우울 증상을 보이는 이들의 38.7%가 최근 1년간 자살 시도를 했다. 최근 1년간 쌍용차 노동자의 자살률(10만 명당 151.2명)은 일반인의 3.7배까지 치솟았다.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회사의 모르쇠와 세상의 침묵은 ‘그들’을 고립시켰고, 그 침묵과 고립을 견디느라 그들의 영혼은 지쳐가고 있다.

정리해고, 노조 불인정, 노사관계 거부 등으로 갈등하는 곳은 제주부터 서울까지 전국 103곳에 이른다. 그 가운데 절반이 넘는 64곳이 회사 쪽의 불성실한 태도로 교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봄꽃 대신, 침묵과 고립이 방사능 비처럼 온 나라를 적시고 있다.

부산·인천=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단독 입수한 고 김주현씨 일기
“우리 회사 차 보고 마음이 뿌듯했다”
» 고 김주현씨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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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고 김주현씨가 남긴 일기를 입수했다. 지난해 초 입사 직후 있었던 사내 연수 중에 작성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여 인정받는 엔지니어가 되고 싶다”거나 “항상 최선을 다해 일을 즐기고 싶다”는 등 ‘최선’과 ‘열심’으로 포부를 밝히는 내용으로 시작됐다. “주변에서 나에 대한 평가가 삼성에 다닌다는 걸로 좀더 높게 보고 다르게 본다는 게 조금은 어깨가 으쓱해진다” “회사 복귀를 할 때 우리 회사 차를 보고 마음이 뿌듯했다” 따위에서 삼성전자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느껴진다. 연수가 중반으로 가자 “부서에 배치받으면 분명 어리버리하고 멀뚱멀뚱거릴 텐데 걱정이 앞선다”거나 “현장에서 이렇게밖에 못한다면 분명 힘들어할 텐데 한심스럽다”는 걱정이 생생했다. 연수를 마칠 즈음, 일기는 이렇다.
“오늘도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중략) 오늘도 역시 우리는 실수를 했다. 그리하여 벌을 섰다. 이제는 죄송하다는 말도 나조차 듣기 싫은 정도다. 뭐가 잘못된 걸까. 이제는 동기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누구의 탓인지 누가 잘못한 건지 원망의 눈초리가 보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정말 우리가 꼴통이고 4년제 애들보다 하등 인간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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