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전이 지구의 역사를 바꾸고 있다. 마지막 남은 결사의 몇 가지 조처에 1억3천만 일본인은 물론 인류가 희망을 걸고 있다.
사실 3월12일 원자로에 냉각수를 집어넣을 때 이미 상황은 방사능 유출의 지옥행 열차를 탄 셈이다. 열차가 종착역까지 가느냐, 중간에서 멈추느냐만 정해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사고 현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한적으로 발표했다. 국민의 동요를 고려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3월11일 이후 후쿠시마 원전의 상황은 단 한 번도 호전되지 않았다. 독일과 미국 쪽 언론은 3월13일 일찌감치 ‘일본 정부가 상황 통제에 실패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3월15일부터는 ‘대재앙’의 가능성마저 오르내렸다.
충격을 넘어 정부에 대한 강한 배신감을 일본 국민에게 심어줄 수밖에 없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핵에 가장 민감한 나라다. 국제사회에서 유일하게 원폭 경험이 있다. 이로 인한 핵 공포와 피해의식은 상상 이상으로 광범위하고 뿌리 깊다. 그럼에도 ‘원자력 발전’은 수용했다. 정부와 언론이 주도한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홍보가 엄청났다. 막대한 주민 보상금도 한몫했다. 이런 배경을 기반으로 1970년을 전후로 일부 학생과 주민들의 반대를 뛰어넘어 ‘원전의 나라’로 나아갔다. 공항이나 댐 등 다른 국책사업이 주민 반대운동에 번번이 봉착했던 것과 달리, 50기가 넘는 원전 강국으로 질주한 것이다.
‘핵의 평화적 이용’이란 유혹에 빠져
핵 이용과 원자력 시설에 대한 일본의 관리 수준은 국제사회에서 최고로 평가받아왔다. 원폭의 기억과 일본의 과학기술이 결합한 결과다. 실제 미-일 동맹에 따라 일본 내로 들어오는 미군의 핵잠수함이나 핵항공모함이 영해를 빠져나갈 때까지 실시간 방사능 유출을 감시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방사성 감시선이 미군의 핵추진함선을 따라붙으면서 방사능을 측정해, 배 위에 디지털 모니터로 공개하며 기록한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어떤 일이 있어도 발생해서는 안 되는, 원자력 핵심 장치의 융해가 진행되고 있다.
체르노빌 사고(1986년)로 날아온 방사능을 독일에서 직접 겪으며, 핵오염 대기분석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광용 박사(환경분석학)의 설명은 일본인들의 정신적 공황을 잘 관통한다.
“일본은 원전 고밀도 국가로, 원전의 안전과 관련한 규제·시설·기술 모두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대응하는 상황 조치 매뉴얼도 구체적이다. 교육과 투자를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최고 수준에 이르는 원전 안전 대비 시스템을 구축해온 것이다. 그렇게 우수하다는 시스템이 작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이게 바로 핵의 근본적인 속성이다. 원자력은 반응하면 인간이 마음대로 중지시킬 수 없다. 중지는커녕, 여러 실수와 판단 부족이 더해졌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지진파가 원자로의 핵심을 강타한 것이 아니다. 쓰나미로 인한 바닷물이 원자로로 연결되는 냉각 계통을 침수시켜 발생했다. 그런데 최악의 방사능 유출까지 거론되는 상황이다. 체르노빌은 1개소 원자로 내부가 폭발했다. 후쿠시마는 1, 2, 3, 4호기 등 4개소의 원자로가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든 상태다. 자칫 연쇄 방사능 유출이 우려된다. 오염의 정도나 양상은 훨씬 커진다.
편서풍이 유일한 대응책?사고 원전 주변의 인구밀도를 따지면 더 끔찍하다. 체르노빌은 우크라이나 변방에 있었다. 후쿠시마 원전 주변으로는 도시가 즐비하다. 직접 피해 영향권으로 거론되는 반경 100km 안에 약 500만 명의 주민이 산다. 일본 5대 도시의 하나인 센다이시를 비롯해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도치기현, 이바라키현 등이 사람이 살기 어려운 죽음의 도시로 변할 가능성이 언급된다. 방사능 유출량이 커질 경우, 영향권은 반경 300km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수도 도쿄를 비롯해 가나가와현, 사이타마현, 지바현, 나아가 동일본 전체가 피해 영향권 아래 들어설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사태가 심각한 이유다. 다수 주민들의 일시 대피가 아닌 영구 이전까지 검토되고 있다. 전례가 없는 경우다.
물론 우리의 화두는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것인가’이다. 구체적으로 ‘후쿠시마에서 방출된 방사능이
과연 한반도로 유입될 것인가’ ‘그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가’이다. 이 대목에서 적어도 3월18일까지 국내 원자력업계는 “방사능이 날아 올 가능성이 희박하고, 오더라도 크게 우려할 수준이 못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심각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정부와 원자력 관련 산업계 및 학계의 기본적 입장이 ‘원전은 안전하다’라는 인식과 태도로 똘똘 뭉쳐 있다는 걸 재확인시킨다. 한국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미국이나 유럽의 상황 인식이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정부의 설명과 달리, 방사능 공포는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대기를 통한 방사능 이동과 오염은 실제 광범위하다. 체르노빌 때 방사능은 2천km를 간단하게 이동했다. 한반도까지 날아왔다. 기상청이 이야기하는 편서풍도 100% 장담하기는 곤란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수습 국면으로 진정시킨다 하더라도, 방사능 유출은 석 달 이상 추가 지속된다. 그 기간에 편서풍만 분다는 설명은, 과학적일진 몰라도, 하늘의 뜻은 아니다.
정부는 방사성 오염의 확산 방지 및 정화 대책을 가동해야 한다. 환경부와 교육과학부를 중심으로 일선 읍·면까지 각급 기관의 대비태세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구체적 국민행동 지침을 언급할 때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시한 ‘국내 원전의 안전 점검’도 당연히 중요한 사안이다. 그런데 현재의 인적 구성과 구조로는 ‘수박 겉핥기식 점검’으로 그칠 가능성이 크다.
당장 국내 원전 점검 필요여야 합의로 ‘원자력 안전 특위’를 구성해 안전 점검을 진행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실효적이다. 특위 산하에 분과를 선정하고, 여기에 여야가 관련 전문가를 추천·선정해 진행 과정을 치밀하게 기록하고 조사해야 한다.
점검 대상도 원전시설부터 원자력 이용 전반에 걸칠 필요가 있다. 울진·월성·고리·영광 등 각 원자로를 중심으로 사업 기획 당시의 자료 검토부터 시작해 입지·설계·시공·운영의 전 과정을 재검검해야 한다. 안전과 관련해 지금까지 있었던 주요 사고 및 수리, 비상작업 등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점검작업이 요구된다. 원전 주변의 지역 주민과 민간단체에서 그동안 제기한 사고 관련 의혹이나 의문점들도 함께 들여다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광범위하고 근원적인 점검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다. 미국 원자력위원회는 노심 융해가 일어날 가능성을 100만분의 5 정도로 밝혀왔다. 100만분의 5에 해당하는 가능치가, 가장 안전하다는 일본에서 발생했다.
일본 원전 사고는 체르노빌과 달리 전 인류가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이 과정은 원전에 대한 인류의 태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정부의 ‘원전은 안전하다’라는 맹신과 ‘그래도 원전을 짓겠다’는 고집이 계속 이어질지 물을 수밖에 없다.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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