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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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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정치

여성 의원 비율은 가봉과 같은 세계 80위, 남성 정치인은 툭하면 여성 비하…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고위직 여성할당제 아니면 해결 난망
등록 2011-03-16 11:19 수정 2020-05-03 04:26

“성형을 너무 많이 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룸에 가면 자연산을 많이 찾는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지난해 말 무심코 이런 여성 비하 발언을 내뱉었다가 국회 윤리위원회에 제소를 당했다. 안 대표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유 없이 생긴 일이 아닌 건 분명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에게도 여성 차별 의식이 뿌리 깊이 박혀 있다는 얘기다.

‘명예 남성’ 권하는 사회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이 제작한 ‘선거탐구생활’ 동영상은 정치권이 양성평등 문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는 의심을 품게 만든다. 유권자에게 표를 호소하는 동영상에서 한나라당은 ‘여자가 아는 것은 쥐뿔도 없어요’ ‘드라마는 재방·삼방도 보지만, 뉴스는 절대 안 보는 여자’ 등으로 여성을 표현했다. 한마디로 ‘무개념 홍보물’이었던 것이다. 여성계의 반발과 누리꾼의 질타에 한나라당은 동영상을 홈페이지에서 삭제했지만, 엎질러진 물을 도로 담을 수는 없었다.
성차별·성희롱 폭력을 당하는 건 여성 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후보 경선이 치러지던 2007년 1월20일 ‘대전발전정책포럼’ 초청특강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나처럼 애를 낳아봐야 보육을 얘기할 자격이 있고, 고3을 4명 키워봐야 교육을 얘기할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 쪽은 실제로 자녀 넷을 둔 그의 경험을 강조했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이 발언은 경쟁자인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겨냥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 ‘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3월7일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27회 한국여성대회’ 참석자들이 성희롱, 여성 비하 발언 등 ‘성 평등 걸림돌’ 퇴출을 요구하는 빨간색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 ‘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3월7일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재단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27회 한국여성대회’ 참석자들이 성희롱, 여성 비하 발언 등 ‘성 평등 걸림돌’ 퇴출을 요구하는 빨간색 종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지금까지 국회의장·부의장 가운데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당 대표나 원내대표, 최고위원 등 고위 당직자를 선출하는 당내 선거에서도 여성은 배제되기 일쑤였다. 최고위원이나 대변인직엔 여성 의원이 당마다 한두 명씩 있지만, ‘우리도 여성을 배려한다’는 생색을 내는 정도다. 민주당의 한 여성 의원은 “(당내 선거에서) 여성 의원은 나가봐야 떨어지니까 선수(국회의원 당선 횟수)가 높아도 나갈 생각을 잘 안 하게 되고, 남성 의원들은 (당 지도부 구성 등에서) ‘여성 몫’이 따로 있다는 이유로 여성 의원에게 투표를 하지 않으려 한다”며 “남성 의원들이 인간관계를 다지는 술자리나 골프 등 사교문화에 여성 의원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보니 그런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의원들끼리 혹은 의원과 기자들이 함께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는 여성 의원의 외모다. “A의원은 예쁜 얼굴 하나 믿고 설친다”거나 “B의원은 일은 잘하는데 얼굴이 못생겨서 인정을 못 받는다”는 식이다.

의원들끼리 혹은 의원과 기자들이 함께 가벼운 대화를 나눌 때 심심찮게 등장하는 소재 가운데 하나는 여성 의원의 외모다. “A의원은 예쁜 얼굴 하나 믿고 설친다”거나 “B의원은 일은 잘하는데 얼굴이 못생겨서 인정을 못 받는다”는 식이다. 여성 의원을 동료가 아니라 ‘성적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쉽게 나오기 힘든 얘기다. 이런 인식은 “C의원이 한 자리 잡으려고 미모로 정권 실세를 유혹했다”는 등 여성 의원을 둘러싼 갖가지 루머로 이어진다. 루머에 거론되는 여성 의원은 진원지가 어딘지 알 수 없으니 공식적으로 항의를 할 수도, 누구를 붙들고 하소연을 할 수도 없다.

이러다 보니 유전자만 ‘XY’인 ‘명예 남성’으로 살아가는 여성 의원도 적잖다. 단순히 말이나 행동을 남성 의원처럼 하는 게 아니라, 여성 인권과 지위 향상 문제에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D의원은 같은 당 남성 의원이 성희롱 발언 등으로 문제가 됐을 때 내부적인 비판도 꺼리고, 여성 의원들이 여성 관련 정책을 논의하는 자리나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과정에 잘 참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핵심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나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될 땐 “여성 동등 대우”를 강조한다. 이 때문에 그는 다른 의원들에게 “자기가 필요할 때만 여성”이라는 빈축을 산다.

» 2010년 성 격차 지수

» 2010년 성 격차 지수

성 격차 134개국 중 104위

그나마 여성 의원 비율은 14.5%에 불과하다. 국제의회연맹(IPU)이 155개국을 조사해 3월7일 발표한 결과를 보면, 평균 여성의원 비율은 19.1%다. 우리나라는 평균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순위로는 80위, 아프리카 가봉과 같다. 지난해 기준으로 법무부 등 22개 기관엔 고위직 여성 공무원이 단 한 명도 없는 등 중앙 정부부처 41개 기관의 여성 고위직 공무원 비율은 2.8%에 불과했다. 여성 30% 할당제를 의무화하는 각종 정부위원회에도 여성 비율은 20% 수준이다. 이를 어겨도 처벌할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가 세계경제포럼(WEF) 조사대상 134개국 가운데 우리나라의 성 격차 지수는 104위, 유엔개발계획(UNDP) 조사 대상 109개국 가운데 여성권한 척도는 61위다. 여성 의원이나 양성평등 의식이 확고한 의원이 턱없이 적으니 여성 정책에 관심도 떨어지고, 어렵게 만들어진 제도도 제대로 실행되기 어려운 것이다.

여성계에선 이런 구조를 바꾸려면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전면 도입하든지, 현재 15%인 비례대표를 크게 늘려 여성 의원 수를 늘리는 게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인맥과 돈으로 관리되는 지역구 중심의 현재 국회의원 선거에선, 상대적으로 ‘자원’이 부족한 여성이 공천을 받는 것은 물론 선거운동을 벌이는 것도 불리하기 때문이다. 남윤인순 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여성 차별적 관행과 문화를 바꾸려면 우선 여성 배제적인 성격의 정당·선거제도부터 바꿔야 한다”며 “여성계가 20년 동안 노력해 비례대표 15%(여성 절반 배정) 확보를 이뤄냈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남윤 대표는 또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 여성이 권력에서 배제되는 문제부터 인권침해와 고용차별을 당하는 문제까지 두루 고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정당 안팎에서 ‘훈련된’ 여성 정치자원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여성 정치인도 적잖다.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인 최영희 민주당 의원은 “유엔여성지위위원회가 발표한 여성의 정치적 권한 지표에서 우리나라는 82위인데, 이는 여성가족부 폐지 시도와 권한 축소, 양성평등 얘기도 꺼내기 어렵게 만드는 분위기 등 이명박 정부 들어 여성의 권한 문제를 도외시한 탓이 크다”며 “여성가족부가 주도적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장기 계획을 세우고, 국회도 나서서 법제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은 “누구도 여성 인재의 경력을 관리해주지 않고, 정책 결정자의 여성 할당도 잘 안 지켜지기 때문에 정책에 여성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며 “좀더 명확하게 정부기관과 기업 고위직 등의 여성 할당 입법을 하도록 논의해야 한다. 현재 하위직에 있는 여성이 많기 때문에 앞으로 10년만 여성 관리직 비율을 강제적으로 늘리면 그다음부터는 법이 없어도 여성의 고위직 진출이 자연스러워진다”고 말했다.

아직도 징계받지 않은 ‘자연산’

그나저나 안상수 대표의 발언은 국회 윤리위에서 어떻게 결론이 났을까? 윤리위에 회부되면 ‘전체회의→징계소위→윤리특별자문위원회’를 거쳐야 한다. 윤리위는 지난 2월22일 전체회의에서 안 대표 징계안을 논의해 윤리위의 징계소위에 회부했다. 징계소위는 여야 간사가 합의해 일정을 잡아야 하는데, 아직 합의는 이뤄지지 않았다. 역시, 남성 의원의 잘못을 바로잡기는 하세월이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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