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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의 빛나는 약속

등록 2001-06-27 00:00 수정 2020-05-02 04:21

세무조사 결과 투명공개 처음 사고로 밝혀… ‘독립당한 언론’으로 새출발한 진면목 과시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거 얕은 상업주의 아닙니까?” 경향신문사 강기석 경영기획실장은 뜻밖에도 “상업주의적 계산도 있었다”고 했다. 좀더 나아가 보았다. “독립언론, 독립언론 하는데 본질은 독립‘당한’ 언론 아닙니까?” 강 실장은 이번에도 선선히 “정확한 지적이다”라고 대답했다.

경향신문사는 지난 6월22일치 1면에 ‘본사 세무조사 결과 투명히 공개하겠습니다’라는 사고를 내보냈다. “앞으로 국세청의 세금 추징내용이 확정 통보되는 즉시 이를 국민들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실추된 신뢰를 회복하는 첩경인 동시에….”

아무리 상업주의적 계산이 깔렸을지라도

누가 선수를 치느냐 하는 건 언론계 안팎에서 적지 않은 관심사였다. 그걸 경향신문사가 해내자 모두 신선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고개를 갸웃하는 부류도 있었고 끄덕이는 부류도 있었다. 3년 전 재벌소유 언론사에서 사원주주회사로 소유구조가 바뀐 경향신문사에 대한 안팎의 눈길이 그만큼 ‘반신반의’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경향신문사의 사고 게재는 발빨랐지만 결정과정이 일사천리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강 실장은 “국실장 회의에서 안건으로 채택돼 격론 끝에 공개를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리만 하면 손해가 아니냐”는 주장과 “기왕 나오는 세금이고 언젠가 어떻게든 알려질 텐데 먼저 치고 나가자”는 주장이 맞섰다고 한다. 강 실장은 “어쨌든 우리 회사의 소유구조가 그런 논의와 결정을 가능하게 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강 실장은 “사고 게재 뒤 인터넷 등을 통해 독자들의 격려가 쏟아지고 있고 사원들의 사기도 크게 올라가 상업적 계산도 성공한 셈”이라며 “다른 족벌언론들이 신문의 상품성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건 결국 사주문제 때문인데 우린 그런 부담에서 자유로웠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유구조의 변화가 경향신문사 내부에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박구재 노조위원장은 “재벌언론사일 때보다 급여는 크게 줄었지만 외부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신문을 만들 수 있다”며 “퇴직금을 모아 사원회사로 출범할 당시 앞날이 불투명했지만 재벌언론 시절보다 오히려 이직률이 훨씬 낮다는 게 뭘 의미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독립당한’ 신문의 한계는 아직 완전히 극복되지 않아보인다. “주체적으로 소유구조를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회사 안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특히 노동문제 등 정치적·이념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에서 갈팡질팡한다.” 편집국 김아무개(33) 기자는 “하지만 98년 한화로부터 분리될 때보다 훨씬 안정적”이라며 “적어도 지난 93년 김승연 한화 회장 구속 당시 제2사회면에 ‘감춰’ 보도했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객관보도는 확실히 보장된다”고 말했다.

정체성 확보에 대한 강렬한 의지 표현

강 실장은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독립적일 수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외부자본의 힘을 무시하지 못한다”며 “개혁적·진보적인 세력이 사내에서 힘을 더 얻어 이념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다양한 사업으로 자립경영을 이루는 게 앞으로의 과제”라고 강조했다.

올해 초 경향신문사는 신문사 내부와 외부언론인들을 대상으로 경향신문의 성과와 지향점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이 조사를 맡았던 양승찬 숙명여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독립언론에 대한 내부만족도나 외부평가는 대체로 높았으나 논설과 기사의 불일치 등 논조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렸다”며 “그러나 이번에 사고를 낸 걸 보면 내부구성원들의 변화에 대한 의지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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