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대 1.
올해 외무고시 경쟁률이다. 지난 6월 행정안전부(행안부)의 발표를 보면, 외무고시 최종 합격자는 35명이었다. 응시자 수는 무려 1888명이었다. 바늘구멍처럼 통과하기 힘든 고등고시 가운데서도 외무고시의 경쟁률은 악명이 높다. 올해 행정고시 경쟁률은 45 대 1이었다. 사법고시 경쟁률도 17 대 1 수준이다. 경쟁률만 놓고 보면 외무고시를 ‘고시 중의 고시’라고 부를 만도 하다.
정부와 국회, 외무고시 개혁안 내놔
이렇게 외무고시를 통과한 이들 앞에는 엘리트 외교관의 길이 열리게 된다. 1968년부터 시작된 외무고시는 5급 외교관이 되는 가장 일반적인 경로였다. 국가는 외무고시를 통해 고급 인력을 외교 무대로 잡아끌었다. 40년이 넘는 역사 동안 고시의 비리나 특혜를 둘러싼 잡음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성과였다.
이룬 것만큼 한계도 명확했다. 우선 평가 기준이 지나치게 단순했다. 암기 위주의 필기시험이 지원자의 지적 능력이나 인성을 파악하는 데 부족했다. 고시원에 처박혀 책을 판 합격자들에게 국제적인 감각이나 창의성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았다. 고시생들이 교재를 달달 외우는 동안 정상적인 대학 교육에도 지장이 생긴다는 비판도 일었다.
외교 관료들의 ‘엘리트주의’나 ‘순혈주의’도 부작용으로 지적됐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같은 경로를 통해 ‘한 방’에 관가에 입성한 이들은 독특한 동류의식을 가지게 됐다. 특히 외교관들은 해외 공관을 중심으로 한 번에 2~3년씩 외국 생활을 하기 때문에 다른 부처의 관료집단과도 다른 문화를 만들었다. 국외에서 오랜 기간 생활을 같이하면서 내부에서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문화도 생겼다. 조직의 폐쇄성은 엘리트주의와 만나면서 순혈주의로 이어졌다.
고시의 단순한 선발 방식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뽑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외교통상부(외통부)는 업무 특성 때문에 영어 등 외국어 전문가가 필요하다. 또 에너지, 통상, 군축, 국제법 등 전문 영역과 세계 각 지역을 훤히 꿰뚫는 전문가의 수요도 높다. 염재호 고려대 교수(행정학)는 “보건복지부에 관료뿐 아니라 의사와 약사가 필요한 것처럼 외통부에도 전문인력의 충원이 필요한데, 이는 현재 고시제도를 통해서는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고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외통부는 행안부와 함께 지난해부터 ‘외교아카데미’의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외교아카데미란, 쉽게 말해 외교관 양성기관을 말한다. 국회 쪽도 움직이고 있다. 박선영 자유선진당 의원과 송영선 미래희망연대 의원은 각자 외교관 선발 제도 관련 법안을 준비하고 있다.
정부 안을 먼저 보면, 60명을 선발한 뒤 1년 동안의 교육과정을 거쳐 50~55명을 외교 관료로 채용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는 원래 외무고시도 유지하고 외교아카데미도 설립해 두 경로를 통해 외교관을 충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외통부 안에 불필요한 파벌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에 따라 외무고시는 2012년부터 폐지할 계획이다.
박선영 의원도 외교아카데미 설립을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논자 가운데 하나다. 그는 프랑스의 국립행정학교(ENA·Ecole Nationale Administrative) 등의 모델을 본떠 2년의 외교아카데미 연수 과정을 구상하고 있다. 또 선발 인원을 200명 정도로 늘리고 이 가운데 50~60명을 뽑아내자는 안도 내놓고 있다. 송영선 의원은 여러 대학에 마련될 외교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에게 외교관 채용시험에 응시할 기회를 주는 방식을 그리고 있다. 송 의원실 관계자는 “전문대학원의 정원은 아직 정하지 않았고, 교육 기간은 2~3년 정도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절반을 거르는 심층면접은 공정할까그렇다면 외교아카데미와 외무고시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지난 6월 외통부가 내놓은 ‘새로운 외교관 선발제도’ 보고서를 보면, 차이점을 엿볼 수 있다. 핵심은 세 가지다.
첫째, 인재 선발 기준이 다양해졌다. 외교아카데미에 들어갈 60명의 인원 가운데 36명은 일반 전형으로 뽑고, 3명은 영어 능통자, 9명은 제2외국어 능통자, 12명은 에너지·통상 및 아프리카·중동 등 지역 전문가를 뽑게 된다. 잣대를 다양하게 해서 다양한 인력풀을 구성하겠다는 구상이다. 여기서 제3세계 지역 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동안 미국 등 강대국 중심으로 편향된 국내 외교에서 제3세계 전문가는 활동할 수 있는 여지가 적었다.
둘째, 면접의 비중이 늘었다. 1·2차 서류전형 및 필기시험은 외무고시와 큰 차이가 없지만, 3차 면접의 기능이 커졌다. 2차 필기시험 합격자 120명은 7일 동안 심층면접을 거친 뒤, 최종 합격생 60명으로 걸러진다. 수험생들은 개별면접과 역량평가 등의 과정을 거친다.
셋째, 현재 외무고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외보안보연구원에서 4개월 정도 진행되는 교육 과정은 1년으로 늘어나게 된다. 사법연수원의 교육 기간이 2년이고, 행정고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는 중앙공무원교육원의 연수기간이 1년인 것에 견줘, 외교안보연구원의 교육 기간이 지나치게 짧다는 평가에 따른 것이다.
평가는 엇갈린다. 외무고시와 크게 다른 점이 없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를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이다. 그는 9월8일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외교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것이 지금의 외무고시(와 다를 바 없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 외무고시 (합격자)는 몇 개월만 교육을 했는데 외교아카데미는 더 많이 시키겠다는 그 차이지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평가 과정에서 공정성·객관성이 침해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면접의 비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유기준 한나라당 의원은 9월7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이번 특별채용에서 문제점이 나타났듯이 외교아카데미가 개악으로 가는 게 아니냐”며 걱정했다. 원혜영 민주당 의원도 같은 자리에서 외통부의 신뢰성이 떨어졌다며 “외교아카데미를 백지 상태에서 다시 검토하라”고 주문했다. 국회입법조사처도 지난해 10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외교아카데미 입학생 선발 기준이 특정 집단에 유리한 것이 될 소지가 있다”며 “엄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고시로 돌아가는 편향도 부적절외교아카데미의 설립이 실보다는 득이 많다는 의견도 있다. 서원석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획일적인 고시제도를 통해서 외교 관료를 선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밖에 없고, 연수 과정도 매우 부실했다. 체계적인 외교관 양성을 위해 외교아카데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염재호 교수는 “특채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고시제도로 맹목적으로 돌아가는 편향을 보여서는 안 된다. 필기시험만이 공정한 선발 방식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면접 등 종합적인 기준을 과감하게 도입하되 공정성과 투명성을 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태 기자 kk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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