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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혹한 단가 인하, 너그러운 공정위

부품업체 적자 볼 것 알면서도 납품단가 깎은 삼성전자에 무혐의… 징계 위한 심의 과정도 불투명
등록 2010-07-09 15:23 수정 2020-05-03 04:26

“(하청업체가) 구조조정, 급여 삭감, 복리후생 축소 등의 노력으로 더 이상 원가 인하 여력이 없음.”(2007년 9월17일 삼성전자 내부 보고서 ‘08년 구매추진 계획’)
“100% 삼성전자 납품 회사의 대다수(4개 업체 중 3개)가 1월 시행한 납품가 인하로 적자가 될 것으로 예상.”(2008년 1월31일 삼성전자 내부 보고서 ‘원가시스템 추진 현황’)
 
삼성전자 내부 보고서에도 “인하 여력 없다”
하청업체가 아닌 삼성전자가 직접 작성한 내부 보고서에 나타난 내용이다. 삼성전자는 2007년 하청업체가 수년간 납품단가를 맞추려고 직원을 자르고, 월급을 줄이고, 휴가비 등을 아끼는 노력 등을 펼쳐 이후 더 이상 납품단가를 낮출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듬해 납품단가를 낮췄다. 대부분의 하청업체가 손해를 볼 것이 뻔하고, 나머지 업체 역시 이익이 감소할 것임을 잘 알면서도. 박선숙 민주당 의원실이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자료를 입수하거나 직접 열람해 얻은 삼성전자 하도급 거래 조사 자료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삼성전자 BLU 납품단가 인하 현황(2008)

삼성전자 BLU 납품단가 인하 현황(2008)

박선숙 의원실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삼성전자는 액정표시장치(LCD) 패널의 핵심 부품인 BLU(Back Light Unit·LCD 패널에 전류와 빛을 공급하는 부품)를 납품하는 8개 업체에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압력을 행사한 혐의가 뚜렷하다. 우선 삼성전자는 납품단가 인하 여력이 없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할 정도로 하청업체에 대한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2007년 9월 작성된 ‘08년 구매추진 계획’ 보고서에서는 재료비가 납품단가 전체의 93%를 차지하고, 이익률도 2006년 3.0%에서 2007년 1.2%로 줄었다고 파악했다. 또 직원 급여에 해당하는 임가공원가가 2006년에 비해 2007년 24.0%포인트나 줄었고, 심지어 일부 기업은 복리후생비 비율이 0.2%에 그친다고 밝히는 등 세부 사정까지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처럼 하청업체의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삼성전자는 2008년 1월 납품단가를 깎았다. 가혹한 납품단가 인하로 한 하청업체는 삼성전자 쪽에 전자우편으로 ‘살려달라’고 읍소했다. 공정위가 삼성전자 조사에서 확보한 전자우편에서는 한 하청업체가 삼성전자 쪽에 “연초부터 삼성이 가격 인하를 요구하지만, 동일 부품을 몇 년간 30~40% 깎아서 (납품했기 때문에) 더 이상 단가 인하 여력이 없다. 살아남을 재간이 없다”고 통사정했다.

하소연에도 아랑곳없이 납품단가 인하는 목표 이상의 성과를 냈다. 삼성전자가 공정위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8년 납품단가 인하율 목표를 재료비 4.0%, 가공비 0.8% 등 총 4.8%로 잡았다. 실제 실행한 것은 기업별로 3.0~12.0% 등 평균 7.1%였다. 목표보다 뛰어난 납품단가 인하율을 보인 것이다. 삼성전자가 자료를 제출한 8개 하청업체 가운데 한 곳만 목표보다 낮은 3.0% 인하율을 보였고, 나머지 7개 업체는 모두 목표보다 높았다.

납품단가 깎아도 ‘일률적 비율’만 아니면 된다?

공정위는 이같은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고강도 조사를 벌였다. 삼성전자의 2005년 1월부터 3년간 하청업체 거래를 대상으로 2008년 3월부터 2009년 4월까지 1년 넘게 조사했다. 2008년 3월4일부터 나흘간 현장조사를 하고 수차례 추가 자료를 요청했다. 이후 공정위는 징계 여부를 판단하는 소위원회에 안건을 상정하면서 삼성전자에 하도급법 및 공정거래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과징금 18억7100만원을 부과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하지만 2009년 9월에 예정돼 있던 소위원회는 자료 수집 및 쟁점 자료 정리에 필요한 시간을 달라는 삼성전자 쪽 법률 대리인의 요청으로 한 차례 연기되고 이후 열린 소위원회에서도 결정이 미뤄지다 결국 2009년 11월에야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공정위는 무혐의 결정을 내린 이유로 우선 삼성전자가 납품단가 인하율 목표를 설정했지만 실제 실행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꼽았다. 또 8개 업체 가운데 동일하게 5.5%의 인하율이 적용된 기업은 3곳에 불과하고 다른 업체들은 인하율이 다르다는 점을 들어, 공정거래법 시행령에서 규정하는 ‘일률적 비율로 단가를 인하해 하도급 대금을 결정하는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박선숙 의원은 공정위의 결정을 ‘직무유기’라고 비판했다. 박 의원은 “실제 목표보다 훨씬 높은 단가 인하가 이뤄졌는데도 각각의 인하율이 다르다고 무혐의 결정을 내린 것은 공정위의 대·중소기업 간 공정거래 감시라는 본연의 업무를 망각한 것”이라며 “대기업들이 납품업체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부당하게 납품단가를 인하하더라도 인하율만 서로 다르면 불공정거래가 아니라고 면죄부를 주는 셈”이라고 말했다. 또 “삼성전자가 2008년 초 임원들에게만 4558억원의 장기성과급을 지급한 반면 중소기업에는 목표보다 높은 납품단가 인하를 강행한 것은 중소기업 납품가를 쥐어짜서 대기업 배만 불리는 꼴”이라며 “공정위가 이같은 관행을 조속히 개선하기 위해 공정하고 투명하게 업무를 진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정위가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 감시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지난해 10월22일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이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공정위가 불공정 하도급 거래 관행 감시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지난해 10월22일 정호열 공정거래위원장이 국정감사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겨레 김진수 기자

 

“기업 비밀 포함” 소회의록 공개 거부

박선숙 의원은 공정위 소위원회 결정 과정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소위원회 회의록을 요구했지만, 공정위는 회의록 안에 기업 비밀이 포함돼 있어 공개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과연 그 이유 때문일까? 감사원이 지난해 발표한 ‘중소기업 거래 보호시책 추진실태 감사결과 처분 요구서’를 보면, 공정위 조사관이 한 건설회사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 행위에 대해 21억원의 과징금을 물리도록 의견을 제출했지만 소위원회에서 무혐의 결정을 내리고 회의록에서 그 사유를 기록하지 않은 사례가 적발됐다. 감사원은 이에 대해 ‘소위원회 결정 과정에서 투명성과 공정성이 저해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공정위가 대기업의 불공정한 거래에 대해 ‘솜방망이’ 결정을 내려 중소기업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지난 2월 임시국회에서 정호열 공정위원장은 국회의원들의 질책을 들어야 했다.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은 “올해 업무 보고에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경쟁 문제에 대한 감시활동을 강화하겠다고 하는데 수년간 듣던 얘기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호열 위원장은 “대기업과 하청업자 사이, 1차 협력사와 2차 협력사 사이의 상생협력 관계를 확대하는 데 정책적인 노력을 굉장히 기울이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불공정거래를 단절하기 위해 공정위가 애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지난 6월23일 공정위가 발표한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 및 공정거래협약 이행 실적 평가’를 보면, 3대 그룹 18개 기업의 이행 실적을 평가하면서 이행 실적이 미흡한 4개 기업은 점수뿐만 아니라 회사명도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우수’(90점 이상) 등급을 준 포스코건설·현대중공업 등 9곳과, ‘양호’(85점 이상) 등급을 준 CJGLS 등 5곳은 공개했다. 지금까지 평가를 받은 76곳 중 양호 미만 판정을 받은 회사는 전체의 36.8%에 달할 정도로 많지만, 기업들은 회사명이 노출되지 않아 크게 압박을 느끼지 않는다. 상생협력 및 공정거래협약이란 공정위가 하청업체와 협약을 맺은 대기업에 대해 1년 뒤 현금성 결제, 납품단가 인상, 자금 지원 등 공정한 하도급 거래 시스템 구축을 위한 이행 상황을 평가해 우수한 경우 직권조사·서면실태조사 면제 등의 혜택을 주는 제도다.

이처럼 공정위가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면서 하청업체는 공정위를 신뢰하지 않고 있다. 이번 공정위 평가 과정에서도 하청업체가 대기업으로부터 부당한 압력을 받았지만 공정위는 이를 전혀 모른 채 지나갔다.

2008년 12월 삼성전자가 주최한 하도급 공정거래 협약식. 삼성전자는 2008년 하청업체가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납품단가 인하를 단행했다. 삼성전자 제공

2008년 12월 삼성전자가 주최한 하도급 공정거래 협약식. 삼성전자는 2008년 하청업체가 여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납품단가 인하를 단행했다. 삼성전자 제공

 

하청업체 만족도 조사에 ‘모범답안’ 배포

CJ시스템즈가 대표적인 예다. 이 회사 구매팀 관계자가 공정위의 ‘수급 사업자 만족도 조사’를 앞두고 모든 하청업체에 ‘모범답안’을 전자우편으로 보냈다. 한 하청업체 관계자는 “CJ시스템즈가 이메일로 (공정위가 묻는) 수십 개 항목에 대해 어떤 답을 쓰라고 답변 내용을 보냈다”며 “이후 답을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답변 내용을) 회신까지 하라고 강요했다”고 밝혔다. 또 “CJ시스템즈가 하청을 준 뒤 수개월째 제대로 대금을 주지도 않으면서 이런 압력까지 가하는 것이 황당했다”며 “공정위에 제보할 생각도 했지만, 공정위라고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CJ시스템즈는 이번 평가에서 ‘양호’ 등급을 받았다. 이에 대해 CJ 쪽은 “한 하청업체가 (공정위 조사에 대한) 문의를 해와 답변하는 과정에서, 참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전 하청업체에 이메일을 보낸 것”이라며 “점수를 높게 받으려는 것보다 단순한 직원의 실수”라고 해명했다. 임은규 공정위 하도급 총괄과장은 “처음 듣는 일인데 만약 대기업이 이메일로 모법답안을 보냈다면 분명히 압력을 행사한 것”이라며 “좀더 조사를 한 뒤 ‘양호’ 등급을 ‘등급외’ 판정으로 바꾸고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취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박선숙 의원은 7월2일 공정위가 소위원회에서 의결서를 의무적으로 만들도록 하는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동안 공정위는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조사하고도 징계에 해당하지 않는 무혐의나 경고 조처에 대해서는 의결서를 따로 만들지 않았다. 박 의원은 “현재까지는 공정위가 무혐의로 결정한 경우 의결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심사보고서와 다른 결과가 나와도 그 이유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며 “공정위 심의 과정의 투명성을 위해서라도 의결서 작성이 의무화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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