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샴푸 ‘댕기머리’를 생산하는 두리화장품은 6월25일 TV 광고를 시작했다. 광고는 꼭 대기업의 경쟁제품 광고가 나간 뒤 바로 이어 방영된다. ‘1% 한방 성분만 넣어도 한방샴푸라 말합니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광고에는 대기업 제품보다 품질이 뛰어나다는 자신감이 반영돼 있다. 한방 농축 원액을 전체 용량의 33% 이상 함유한 제품은 댕기머리뿐이라는 것이다. 이같은 자신감 뒤에는 위기감이 배어 있다. 속속 한방샴푸 시장에 뛰어든 대기업에 중소기업이 대항하기 힘든 부분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기업과의 경쟁, 판로 확보가 가장 어려워
이병수 사장이 직원 4명과 1998년 설립한 이 회사는 은행 대출금 1억5천만원으로 시작했다. 대출금과 자기 돈을 까먹으면서 4년간 연구한 끝에 현재의 한방샴푸를 개발했다. 하지만 2002년 직원이 8명에 불과한 회사는 제품을 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수차례 대기업에 공동 판매 등을 제안하려고 방문했지만 현관문조차 통과하기 힘들었다. 결국 택한 것은 미용실이었다. 미용실을 방문해 청소와 손님 머리 감는 것을 돕는 등 노력을 기울인 뒤에야 제품에 대해 설명하고 제품을 미용실에 들여놓을 수 있었다. 이후 ‘탈모에 도움이 된다’는 입소문이 퍼져 매출이 늘기 시작했다.
2002년 4억7천만원이던 매출은 2003년 15억원, 2004년 35억원, 2005년 76억원으로 해마다 2배 넘게 늘었다. 2005년에는 홈쇼핑에 진출하면서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2006년 200억원, 2007년 340억원, 2008년 450억원으로 급성장했다. 늘어난 매출은 일자리 창출로 이어졌다. 2002년 8명에 불과하던 직원 규모가 2007년에는 138명으로 100명을 돌파한 데 이어 현재는 217명으로 늘어났다. 현재도 15명 채용을 목표로 면접이 진행 중이다.
두리화장품의 성공은 중소기업이 기술력을 갖추면 시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혜경 상무는 손사래를 친다. 그는 “중소기업이 시장을 키우면 대기업이 뛰어들어 막강한 마케팅 능력을 동원해 빼앗아간다”며 “대기업이 진출하면 시장이 커지는 측면도 있지만, 오히려 막대한 돈과 유통 채널을 동원해 시장을 휩쓸기 때문에 중소기업의 생존이 위험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방샴푸 시장에는 2005년 LG생활건강이 ‘리엔’을, 2008년에는 아모레퍼시픽이 ‘려’를 출시했다. 애경 역시 ‘에스따르’를 지난해 출시했다. 대기업은 자사의 다른 제품을 끼워팔거나 마진율을 상대적으로 낮춰 싼 가격을 무기로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 그 결과 아모레퍼시픽은 한방샴푸 매출에서 2008년 270억원을 올린 데 이어 지난해 630억원으로 단숨에 두리화장품을 제쳤다. LG생활건강 역시 지난해 200억원의 매출로 뒤쫓고 있다. 반면 두리화장품은 2008년 450억원의 매출에서 485억원(2009년)으로 처음으로 한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
대기업과의 경쟁에서 어려운 점 중 하나는 판로 확보다. 그나마 두리화장품은 홈쇼핑에서 성공을 거둬 성장할 수 있었지만, 2006년 시작한 오프라인 시장에서는 대기업과 대형마트의 등쌀에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고 있다. 대기업은 대형마트에 납품하면서 다른 제품을 끼워팔거나 상대적으로 낮은 마진율을 감수하고, 대형마트는 이를 이유로 중소기업에도 더 낮은 가격으로 제품을 들여놓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조혜경 상무는 “지난 3월 이마트가 홈쇼핑에서 판매되는 제품을 낮은 가격으로 선보이라고 요구했다”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어서 오프라인 시장에서 큰 점유율을 차지하는 이마트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2006년 6월부터 제품을 납품해온 이마트에서 4년이 채 안 돼 철수한 것이다. 실제로 이마트에서는 두리화장품 제품을 현재 찾아볼 수 없다.
막걸리·상조업·석유판매업…사정은 다른 중소기업도 크게 다르지 않다. 스팀청소기를 처음 선보인 한경희생활과학 역시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시장에 뛰어들면서 1위 자리를 넘겨준 지 오래다. 수년간의 노력으로 제품을 개발하고 시장을 개척한 과실은 대기업이 진출하면 몇 년 안 돼 대기업에 넘어간다.
최근에는 막걸리·상조업 등에도 대기업이 진출하고 있다. 수십 년간 중소기업이 시장을 지켜왔지만 점점 시장이 커지자 대기업이 ‘군침’을 삼키는 것이다.
막걸리 시장은 중소기업이 지켜왔다. 홍석우 전 중소기업청장은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이유로 맛과 함께 중소기업이 만든 술이라는 점을 꼽았다. 막걸리 시장은 최근 크게 성장했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2008년 3천억원 규모이던 시장이 지난해 4200억원으로 성장했고, 올해도 55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오는 2012년에는 1조원 돌파가 점쳐진다. 반면 양주와 소주, 맥주 등 다른 술들은 성장이 멈춰 있다.
시장이 커지자 CJ제일제당, 농심, 오리온 등이 뛰어들었다. 진로, 롯데주류 등도 발을 담글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CJ제일제당은 전주 등 지역별 막걸리 업체 3~4곳과 계약해 7월부터 유통을 시작할 계획이다. 오리온은 자회사인 영화 투자·배급사 미디어플렉스를 통해 ‘참살이 탁주’를 인수했다. 농심과 샘표식품도 지난 3월 주주총회에서 정관의 사업목적에 ‘특정주류 판매업’ 또는 ‘주류 제조 및 판매업’을 넣어 조만간 시장에 모습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처럼 대기업이 뛰어들면 브랜드가 약한 지방의 막걸리 제조사들은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전남의 한 막걸리 업체 관계자는 “지역에만 막걸리를 팔다 최근 막걸리 열풍으로 서울에서까지 선보이고는 있지만, 대기업이 뛰어들면 우리 같은 영세업체는 지역에서조차 살아남기 힘들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올해 각 대기업이 발표한 사업보고서를 보면 상조업, 석유판매업, 커피자판기 시장에도 뛰어들 태세다. 삼성 계열사인 에스원은 올 초 ‘분묘 분양 및 장례 서비스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해 시장 진출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상조업은 중소기업이 터를 닦으며 6조원대의 시장으로 커졌다. 롯데쇼핑도 대형마트의 주유소 확대 운영 추세에 맞춰 석유판매업을 사업목적에 추가했다. KT 자회사인 KT링크스는 원두커피 자판기 보급사업에 뛰어들었다.
지난해부터 중소기업의 사업조정 신청 급증이처럼 대기업의 문어발식 시장 진출에 중소기업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지난해 7월부터 올 6월까지 중소기업이 낸 사업조정 신청이 200건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사업조정 신청은 대기업이 중소기업 시장에 뛰어드는 것을 막아달라고 정부에 요청하는 제도다. 2006년 4건, 2007년 4건, 2008년 4건 등에 그쳤던 사업조정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신세계·롯데·삼성테스코 등 대형 유통업체가 골목상권에 진출하는 기업형슈퍼마켓(SSM)을 막아달라는 요청이 164건으로 가장 많지만, 주유소·상조업·대형서점·레미콘·산업용재공구판매 등 요청 분야도 다양하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유현 정책개발본부장은 “글로벌 시장 진출에 힘써야 할 대기업이 중소기업이 키워놓은 시장에 막대한 자본력을 동원해 뛰어들어, 도산 우려가 나올 정도로 중소기업의 경영 악화를 불러오고 사회적 위화감까지 조성하는 행태는 개선돼야 한다”며 “정부가 대기업의 중소기업 시장 진출을 규제하는 것과 함께 대기업 스스로 새로운 기술로 새 시장을 개척하려는 기업가 정신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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