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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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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축구화를 찢어버릴 거예요” 엉엉 울었지만…

월드컵 기간에도 훈련하는 ‘3부 리그’ 부천FC 선수들의 사연…
돈·학벌·인맥의 경쟁에서 낙오해도 ‘축구는 나의 운명’
등록 2010-06-25 14:19 수정 2020-05-03 04:26

6월17일 저녁 7시40분, 조명탑에 불이 들어왔다. 해 질 녘 어스름에 갇혀 있던 선수들이 다시 생기를 찾는다. 50분 뒤면 한국-아르헨티나 경기가 시작될 것이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공원에 마을 나온 엄마들조차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 “얼마 뛰었다고 벌써 걸어다니냐.” 박영수(40) 코치의 호통 소리만 없었다면, 경기 부천시 오정공원은 그저 괴괴했을 것이다. 오정공원 인조구장 옆 도로에는 자동차 하나 없다. 어느 집으로 배달가는지 치킨집 오토바이가 쌩하고 지나친다. 배달에 바쁜 청년은 한 손으로 오토바이를 몰고 다른 손으로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액정화면을 들고 있다. 모두가 월드컵에 집중하는 밤, K3 리그의 부천FC 선수들은 패싱게임을 끝내고, 2 대 1 패스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
‘세오’로 통하던 베트남 리그 스타

월드컵 조별예선 한국-아르헨티나 경기가 열린 6월17일 저녁, 경기 부천시 오정공원 인조잔디구장에서 부천FC 선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둘러서서 파이팅을 다지고 있다.

월드컵 조별예선 한국-아르헨티나 경기가 열린 6월17일 저녁, 경기 부천시 오정공원 인조잔디구장에서 부천FC 선수들이 머리를 맞대고 둘러서서 파이팅을 다지고 있다.

“월드컵 볼래, 훈련할래?” 2주 전, 박 코치가 물었다. “훈련하겠습니다.” “조금 일찍 마칠 수도 있어.” “정상적으로 훈련하겠습니다.” 선수들은 너나없이 답했다. 매주 화·목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훈련이 있다. 마침 6월 셋쨋주 목요일 저녁 8시30분부터 한국-아르헨티나 경기가 있었다. 16강 진출을 가늠할 고비가 될 터였다. 그러나 마침 6월 셋쨋주 토요일 오후 3시엔 절대로 지면 안 되는 서울유나이티드와의 라이벌전이 있었다. 몸을 만들어야 했다.

월드컵 기간 내내 K리그(1부 리그)와 내셔널리그(2부 리그)는 경기를 하지 않는다. 오직 한국 축구의 3부 리그 K3 팀들만 축구를 계속한다. “프로야구도 계속하잖아요.” 부천FC 구단에서 상근하는 두 명의 직원 가운데 하나인 정민 팀장이 그 이유를 말해줬다. 월드컵과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곧잘 잊는다. K3 리그에는 18개팀이 있다. 3월부터 11월까지 경기 일정이 빡빡하다. 월드컵 중계를 꼬박꼬박 챙겨보는 사람과 월드컵 중계 시간에도 축구하는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축구를 좋아하는 것일까.

서울에 사는 서윤재(26) 선수는 연습 시간에 맞추느라 고생했다. 월드컵 중계를 보려고 서둘러 귀가하는 차량으로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그는 지난해 5월부터 인터넷 광고대행사에서 일하고 있다. 이력이라곤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한 것밖에 없지만, “운동선수의 끈기와 인내를 높게 산” 임원들이 그를 뽑아주었다. 그는 박주영을 좋아한다. 센스와 기교가 있기 때문이다. 박주영처럼 그도 ‘해외파’다. 박주영은 프랑스 리그에서 뛰고 있고, 서윤재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리그 출신이다.

대학 감독의 소개로 지난 2006년 “혼자서 무작정” 베트남에 갔다. “돈 들여 축구를 했으니, 단 한 번이라도 축구로 돈 벌고 싶었다”고 서윤재 선수는 말했다. 대학 시절 학기당 등록금 400만원에 축구팀 합숙비가 월 100만원이었다. 그는 낮에 축구하고, 밤에 돈을 벌었다. 이삿짐을 나르고 PC방에서도 일했다. 그렇게 축구를 했지만, 오라는 곳이 없었다. 박주영에게 프랑스가 꿈의 나라였다면, 그에겐 베트남이 그랬다. 1년6개월 동안 월 3천~4천달러를 벌었다. 생활비만 빼고 한국의 부모님에게 보냈다.

베트남 프로리그에서 그는 ‘세오’로 통했다. 식당에 가면 팬들이 알아보고 공짜로 밥을 사줬다. “베트남에 귀화해 올림픽에 함께 가자.” 소속 프로팀이 베트남 올림픽 대표팀과 연습경기를 한 날, 올림픽 대표팀 감독이 그에게 제의했다. 에이전트인 현지 교민은 더 큰 제안을 했다. 베트남 국방부 장관의 딸이 방송에서 ‘세오’를 보고 반했다. 그 딸은 ‘세오’를 만나고 싶어했다. 한국인 에이전트는 은근히, 그러나 끈질기게 만남을 종용했다. “장관을 사귀게 되면 평생 사업 길이 열릴 테니, 에이전트가 더 매달렸던 같아요.”

브라질 유학파, 갈 곳이 없었네

‘세오’는 장관의 딸을 만나지 않았다. 에이전트가 자신도 모르게 이적 서류를 꾸미고 시골의 한갓진 팀으로 옮길 것을 종용하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짧았던 프로 시절이 끝났다. 부천FC에서 ‘세오’는 미드필더, 스위퍼, 측면 공격수를 두루 맡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프로 선수에 대한 미련이 없지 않았지만, 올해부터 그런 생각은 접었다. 대신 축구 자체를 즐기려 애쓴다. “지금까지 축구 한 게 아까우니까 축구를 놓아야 할 때가 왔는데도 그걸 놓지 못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안쓰럽긴 하지만, 구태여 그들을 타이를 생각이 ‘세오’에겐 없다.

축구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심정을 김진동(24) 선수도 안다. 연습에 20분 늦게 도착한 그는 부천FC의 수비형 미드필더다. “축구에 배신당하는 일의 연속”이었다고 20대 중반의 청년은 제 인생을 회고했다. 그는 월드컵 대표팀의 윙백 오범석처럼 ‘브라질 유학파’다. 축구 유학 붐이 불던 2000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1시간 떨어진 곳의 축구 아카데미로 갔다. 브라질 아카데미에는 또래 한국인만 15명이 있었다. 한국인끼리 공을 찼다. “사기당했다”고 김진동 선수는 말했다. 2002년, 브라질 1부 리그 소속 프로팀의 유스아카데미로 옮겼다. 아시아 선수로는 유일하게 19살 팀에서 선발로 뛰었다. 브라질 대표팀 수비수 클레베르송과 연습경기도 뛰어봤다. 35분 동안 집중 마크를 했는데, 한국 출신의 19살 수비형 미드필더는 한 번도 공을 만지지 못했다. “함께 뛰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며 김진동 선수는 웃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감동받을 일이 별로 없었다. 실력을 쌓았으니 한국에 돌아오면 프로팀에서 뛸 수 있을 줄 알았다. 오판이었다. 세계 최강 브라질에서 기량을 인정받은 사실은 한국에서 통하지 않았다. 프로팀을 찾아가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인맥도 없고 학맥도 없으니,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안 되겠다. 대학에 가자.” 그는 브라질 유학 때문에 중·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었다. 1년간 검정고시를 준비해 고교 졸업장을 땄다. “학원에 가는 내 가슴도, 부모님 가슴도 너무 아팠다”고 그는 말했다. 2년제 대학의 축구팀에 들어갔다. 대학 감독은 “졸업만 하면 프로팀을 소개해주겠다”고 약속했다. 2년 뒤, 감독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겨우 실업팀을 소개받아 갔으나 “말도 안 되는” 여건의 팀이었다. 실업팀 합숙소를 며칠 만에 뛰쳐나왔다. 브라질 유학 3년 동안 매달 150만원 이상씩 송금해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축구화를 찢어버릴 거예요.” 전화기에 대고 그는 울었다.

매주 화·목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되는 훈련에서 선수들은 두 팀으로 나눠 연습경기를 한다. 실제 경기에서 선발로 나서려는 경쟁이 치열해 연습 도중 부상자도 나온다.

매주 화·목요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되는 훈련에서 선수들은 두 팀으로 나눠 연습경기를 한다. 실제 경기에서 선발로 나서려는 경쟁이 치열해 연습 도중 부상자도 나온다.

대학·K리그·J리그… 고비마다 실패

김진동 선수는 “브라질 유학파 가운데 선수로 성공한 경우는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오범석 등은 소속 프로팀의 후원을 받아 ‘단기 코스’로 브라질을 다녀온 경우다. ‘유학’이 아니라 ‘소속’이 더 중요하다. 소속이 없던 김진동 선수는 친구들과 술 먹고 놀러다녔다. “이 지긋지긋한 축구에서 벗어나야 내가 살겠다 싶었어요.” 주변 소개를 받아 지방 도시의 시청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부천FC에 입단한 것은 지난해 7월이다. 매주 한 번씩 있는 경기에 출전하면 5만원을 받는다. 그나마 출전 명단에서 빠지면 못 받는다. 경기에서 이기면 15만원을 받는다. 한 달 내내 8번의 연습에 빠짐없이 나오면 연습수당 10만원을 받는다. 왜 다시 시작했을까? 김진동 선수가 엄지와 집게손가락을 마주 붙이며 말했다. “요만한 미련이 남아 있더라고요. 그렇게 배신당했는데도 말이죠. 대신 현실을 직시하려고 하죠. 나는 K3 선수니까….”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가 말했다. “압박을 벗어버리니까 축구가 다시 즐거워졌어요.”

그가 한국에서 학교를 나왔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2 대 1 패스를 받아 무지개 모양의 센터링을 올리는 부천FC 공격수 정현민(26) 선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의 별명은 ‘원래 빨라’다. 서포터 게시판에 “정현민이 빠르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가 댓글을 달았다. “저 원래 빨라요.” 초등학교 때 육상선수였던 그는 대학 시절에도 100m를 11초에 끊었다. 측면 공격수 박지성처럼 그는 기교 대신 스피드로 상대를 제친다.

빠른 그는 고등학교 시절 수도권 대학 진학을 약속받았다. 축구에서도 2년제 대학보다 4년제 대학이, 지방대보다 수도권 대학이, 수도권 중에서도 서울에 있는 대학이 더 좋다. 경쟁이 치열하다. 전국 대회 8강 이상 들어야 4년제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다른 길이 없지는 않다. 정현민 선수는 ‘다른 길’을 찾은 다른 선수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당연히 그 대학에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사이에 누군가 돈을 써서 제 자리를 차지했더라고요.” 그는 부천FC에 들어오기 전까진, “좋은 스승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지방대로 진학했지만, 팀 성적은 좋지 않았다. 대학 때 성적이 좋아야 프로팀의 눈에 든다. 좋은 대학을 못 나오고, 팀 성적도 좋지 않으면, 선수 스스로 구단을 찾아간다. 구단 테스트를 받는 데도 학창 시절 감독의 추천이 꼭 필요하다. 감독의 힘이 클수록 입단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몇 주 또는 몇 달씩 머물면서 연습경기를 거듭한다. 정현민 선수도 K리그의 어느 팀에서 두 달간 연습했다. 입단 테스트를 통과하는 줄 알았는데, “나보다 실력이 못한 선수”가 선발되는 것을 보고 꿈을 접었다.

일본 3부 리그 팀에 가서 다시 테스트를 받았다. 2주의 테스트 기간 동안 함께 간 6명의 한국인 가운데 그만 남았다. 연봉 6천만원이 코앞에 있었는데, 그만 부상을 당했다. 왼쪽 발등이 찢어져 퉁퉁 부었다. 축구화조차 신을 수 없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단계마다 실패했어요. 어쩔 수 없었어요. 받아들여야죠. 원망도 많이 했어요.” “누구를 원망했나요?” “돈, 인맥, 학맥을 갖지 못한 나를 원망했지요.”

학창 시절, 그의 주변엔 그보다 원망할 게 더 많은 선수들이 있었다. 축구 선수는 두세 달에 한 번씩 축구화를 사야 한다. 금세 해지기 때문이다. “그걸 살 돈이 없어 고민고민하는 친구들이 있었죠. 그들은 결국 모두 도태됐어요. 다음 단계로 못 넘어가는 거죠.” 초·중·고 시절을 통틀어 그와 함께 축구를 했던 수많은 친구들 가운데 26살이 되도록 그라운드에서 뛰고 있는 것은 딱 한 명이다. “그 친구는 K리그 명문팀에서 연봉 5억~6억원씩 받으며 축구 해요.” 경기당 5만원씩 받는 정현민 선수는 ‘후반 조커’로 투입된다. 그는 월드컵 대표팀의 ‘후반 조커’ 안정환을 좋아한다.

왼쪽부터 부천FC 박영수 코치, 골키퍼 오경은, 공격형 미드필더 서윤재, 수비형 미드필더 김진동, 측면 공격수 정현민.

왼쪽부터 부천FC 박영수 코치, 골키퍼 오경은, 공격형 미드필더 서윤재, 수비형 미드필더 김진동, 측면 공격수 정현민.

“국가대표는 볼 사람 많잖아요” 3부 리그의 열성팬들

이들이 감격해하는 보상은 돈이 아니다. 격려다. 어둠이 깊어지자, 선수들이 편을 갈라 미니게임을 시작했다. 관중이 있었다. 부천FC 서포터였다. 친구와 함께 구장을 찾은 김혜민(27·가명)씨는 연방 사진을 찍었다. “조금 뒤에 월드컵 경기할 텐데, 그건 안 봐요?” 무슨 그런 질문이 있느냐는 표정으로 김씨가 답했다. “국가대표 경기야 나 말고도 볼 사람 많잖아요. 부천FC는 서포터가 아니면 관심 갖고 볼 사람이 없죠.” 그렇다고 연습경기까지 챙길 필요가 있을까. “코치님이 최근 미드필드 진용을 바꾸려 하는데, 그 실험 과정을 살필 수 있어요. 특히 목요일 연습경기를 보면 토요일 경기에 누가 선발로 나설지 예측할 수도 있고.”

어린이집 교사인 김씨는 오후 6시30분 일을 끝내자마자 저녁도 먹지 않고 연습장을 찾았다. 한 달에 두 번씩 연습경기를 구경하고, 부천에서 열리는 K3 경기도 꼬박꼬박 챙긴다. 그가 익명을 요구한 이유가 있다. “부천FC 서포터는 선수와 거리를 두는 게 좋다는 ‘철칙’을 갖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선수들과 친하게 지내는 게 좋거든요. 선수가 팀을 옮겨도 계속 응원하죠.” 월드컵 대표팀 수비수 조용형의 과거를 그는 알고 있다. 2005년 부천SK(부천FC가 생기기 전까지 부천을 연고로 했던 K리그 프로팀)에 입단한 신인을 김씨는 좋아했다. 그해 11월3일, 조용형 선수를 숙소 근처 고깃집으로 불러냈다. 다른 서포터 5명과 함께 조용형 선수의 생일잔치를 열었다. “용형이는요, 무뚝뚝해서 말로 표현을 잘 못해요.” 김씨는 조용형 선수와 동갑이다.

김씨의 분류법에 따르자면 부천FC 서포터의 ‘주류’라 할 만한 윤경택(42)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들의 자부심을 말했다. “경기 내용을 따진다면 유럽 축구 리그를 봐야죠. 유명한 선수들을 좋아한다면 K리그의 서울FC를 응원해야 하고. 우리는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아요. 이기는 걸 보려는 게 아니라, 우리 팀이 성장하는 과정을 응원하는 겁니다.” 부천FC 서포터인 ‘헤르메스’는 각 구단 서포터스 가운데도 가장 열성적인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붉은 악마 초대 집행부의 상당수가 헤르메스 출신이었다. 헤르메스의 응원 기법과 열정은 붉은 악마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이들은 요즘도 부천FC 경기가 열리면 100~300명씩 몰려와 응원한다.

“자, 지금 8시23분이다.” 평소보다 37분 일찍 훈련을 마친 박 코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한국-아르헨티나 경기 시작 전에 훈련을 마쳤으니, 원망하지 말라는 뜻이다. 스탠드에는 익명의 서포터가 주고 간 간식 봉지 20여 개가 놓여 있다. “우리 소중한 선수님! 오늘도 힘네세요.” 일일이 펜으로 메모를 써붙인 봉지에는 바나나, 박카스, 초콜릿이 들어 있다.

한 해 구단 운영비가 3억원인 부천FC는 지역 기업 30여 곳의 후원을 받고 있다. 선수들이 몸을 씻는 목욕탕, 경기 홍보물을 찍는 인쇄소, 함께 모여 맥주를 마시는 호프집 등이다. 저녁 9시, 한국-아르헨티나 경기의 전반전 막판 무렵에 ‘후원기업’인 동네 사우나에 선수들이 모였다. 최연장자인 오경은(38) 선수는 스코어를 보더니 화부터 냈다. “그러니까 이운재를 써야지.” 그는 대학 시절 이운재와 같은 방을 썼다. 둘 다 골키퍼였다.

‘후원기업’ 동네 사우나에서 월드컵을 보다

“분명히 내가 더 실력이 좋은데” 감독은 자꾸 이운재를 중용했다. 올림픽 대표팀에도 이운재를 보냈다. “다음에는 나를 보낸다고 해놓고, 2년 뒤 월드컵에도 운재를 보냈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 시절 대표팀 경력이 없으면 프로 구단에 들어갈 수 없다. 그는 홀수 학번의 비애도 말해줬다. 올림픽은 매번 짝수 해에 있으니 짝수 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면 대표팀에 선발될 기회가 더 많다는 것이다. 1992년 대학에 들어간 그는 짝수 학번이었지만, “살다 보면 운이 안 따르는 일이 있으므로” 결국 태극마크의 꿈도, 프로 입단의 꿈도 접었다.

운이 없어 이운재에게 밀린 그는 그러나, 이운재를 응원했다. “골키퍼는 구력인데, 왜 이운재 대신 정성룡을 쓰느냐”고 불만이 많았다. “그래도 첫 경기에선 정성룡이 선방했잖아요.” “아, 그럼 국가대표 골키퍼가 정면으로 날아오는 공도 못 막으면 되겠어요?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 아내는 매점을 운영하고, 그는 벽돌 장사를 한다. “축구만 하면 행복해지는” 그는, 그러나 초등학생 아들에게는 절대 축구를 시키지 않을 생각이다. “중학생만 돼도 한 달에 200만~300만원을 써야 해요. 내가 축구 할 때보다 10배 이상 돈이 더 들어가요. 축구 잘하는 사람 진짜 많지만, 그놈의 돈 때문에 중도에 하차하는 거예요.”

이들을 이끄는 박영수 코치는 구청 하수관리팀에서 일하고 있다. 하수구가 막히면 가서 뚫어준다. 아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는 “안쓰럽다”고 말하는 일이 있다. “직업에 귀천이 어딨어요. 나는 아무 상관 없어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박 코치가 말했다. 그는 부천FC 선수들이 동경하는 K리그에서 뛴 적이 있다. 부산 대우 로얄즈 시절, 주전 수비수였다. 이 구단 저 구단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 스포츠 신문에 “귀한 몸, 박영수”라는 기사가 나온 적도 있다.

그는 입단 직후인 1994년, 중국 프로리그 길림팀에서 뛴 적이 있다. 일종의 선수 임대 방식이었는데, 중국 동포로만 구성된 그 팀에는 북한 선수도 2명 있었다. ‘햇볕정책’이란 말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게다가 그해,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북 간 긴장이 높았다. 김일성 배지를 달고 있는 북한 선수가 어느 날 그에게 말했다. “우리 전쟁터에서 만나면 말이야. 서로 총 내리고 큰 바위 뒤에 숨어서 우리끼리 카드놀이나 하자고.” 나중에 그들은 냉장고와 TV를 버스에 가득 싣고 북한으로 돌아갔다.

6개월 만에 팀을 11위에서 3위까지 끌어올린 뒤 대우에 금의환향했지만, 경기 중 허리를 다쳤다. 1·2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1년을 보낸 뒤, 군대 문제도 해결할 겸 경찰청 축구팀에 들어갔는데, 제대를 얼마 앞두고 다시 같은 부상을 당했다. “운동을 그만하라”고 의사는 말했다. 결국 연봉 2천만원짜리 2년간의 프로 생활을 끝으로 축구를 정리했다. “그 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고 박 코치는 말했다. 액화석유가스(LPG) 충전소에서 일하다 가죽옷 장사를 했다. 2005년 구청에 취직하기 전까지는 직장인 축구팀을 운영하는 기계공장에 들어가 밀링머신도 만졌다.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축구를 했다. “힘들어하는 선수들에게 제 경험을 말해줘요. 여기에 안주하지 말고 더 높은 곳으로 가야 한다고 채찍질도 하고.” 그의 출전 수당은 선수들보다 더 적다. 얼마인지 묻자 박 코치는 웃었다. “그냥… 더 적어요.”

매번 연습 때마다 3~10명의 서포터가 구장을 찾아와 조용히 선수들을 살피고 돌아간다. 6월17일 저녁, ‘부부 서포터’가 간식을 준비해왔다. 이들은 연습경기가 끝난 직후, 간식만 남겨두고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

매번 연습 때마다 3~10명의 서포터가 구장을 찾아와 조용히 선수들을 살피고 돌아간다. 6월17일 저녁, ‘부부 서포터’가 간식을 준비해왔다. 이들은 연습경기가 끝난 직후, 간식만 남겨두고 ‘조용히’ 경기장을 떠났다.

2만2210명 중 오직 23명만!

2010년 5월 현재,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735개 초·중·고·대학·클럽 팀 선수는 2만2210명이다. 이들 가운데 오직 23명만 남아공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에 출전했다. 부천FC 선수들은 한결같이 “옛날보다 지금이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지만, 한국 축구의 현실은 돈·학벌·인맥 등이 얽히고설킨 잔인한 시스템에 속박돼 있다. 그래도 월드컵 16강 진출 여부가 한국 축구의 중대 문제일까.

오경은 선수는 정성룡 대신 이운재를 골키퍼로 내세우면 한국이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의 꿈은 벽돌 사업이 빨리 안정되는 것이다. 김진동 선수는 대표팀의 미드필더 김정우의 역습 차단 능력이 힘을 발휘하면 충분히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봤다. 그는 구청에서 일하는 틈틈이 축구 코치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포지션을 두루 소화하는 서윤재 선수는 세대교체가 완료된 이번 대표팀이 역대 최강이라고 낙관했다. 그는 베트남 장관 딸 대신 8년 동안 열애한 한국인 회사원과 결혼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정현민 선수는 부천SK 출신인 조용형이 대표팀에서 훌륭한 활약을 펼칠 것으로 기대한다. 부천FC가 더 좋은 성적을 내는 게 그의 꿈이다. 박 코치와 다른 선수들이 모두 함께 손잡고 2부 리그인 ‘내셔널리그’로 승격한다면 그는 정말 정말 행복해질 것이다. 2010년 6월 셋쨋주 현재, 7승2무2패를 거둔 부천FC는 K3 리그 A조 2위를 달리고 있다.



K3 리그란?
18개 팀 ‘투잡’ 선수들의 리그

K3리그는 2008년 출범했다. 처음엔 10개 팀이 참가했는데 올 들어 18개 팀으로 늘었다. K리그는 본격 프로팀, 내셔널리그는 실업팀으로 구성된 것에 비해 K3는 사실상 ‘투잡’ 선수들의 리그다. 프로나 실업팀에 선발되지 못한 선수가 모여 있다. 다른 직업을 찾아 생계를 해결하면서 축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국가대표급 선수’들만 가는 상무·경찰청에 가지 못한 젊은 선수들이 공익요원 등으로 근무하면서 K3에서 뛰는 경우도 있다.
구단별 연간 예산은 1억~5억원 정도다. “형편이 어려운 구단은 선수들에게 출전수당조차 못 준다”고 부천 FC의 정민 팀장이 말했다. 대부분의 선수가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므로 경기는 토요일에만 열린다. 지방 경기가 있으면 금요일 밤에 내려가 여관에서 1박을 하고, 토요일 경기 직후 다시 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강행군’이 이어진다.
K3팀에서도 내부 경쟁은 치열하다. “선발 출전 기회가 줄어들면 스스로 그만두기도 한다”고 정 팀장은 말했다. 부모의 사업을 물려받거나 보험 영업사원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일부는 직장인 축구팀이 있는 중소기업에 취직하기도 한다. 선수 출신을 뽑아 생산직에 배치한 뒤, 평소에는 남들처럼 일하고 직장인 축구대회가 있으면 선수로 출전시키는 경우다. 부천 FC 박영수 코치는 “그런 사람이 의외로 많고, 그것도 테스트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 중소기업, 지역 대학 등이 K3리그팀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지만, 2007년에 창단한 부천 FC는 순수 ‘시민 구단’이다. 이 팀의 정식 명칭은 ‘부천 FC 1995’다. 1995년은 PC통신 하이텔 사용자들이 당시 유공(부천 SK의 전신)팀을 응원하는 사이버 카페를 만든 해다. 2006년 K리그 소속 부천 SK가 제주도로 연고지를 옮기자, 지역 팬들이 자발적으로 ‘부천 FC 창단 모임’을 만들었다. 부천 FC는 태생적으로 서포터의 영향력이 강하다.
대한축구협회는 2012년부터 K리그의 하위팀이 내셔널리그로 강등하고, 내셔널리그 상위팀이 K리그로 승격하는 ‘리그 승강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이 제도가 마련되면 K3리그 상위팀도 내셔널리그로 승격될 것으로 부천 FC 구단은 기대하고 있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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