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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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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숨통 틔었네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공약 못 지켜 궁지에 몰린 일 민주당 정권, 천안함을 ‘변명거리’로 활용
등록 2010-06-04 14:24 수정 2020-05-03 04:26
일본 민주당 정권은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동아시아 안보 위기를 들먹이며 후텐마 기지 이전 논란을 잠재우려 한다. 5월4일 오키나와를 방문한 하토야마 총리(앞줄 오른쪽). REUTERS/ TORU HANAI

일본 민주당 정권은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동아시아 안보 위기를 들먹이며 후텐마 기지 이전 논란을 잠재우려 한다. 5월4일 오키나와를 방문한 하토야마 총리(앞줄 오른쪽). REUTERS/ TORU HANAI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한국의 천안함 침몰 사태는 7월 참의원 선거를 코앞에 두고 궁지에 몰려 있던 하토야마 유키오 일본 민주당 정권에 숨통을 틔워주었다.

지난 5월20일 한국 정부가 천안함 침몰 원인이 북한군의 어뢰 공격이라는 민·군 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를 발표한 시점은 하토야마 정권이 오키나와의 후텐마 미 해병대 비행장 이전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하는 시한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 하토야마는 지난해 8월 말 총선에서 후텐마 미군기지의 나라 바깥(국외) 이전이 안 되면 최소한 오키나와현 바깥(즉, 일본 영토 내 다른 곳) 이전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오키나와에서 자민당 후보들은 전멸했다.

오바마에 뒤통수 맞은 하토야마?

9월 집권 뒤 하토야마는 공약 이행 의지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행할 수 없었다. 미국은 2006년 자민당 정권과 합의한 내용을 지키라고 강력하게 압박했다. 후텐마 기지를 오키나와 동북쪽 나고시 인근 헤노코의 캠프 슈워브 해안 쪽으로 이전하겠다는 약속(‘2006 로드맵’)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자민당을 비롯한 정·관·재계 기득권 세력, 주류 언론이 동조하고 나섰다. 민주당 실세인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과 하토야마 총리의 정치자금 스캔들과 이에 대한 검찰 조사도 기득권층의 반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어쨌든 하토야마는 공약대로 후텐마를 최소한 오키나와 바깥으로 몰아내든지, 미국 쪽 압박에 굴복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 결정의 시한을 지난해 말까지로 했다가 다시 뒤로 미루길 거듭한 끝에 5월 말까지로 못박아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처지에 몰리고 있었다.

일련의 사태 뒤에는 오바마 미국 민주당 정권에 대한 하토야마 쪽의 계산 착오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오바마 정권은 신자유주의 및 네오콘적 무력·강압 외교를 앞세운 조지 부시 공화당 정권에 대한 미국 유권자의 환멸에서 비롯된 반사이익을 누렸다. 따라서 오바마 정권이 경제와 안보·외교의 발본적 전환을 꾀할 것으로 하토야마 정권은 예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냉전 붕괴 이후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한 오키나와 미군기지 이전 문제도 이미 시작된 해외 미군 재배치의 연장선상에서 논의가 가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지 않았을까. 호기롭던 하토야마의 신자유주의 반대와 ‘우애외교’의 기치는 미국 민주당 정권의 그런 방향 전환을 염두에 둔 것이었을 가능성이 짙다.

그러나 오바마 정권은 그런 쪽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부시 정권에 이어 오바마 정권에서도 국방장관이 된 로버트 게이츠를 비롯한 외교안보팀은 자민당과 약속한 ‘2006 로드맵’ 이행을 고집하면서 하토야마 구상을 정면으로 깔아뭉갰다.

민주당의 명운이 걸린 7월 참의원 선거

미국 정부의 완강한 태도로 집권 핵심 공약을 이행할 출구가 막혀버린 하토야마 정권은 당황했고,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채 머뭇거리는 사이 안보 불안 등을 앞세운 보수 기득권 세력의 반격이 거세졌다. 내각 지지율은 4월에 20% 초반대로 급락하더니 5월에는 20%선마저 무너졌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자금 스캔들과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경제 등 여러 난제가 얽혀 있으나,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 문제는 보수 기득권 세력과 거기에 동조하는 주류 언론의 정략적 이슈화로 민주당 정책 실패의 상징처럼 부각돼 있다.

7월 참의원 선거를 앞둔 민주당엔 비상이 걸렸다. 자민당 등이 거의 해체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어 대안 세력이 부재한 상황이 그나마 다행일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있고 패배하면 사민당 등과 연립한 하토야마 정권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린다. 참의원 선거에 올인해야 하는 하토야마는 민주당이 자민당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주요 정책을 유보시키면서 이런 상황을 얼버무리는 듯 보인다. 4월 초에 하토야마가 “다케시마(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다”며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자민당 이래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굳이 재확인한 것도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득권 세력이 충동질한 유권자의 보수 회귀 정서를 더는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치적 제스처였다.

이런 와중에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다. 후텐마 기지의 오키나와 바깥 이전계획 변경의 명분을 찾고 있던 하토야마 정권엔 천안함 사태가 절묘한 원군이 됐다. 처음에는 신중한 듯 보였던 하토야마 정권은 한국 정부가 주도한 합동조사단의 발표 뒤, △한국 정부 적극 지지 △대북 추가 제재 조처 △한·미·일 공조 강화 등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대북 강경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 미국과의 물밑 교섭을 통해 절충한 후텐마 기지에 대한 대안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 대안은 후텐마 미 해병대 비행장은 ‘2006 로드맵’대로 나고시 인근 헤노코의 캠프 슈워브 육상기지로 옮기고, 대신 헬기 훈련장 일부를 오키나와현 바깥인 일본 본토의 규슈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로 옮긴다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기지 부담을 일본 본토 현들이 조금 나눠가진다는 논리지만, 사실상 자민당이 약속한 로드맵의 부활이요, 미국에 대한 완전한 굴복이다. 이래서는 참의원 선거에서 제대로 싸울 수 없다는 불만이 민주당 내에서 불거지고, 연립 사민당 쪽도 절충안에 동의할 수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참의원 선거에 대한 정당 여론조사에서 자민당과 민주당이 역전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동아시아 안보 불안 강조

이 처참한 후퇴로 인한 타격을 그나마 어루만져줄 절호의 기회와 명분을 천안함 사태가 제공한 셈이 됐다. 지난 5월23일 절충안에 반발하는 오키나와 주민을 달래기 위해 오키나와에 간 하토야마는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봐도 알겠지만 지금의 동아시아 안전보장 환경에는 아직 불확실성이 상당히 남아 있다”며 “해병대를 포함한 주일미군 전체의 억지력을 현 시점에서 저하시켜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 다음날에는 “한반도의 긴장 상황이 미-일 동맹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후텐마 기지 이전 결정에 이런 여건이 적용됐다”고 말했다. “한반도의 긴장 상황이 하토야마 총리에게 회군에 필요한 좋은 변명거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 의 지적은 정곡을 찔렀다.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경우 하토야마는 집권 초기처럼 호기로운 독자 노선, 탈자민·탈미국의 ‘탈미입아’(脫美入亞)에 대한 희망을 되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그럴 가능성보다는 전통적인 미-일 동맹체제로의 복귀, 곧 미국에의 투항 가능성이 훨씬 더 커 보인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말부터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와 한반도 비상사태 가능성을 연결짓는 얘기가 나돌았다. 오키나와 미 해병대 기지가 괌으로 이전하면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일어날 때 한국이 곤란해진다는 한국 권부의 뜻이 일본에 전달됐다는 이야기가 일본 언론에 등장하기도 했다. 일본에도 천안함과 관련한 여러 의혹을 토대로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의 통킹만 사건 날조 같은 음모설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일본 정계의 대세는 그쪽이 아니다.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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