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벼랑끝으로… ‘파업 250일’ CBS 사태의 전말
6월7일 오후 3시께 서울 양천구 목동 기독교방송(CBS) 5층 엘리베이터 앞. 김준옥(38) 노조 사무국장과 권호경(60) 사장이 맞닥뜨렸다. 사무국장이 어정쩡하게 인사를 했으나 사장은 외면했다. 그리고 곧장 사장실로 들어가 방문을 쾅 닫았다. 언론노조 사상 초유인 9개월째 파업을 감행하고 있는 노조는 노조대로, 지난해 노조가 폭로한 충성화분·충성편지사건으로 상처를 입은 사장은 사장대로 지치고 날이 선 모습이었다.
99년 파업과 ‘총선축하 화분’사건
암울한 독재정권 시절 온 국민을 대상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던 CBS는 80년 언론통폐합 조처로 보도기능을 빼앗긴 뒤에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버텨낸 유일한 매체였다. 87년 10월 7년간 중단했던 뉴스의 재개를 알리는 아나운서의 떨리는 목소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CBS는 단순한 방송이 아니라 한국 민주화의 굴곡을 고스란히 함께 겪은 ‘오랜 벗’이기도 하다. 이런 CBS가 잇단 방송사고를 비롯해 녹음방송, 재방송 등을 거듭하는 최악의 방송파행 사태를 빚고 있다. 6월11일로 파업 250일째에 접어든 CBS 사태의 진실은 무엇일까.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CBS 노조는 처음 임금협상과 사장퇴진을 내걸었으나 이들의 파업은 어느덧 성역이 돼버린 교계정치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소속의 한 목사는 “권 사장을 대리인으로 내세운 채 자기쇄신 임무를 방기하는 재단이사회와 그런 재단이사회의 배경으로 버티고 서 있는 한국 교회의 모순이 가장 극단적인 버전으로 드러난 게 이번 파업사태”라고 규정했다.
표면에 드러난 CBS 사태의 발단은 지난해 권 사장이 민주당 김옥두 신임 사무총장에게 총선을 석달이나 앞둔 상황에서 ‘축 총선승리’라고 쓰인 화분을 보내면서부터다. 언론사 사장으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이유로 노조는 권 사장의 공식사과와 퇴진을 요구했다. 하지만 속사정은 좀더 복잡했다.
당시는 누군가 불을 댕기기만 하면 폭발할 정도로 권 사장에 대한 노조원들의 실망과 분노가 컸을 때였다. CBS 노조는 99년 봄 임금체불문제와 경영전략 부재를 이유로 33일간 이른바 ‘불법파업’을 감행했다. 그러나 노조는 회사쪽의 강경대응에 밀려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대신 권 사장은 노조쪽에 두 가지 약속을 했다. 정관개정으로 재단개혁을 이룰 것과 연말에 경영평가를 받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약속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회사는 “송신소 부지보상문제, 케이블TV 인수문제에 신경쓰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유로 약속을 파기했다.
이런 가운데 총선축하 화분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시 CBS 노조 민경중(38) 위원장은 사장과 독대해 “함께 물러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노조는 곧바로 CBS 살리기를 슬로건으로 내걸며 사장퇴진운동에 들어갔다. 인사난맥상과 경영무능을 비롯해 노조와의 약속마저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장이 용퇴하는 게 CBS를 살리는 첫걸음이라는 데 노조원들이 뜻을 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선승리 화분사건이 폭로돼 30년간의 민주화운동 경력과 정체성이 심각하게 훼손당했다고 느낀 사장은 그뒤로 노조를 대화상대로도 인정하지 않게 된다. 사장이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사이 노조는 몇 차례 더 사장과 마찰을 빚었다.
지난 2월1일에는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사장의 월급과 판공비를 공개했고, 보도국 기자를 포함해 직원 9명은 총선승리 화분사건에 대해 사과는커녕 해명도 하지 않는 사장에 대해 “권 사장의 부적절한 정치적 처신으로 언론인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피해를 봤다”며 1인당 1천만원씩 위자료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권 사장이 꿈쩍도 않자 노조는 YS에 보낸 충성편지 두건과 DJ에게 보낸 충성편지 한건을 잇따라 공개하며 사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노사 맞고소로 걷잡을 수 없이 악화
YS에 대한 낯뜨거운 찬사로 일관한 94년 8월17치 편지에 대해 권 사장은 몇 차례 말을 바꾸며 부인했고, 대북지원창구를 단일화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담은 96년 8월1일치 편지와 99년 DJ에게 CBS 노사갈등에 대한 회사쪽 입장을 설명한 편지를 보낸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문제가 된 첫 번째 YS충성편지에 대해서는 지난해 2월28일 공개당일 간부회의에서 전무를 통해 “쓰기만 하고 부치지는 않았다”고 해명했다가 3월2일 열린 확대비상간부회의에서는 “쓴 적도 본 적도 보내라고 지시한 적도 없지만 그 편지가 여비서 컴퓨터에 저장됐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급기야 노조가 파업에 들어간 뒤인 12월 재단이사회에 참석해서는 “99년 파업 당시 노조가 허위로 작성해 여비서 컴퓨터에 넣어두었다”고 ‘노조 음모론’을 들고 나왔다.
파업 전에도 노사 양쪽은 이미 명분싸움을 거쳐 감정싸움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을 보다못한 CBS 간부 36명 중 28명은 지난해 3월 중순께 “사장용퇴, 노조폭로 자제, 재단개혁”을 호소하는 연대서명서를 냈다가 주동자급으로 분류된 12명이 징계를 받고 부당전보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부국장급인 허미숙, 이재천, 윤병대, 문영복 부장은 정직 2개월 뒤 지방으로 좌천됐다. 이 사실에 발끈한 보도국 기자 58명 전원과 프로듀서 3명은 항의의 뜻으로 취재, 제작 거부에 들어갔고, 회사는 이들의 배후를 노조로 여기고 6월17일 노조위원장과 사무국장을 면직처리했다.
간부들이 지방좌천된 뒤 노사 분위기는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노조는 임단협 갱신을 위한 단체교섭을 회사쪽에 요구했다. 그러나 6월1일부터 석달간 17차례 회의를 열었으나 끝내 결렬됐다. 결국 노조는 법적 조정기간을 거친 뒤 지난해 10월5일 파업에 들어갔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사장과 노조간에 불신의 골은 깊어만 갔다. 급기야 올해 1월에는 지난해 폭로된 충성편지사건을 둘러싸고 상대방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게 된다.
왜 정관개정안은 1년 넘게 잠자는가
지난해 4월 노사대립이 극단적으로 치닫는 와중에 재단이사회는 이사 3명으로 구성된 수습대책위(위원장 김상근 목사)를 꾸려 부랴부랴 정관개정안을 마련했다. 노사 양쪽의 공통된 제안을 가려뽑은 이 정관개정안은 직원대표 세 사람이 참여하는 사장청빙제 도입, 전문이사 영입, 경영자문위원회 구성 등을 뼈대로 한다. 이미 99년부터 노사 양쪽에서 나온 이야기라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믿을 만한 전문스태프 하나 없이 사사건건 재단이사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권 사장으로서는 굳이 피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정관개정안은 전체 재단이사회 간담회를 거치고도 1년 넘도록 잠자고 있다.
이유가 뭘까. 노조쪽은 “이사들은 표용은 이사장을 중심으로 한 세력균형을 깨고 싶어하지 않고, 한편으로는 노조를 괘씸하게 여기는 사장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권 사장이나 회사쪽은 몇 차례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예민한 시기”라며 응하지 않았다. 당시 정관개정안을 만든 김상근 목사는 “이사회에서 보류하자거나 보완하자는 말이 공식적으로 나온 적은 없으나 아마도 ‘노조의 참여’가 확대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더이상 논의가 안 된 것 같다”고 답변했다.
수습대책위원이었던 이정일 목사는 “왜 통과되지 않았는지 나도 답답하다”며 “정식 이사회 통과가 돼야 하는데 사장이든 이사회에서든 아무런 답변이 안 나왔다”고 말했다. 또다른 위원인 김동완 목사(KNCC 총무)는 이틀간 10차례 남짓 전화통화를 시도했으나 연결되지 않았으며 비서, 부인, 운전기사 등에게 남긴 전화부탁 메모에도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결국 CBS 사태는 3대 메이저교단을 포함해 각 교계의 원로 중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벼랑 끝으로 몰려가고 있다. 노조는 6월18일로 예정된 단식농성에 기술진까지 포함한 전 조합원이 참여할 태세임을 분명히 했다. 명분으로 시작한 싸움이라도 감정싸움 단계를 거치면 실리싸움으로 옮겨져 해결되게 마련인데, 아직 노사 양쪽은 엄청난 출혈을 치르며 감정대립 단계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노조가 먼저 나섰다.
기장 소속의 한 목사는 “3개 교단이 핵심이 돼 각 교단 파송이사들로 구성된 CBS의 재단이사회는 독재 시절에는 CBS를 지키는 버팀목이었으나 이제는 자기 지분을 챙기는 무책임한 ‘명함자리’로 전락했다”고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단적인 예가 각종 이권사업에 개입하는 것으로 알려진 표용은 목사의 ‘장기집권’이다.
표 이사장은 77년 감리교 파송이사로 CBS에 온 이래 20년 넘도록 이사직을 맡고 있다. 또 재단이사회의 대표를 8년째 맡으며 CBS의 막후실세가 됐다. 이번 CBS 사태로 표 이사장에 대한 원성이 터져나왔지만, 감리교 총회의 한 관계자는 “소환은커녕 그 어른을 누가 건드릴 수 있겠느냐”며 표 이사장의 막강한 지배력을 암시했다.
이에 대해 민경중(38) 노조위원장은 “대부분의 이사들은 표 이사장의 힘에 눌려 자리지키기에만 신경쓸 뿐 CBS의 미래를 위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CBS 안팎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재단개혁을 위한 정관개정안이 1년 넘도록 낮잠자고 있는 상황은 현 재단이사회의 한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6월8일 오후 김준옥 노조 사무국장은 종로5가로 바삐 달려갔다. 문대골 목사(60·기장 교회와사회위원장)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CBS 노조는 6월3일 KNCC 회장이자 기장 총회장인 김경식 목사에게 중재를 맡기며 결과를 따르겠다는 합의서를 써준 바 있다. 김 회장이 불가피한 일로 독일 출장을 간 사이 중재전권을 위임받은 문 목사에게 노조의 입장을 설명하러 달려간 것이다.
노조가 전격적으로 중재요청서(합의서)를 써준 이유는 중재를 자처한 김경식 회장에게 권 사장이 ‘담보’를 요구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조쪽에서 먼저 중재결과를 수용한다는 합의서를 써주지 않으면 협상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노조는 지난 5월 방송위원회 중재가 권 사장쪽의 시간끌기로 무산된 일이 있어 망설였으나 전격적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기장 소속인 권 사장이 기장의 대표회장과 원로급인 교사위원장의 중재마저 거부하지는 않으리라는 한 가닥 기대 때문이었다.
“표용은 이사장이 자리를 만들어라”
중재를 맡게 된 문대골 목사는 권 사장과 유신 시절 이래 30년 동안 동고동락해온 민주화운동의 동지이다. 문 목사는 6월8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중재권을 위임받은 뒤 오히려 권 사장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권 사장과 두번 전화통화를 했으나 분명하게 이야기를 안 한다. 노조와 빨리 만나야 할 게 아니냐고 물으면 교섭권을 경총에 위임한 상태에서 무슨 중재냐고 대답한다. 권 사장이 먼저 요구했던 노조의 중재위임장도 먹히지 않는다.” 문 목사는 “권 사장은 김경식 회장과 노조가 다음에 더 요구할 뭔가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 같다”고 솔직한 느낌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정관개정안도 임금문제도 사실 따지고보면 기본적인 합의는 다 돼 있다”며 “어떻게 하든지 중재를 해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노사 양쪽이 감독기관인 방송위원회를 제쳐두고 ‘종로5가’를 염두에 둔 것은 그곳이 이번 사태해결의 유일한 열쇠를 쥐고 있는 동시에 사태의 근본원인을 제공한 곳이기 때문이다. 진보성향의 6개 교단으로 구성된 KNCC가 위치한 종로5가는 물리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힘을 키운 교계권력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CBS의 한 간부는 “CBS 사태 해결의 유일한 해법은 ‘종로5가’ 각 교단의 이해를 조율하는 표용은 이사장이 책임지고 자리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장이든 감리교든 예장통합이든 특정 교단은 중재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지만, 이번 사태의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세력균형이 깨질 경우 정관개정안이 유야무야됐듯이 또다시 무책임한 국면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간부는 “재단이사회와 사장, 노조간의 3자회동을 갖거나 방송위원회, 시민사회단체 대표를 포함해 5자회동을 갖고 그 자리에서 모든 문제를 꺼내 흉금을 터놓고 의논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라고 말했다.
“둘 사이에 막힌 담을 헐고 하나가 돼라”(에베소서 2장14절)는 성경말씀이 절실한 때인 듯하다.
김소희 기자 sohee@hani.co.kr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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