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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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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심삼일

미디어법 반대 표결 발언 뒤 사흘 만에 백기…
‘원칙주의’ 허물어져 대선주자 위상도 흔들
등록 2009-07-30 11:12 수정 2020-05-02 04:25

“도의를 위해서라면 결코 무리하게 남에게 인정받기를 바라지 않는다.”
이재오 전 한나라당 의원이 7월21일 자신의 트위터(단문형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틀 전 ‘미디어법 반대 표결’ 발언을 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를 겨냥했다는 해석이 당 안팎에서 쏟아지자, 이 전 의원은 곧 글을 삭제했다. 그랬다. 이 전 의원의 진의가 무엇이었든, 박 전 대표의 발언은 이런 해석을 낳기에 충분했다.

미디어법 직권상정 방침에 항의해 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장 출입문을 가로막은 7월22일 오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본회의장 대신 한나라당 원내대표실로 들어서고 있다. 직권상정에 반대했던 박 전 대표는 이날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날치기 처리하는 동안 기자들에게 “이 정도면 국민들께서 공감해주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헤럴드경제 정희조

미디어법 직권상정 방침에 항의해 민주당이 국회 본회의장 출입문을 가로막은 7월22일 오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본회의장 대신 한나라당 원내대표실로 들어서고 있다. 직권상정에 반대했던 박 전 대표는 이날 한나라당이 미디어법을 날치기 처리하는 동안 기자들에게 “이 정도면 국민들께서 공감해주시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사진 헤럴드경제 정희조

“(본회의에) 참석하게 되면 (미디어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박 전 대표의 7월19일 발언은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날치기 처리 과정에서 최대 변곡점이었다. 발단은 안상수 원내대표였다. 이날 오전 의원총회에서 안 원내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도 오늘 (의원총회에) 출석하지 않았지만, 표결에 참여한다는 전언을 받았다”고 했다. 그의 말을 전해들은 박 전 대표는 발끈했다. 측근 이정현 의원을 통해 “본회의 참석 여부를 말한 적이 없다”며 ‘반대 표결’ 의지를 드러냈다. 평소 박 전 대표의 스타일과 달리 극도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박근혜계 내부 균열이 ‘반란’ 재촉

국회가 술렁였다. 민주당 등 야당은 원군을 만난 듯 환영했지만, 한나라당은 진의를 파악하느라 허둥댔다. 이명박계의 한 의원은 “폭탄이 떨어졌다”고 표현했다. 박 전 대표가 미디어법을 빌미로 이명박 대통령에게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약발’은 사흘을 못 갔다. 박근혜계 안에서도 “당론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힘을 얻자, 김형오 국회의장은 마침내 7월22일 미디어법 직권상정을 강행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의장석을 에워싼 채 야당 의원과 몸싸움을 벌이는 한나라당 의원은 친이·친박을 가리지 않았다. 같은 시각 박 전 대표는 기자간담회를 열어 “이 정도(수정안)면 국민들께서도 공감해주시리라 생각한다”며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박 전 대표의 힘이 어디까지인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애초 그는 왜 ‘반란’을 일으켰던 걸까? 사실 미디어법은 ‘친이-친박’ 구도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다른 보수 세력과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에도 민주정부 10년과 지난해 촛불정국을 거치면서 쌓인 방송에 대한 피해의식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다. 또 족벌언론 출신 의원들은 계파를 떠나 ‘친정’의 이해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박 전 대표가 반대 표결이라는 ‘폭탄선언’을 한 것은 그가 극도로 초조함에 시달렸다는 증거고, 안 원내대표의 의원총회 발언은 잔뜩 부푼 풍선을 터트린 바늘에 불과했다는 풀이가 한나라당 주변에서 흘러나온다.

박 전 대표가 이렇게 흔들리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내부 균열’로 보인다. 이는 지난 5월 이명박계가 ‘화합책’으로 내민 박근혜계 김무성 의원의 원내대표 추대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시작됐다는 게 중론이다. 그 뒤 같은 박근혜계인 최경환 의원의 정책위의장 선거 출마를 ‘승인’했지만, 박근혜계 결집에도 실패해 47표밖에 얻지 못했다. 박근혜계는 혼란에 휩싸였다. “최경환은 되고, 김무성은 안 된다는 거냐. 이명박계에 협조하는 데 ‘원칙’이 뭐냐” 하는 불만도 터져나왔다. 이후 김무성 의원은 주변 인사들에게 “큰 틀에서 친박 범주를 벗어날 순 없겠지만, 이젠 나도 내 갈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몇 차례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친박 입각설을 놓고도 박 전 대표는 “선택받은 분이 개인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친박 대표로 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지만, 일부 의원은 여전히 장관 자리를 강력히 원한다.

“청와대, 박근혜 배제 전략으로 갈 것”

여권 일각에서 또다시 부상한 ‘충청연대론’도 박 전 대표의 초조함을 일으킨 한 원인으로 분석된다. 충청권 인사를 차기 총리로 앉히고 자유선진당 쪽에 일부 장관직도 내줘 ‘보수 대연합’을 이뤄야 한다는 주장은 여권에서 심심찮게 제기돼왔다. 이런 그림에 부정적이던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지난 7월 초 “정책 목표나 정치 상황에서 연대·공조한다면, 총리고 장관이고 하는 것은 좋다”고 태도를 바꾸면서 탄력을 받았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충청권 선거 연합을 하면 보수 정당이 이길 수 있다는 주장에도 공감대가 넓어졌다. 충청연대론이 구상대로 진행될 경우 이회창 총재는 차기 대선에서 ‘여당 지원을 받는 보수 후보’가 될 수 있다. 반면 독보적인 지위를 누렸던 박 전 대표는 그만큼 설 자리가 좁아진다. 논의를 지켜보기만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내부를 단속하고 정치적 위상을 과시하려던 박 전 대표의 ‘실력 행사’ 전술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대로 박 전 대표는 ‘힘 없는 소수파’로 물러나 앉을까?

박 전 대표 쪽은 “충분한 여야 협상을 전제로 여론 독과점을 막는 법이 돼야 한다는 원칙을 밝힌 것일 뿐”이라며 이번 사태를 둘러싼 정치적 해석에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박근혜계 안에서도 동요가 크다. 한 의원은 “이번 일로 대표한테 너무 실망했다”며 “미디어법 찬반 여부를 우리한테도 설명 안 한 채, 국면에 따라 혼자 왔다갔다 했다. 친박을 응집시키는 유일한 힘은 ‘원칙’인데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고 말했다.

이재오 전 한나라당 의원이 7월13일 중앙대 동북아 미래포럼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발제를 마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이 전 의원은 최근 9월 전당대회를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는 박근혜 전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왼쪽).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7월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여권 일각에선 한나라당이 이 총재와 손잡는 ‘충청연대론’이 박 전 대표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박종식·김봉규 기자

이재오 전 한나라당 의원이 7월13일 중앙대 동북아 미래포럼 국제학술대회에서 기조발제를 마치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 이 전 의원은 최근 9월 전당대회를 주장하며 이에 반대하는 박근혜 전 대표를 압박하고 있다(왼쪽).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7월7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여권 일각에선 한나라당이 이 총재와 손잡는 ‘충청연대론’이 박 전 대표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이라는 분석이 나온다(오른쪽). 사진 왼쪽부터 한겨레 박종식·김봉규 기자

청와대 기류도 심상치 않다. 최근 청와대 핵심 인사를 만난 한 중진의원은 “청와대가 박 전 대표에게 격노했다. 이젠 박근혜 배제 전략으로 갈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박 전 대표의 18대 국회 법안 찬반 내용까지 청와대가 따지고 있더라고 전했다. 18대 국회 들어 박 전 대표는 10개 법안 표결에 기권했는데, 1가구 다주택자에게 양도세를 완화해주는 소득세법 개정안, 은행법 개정안 등 대부분 이명박 정부가 중점을 두고 추진했던 것들이다. 청와대로선 “정부가 하는 일에 발목을 잡는다”며 이빨을 드러낼 만한 사안인 셈이다.

‘앙숙’과 다름없는 이재오 전 의원은 9월 전당대회(전대)를 주장하면서 박 전 대표를 자극하고 있다. 이명박계 정두언 의원도 7월24일 9월 전대론에 목소리를 보태며 “화합형 전대가 되면 참여할 뜻이 있다. 이번 기회에 박 전 대표도 방관자, 관전자에서 벗어나라”고 말했다. 9월 전대에 반대하는 박 전 대표를 ‘분열 세력’으로 몰아세우면서, 손쉽게 당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근혜계 “이대로 죽을 수밖에 없다” 탄식

7월23일 서울시당위원장 선거에서 중립·친박계의 지원을 얻은 권영세 의원이 이명박계의 지원을 얻은 전여옥 의원을 257표 차로 누르고 이김으로써, 이재오 전 의원 등의 9월 전대 주장이 실현될 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 권 의원은 중립 성향이지만 박근혜계와 가깝다. 전여옥 의원은 정몽준 최고위원의 측근이다. 서울시당위원장 선거를 앞두고 이재오 전 의원이 전여옥 의원을 지원하는 대신, 9월 전대를 위해 정몽준 최고위원이 박희태 대표 등 다른 최고위원들과 동반 사퇴하기로 했다는 ‘이재오-정몽준 밀약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전 의원이 지는 바람에 9월 전대론을 밀고 나갈 동력을 상당 부분 잃게 됐다는 게 신중론자들의 풀이다.

반대로 선거 결과를 계파 대리전 구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서울시당은 48개 당원협의회 가운데 30곳 이상이 이명박계로 분류되는 ‘친이계 텃밭’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결국 표심을 가른 결정타는 권·전 의원 개인에 대한 호·불호, 특히 박 전 대표·이명박 대통령·정몽준 최고위원 등으로 ‘말’을 갈아탄 전 의원에 대한 반대 정서였다는 해석이다.

이에 따라 9월 전대 주장은 더욱 거세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를 뒷받침하듯 이재오 전 의원 측근인 공성진 최고위원은 7월24일에도 “빨리 전대를 해서 새 지도부가 출범해야 근원적인 처방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또다시 9월 전대론을 폈다. 박근혜계에선 “청와대와 주류가 강하게 밀어붙이면 전대는 열리는 거다. 이재오가 나오면, 우리는 박 전 대표 말곤 대항마가 없는데 과연 박 전 대표가 나설까? 이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는 탄식이 터져나왔다.

주류의 ‘박근혜 밀어내기’가 더욱 노골화되면 끝내 박 전 대표가 탈당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지금의 박 전 대표는 2002년 한나라당을 나가 한국미래연합을 혼자 만들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치적으로 성장했고, 지지 기반도 넓어졌다는 논리다. 반론도 있다. 한나라당이 10월 재·보궐 선거와 내년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지고 나면, 당내 힘의 균형추는 자연스럽게 박 전 대표에게 쏠릴 것이므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라는 주장이다.

어쨌든 박 전 대표는 이번 사태로 ‘원칙 있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지난 7월20일 1천 명을 상대로 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64.6%는 박 전 대표의 ‘반대 표결 발언’이 “국민 여론에 따르는 온당한 처신”이라고 답했다. 심지어 한나라당 지지층에서도 긍정적인 평가가 43.5%로, 부정적인 평가(43.1%)와 팽팽했다. 하지만 미디어법 날치기에 동조한 뒤 여론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민주당 민주정책연구원이 7월23일 실시한 조사에서 응답자의 57.1%가 그를 “대세에 편승한 기회주의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원칙과 소신 있는 정치인’이라는 답변은 27.5%에 그쳤다. 조사기관이 다르고, 민주당에서 실시한 조사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박 전 대표가 이번 일로 대선주자로서의 위상에 타격을 받게 됐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결과다(두 조사 모두 자동응답전화(ARS) 조사, 신뢰수준 95%, 표본오차 ±3.1%p).

날치기 뒤 57%가 ‘기회주의 정치인’ 평가

이와 관련한 이준한 인천대 교수(정치학)의 해석은 들어봄직하다. “현안 대부분에 의견을 밝히지 않는 박 전 대표가 오랜만에 의지를 표명한 것인데, 그게 며칠 만에 바뀌었다. 유권자가 보기엔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지지층의 신뢰마저 흔드는 행위다. 박근혜계 의원들과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청와대에선 그를 밀어내려는 일종의 청사진을 그려놓고 하나씩 밀어붙이는 느낌인데, 박 전 대표는 방심했던 것 같다. 이번 일을 계기로 내부 조직을 정비하고, 노선을 재점검하지 않으면 타격은 상당히 오래갈 수 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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