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년6개월간 국회에서 느낀 건 오직 무력감과 절망감이었다. 오직 숫자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여당 앞에서 야당의 존재가 이렇게 깡그리 무시된다면 우리는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없다. 정치를 오래 한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뒤 의회민주주의가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우려를 갖게 됐다. 이건 총칼 없는 독재와 다를 바 없다.”
우윤근 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한나라당의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 직후 같은 당 의원의 줄사퇴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요약했다.
정세균 민주당 대표(왼쪽에서 두 번째)가 7월24일 의원직 사퇴서를 던졌다. 아울러 민주당은 이날 의원직 총사퇴를 전격 결의했다.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대볼 수 없는 여야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사진 한겨레 김봉규 기자
때이른 봄날 목련이 지듯, 그들은 의원직을 던졌다. 임기를 채 3분의 1도 채우지 않은 시점이었다. 정세균 대표는 7월24일 오전 의원직 사퇴서를 던진 뒤 굵은 눈물을 흘리며 국회를 떠났다. 같은 날 오후 천정배 의원이 “민주주의와 야당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정권하에서 내가 국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며 사퇴서를 냈다. 전날 최문순 의원도 금배지를 반납했다.
남아 있는 민주당 의원도 거의 대부분 의원직 사퇴서를 정세균 대표에게 맡겼다. 의원 사퇴서를 중간에서 전달한 우윤근 원내수석부대표는 “60명, 70명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실제로는 거의 전원이라 할 수 있는 80여 명이 의원직 사퇴서를 정 대표에게 일임했다”고 말했다. 개인의 소신이 달라 사퇴 의사를 밝히지 않은 한두 명을 제외하면, 거의 전원이 의원직 총사퇴 결의에 동참했다는 설명이다.
민주당이 의원직 총사퇴 카드를 꺼내든 이유는 현 국면에서 딱히 선택할 만한 다른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가 임박한 상황에서 민주당은 일찌감치 의원직 총사퇴 카드로 배수진을 쳤다. 한나라당을 압박하기 위한 카드였지만, 거대 여당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민주당에는 퇴로가 없었다. 김현 민주당 부대변인은 “2003년 최병렬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의 특검 거부 철회를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할 때 노 전 대통령은 현장 방문을 계획했다”며 “반면 이명박 정권은 야당과 국민을 무시하는 외통수 정치로 일관했다”고 말했다.
민주당 의원직 총사퇴 결의에 대한 정치권 외부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정치컨설팅업체 이윈컴의 김능구 대표는 “민주당이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 직전 의장석을 먼저 점거하지 않은 것은 여당과의 협상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라며 “반대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민주당과의 대화와 타협을 일절 거부한 채 직권상정 표결 처리를 강행했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민주당은 의원직 총사퇴 결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다.
고원 상지대 학술연구교수의 의견도 같다. 고 교수는 “민주당이 일상적인 장외 투쟁을 검토했을 수도 있지만 여야의 토론과 합의가 모두 봉쇄된 현 시점에서는 우유부단한 선택으로 비쳤을 것”이라며 “대화와 타협 대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회라면, 남은 것은 의원직 총사퇴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이 의원직 총사퇴를 공식 결의함에 따라 정국은 이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민주당의 의원직 총사퇴 수순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는 유동적이다. 민주당은 정 대표에게 사퇴서 처리를 일임했다고 하지만, 정 대표는 결정을 미루고 있다. 정 대표는 7월24일 기자회견에서 “사퇴서 처리를 포함해 모든 의사결정은 이명박 정권과 싸워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관점이 기준이 될 것”이라고만 밝혔다.
민주당과 정세균 대표가 사퇴서 제출 여부를 고민하는 이유는 복잡하다. 우선 실제로 사퇴서를 김형오 국회의장에게 던진다면, 그때부터 칼자루를 쥐는 쪽은 김 의장과 여권이 된다. 민주당의 핵심 당직자는 “당장 사퇴서를 김형오 의장에게 던져준다면, 그때부터 저쪽이 우리 사퇴서를 어떻게 활용할지 알 수 없게 된다”며 “어느 날 덜컥 수용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선별적으로 수용하거나,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때”라고 밝혔다.
김 의장이 민주당으로부터 전달받은 의원직 사퇴서를 즉각 수용하기란 어렵겠지만, 언론 관련법 직권상정을 강행했던 전례에 비춰본다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민주당의 의원직 사퇴서에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국면 전환을 시도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민주당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게 된다.
민주당이 의원직 사퇴서를 일괄 접수하지 않는 두 번째 이유는 의원직 총사퇴 카드가 아직 대여 압박 수단으로 유효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이미 국회의장에게 사퇴서를 제출한 천정배·최문순 의원과 민주당 지도부의 생각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쉽지는 않겠지만 한나라당이 지금이라도 언론 관련법 처리 원천무효를 주장하는 민주당과 대화를 시도한다면, 의원직 사퇴서 제출은 그만큼 연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의원직 사퇴서 제출은 민주당의 투쟁에 대한 국민 여론과도 맞닿아 있다. 언론 관련법 강행 처리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될 예정이다. 우선 민주당은 7월25일 서울광장 집회를 시작으로 8월 한 달간 전국을 5개 권역으로 나눠 시국대회를 열 예정이다. 또 ‘국민 속으로, 언론악법 폐기 100일 대장정’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버스투어, 거리홍보전, 1천만 명 서명운동, 촛불문화제도 진행한다. 이와 별도로 언론 관련법 원천무효를 위한 법적 투쟁도 함께 이뤄질 예정이다. 장외 투쟁을 통해 언론 관련법의 부당성을 집중적으로 알리는 한편, 법적 투쟁으로 무효화를 꾀하는 ’투트랙’ 전술인 것이다.
1차적 관건은 민주당이 장외 투쟁을 통해 얼마나 많은 대중과 결합하느냐 하는 점이다. 최대한 짧은 기간 내에 국민으로부터 폭넓은 이해를 구하지 못한다면 민주당의 투쟁 동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라면 민주당은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의원직 사퇴서 제출을 더 이상 미루기 어렵게 된다. 물론 반대의 경우라면 급해지는 쪽은 한나라당이 된다. 장외에 있는 민주당을 국회로 불러들여야 하는 것이다.
의원직 총사퇴를 결의함으로써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정치 생명을 건 싸움을 시작했다. 승패의 윤곽은 이르면 8월께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김능구 이윈컴 대표는 “민주당이 장외 투쟁의 동력을 8월과 9월까지 끌고 갈 수만 있다면 10월 재보선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10월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4월 재보선과 마찬가지로 다시 수도권의 승리를 얻어낸다는 것은 곧 정국 주도권이 여권에서 민주당 등 야당 쪽으로 쏠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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