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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노래를 부르면 조·중·동은 춤을 추네

미네르바의 표현의 자유와 시민권 박탈에 앞장선 수구언론들…
<조선일보>는 ‘장자연 리스트’ 사태 맞자 이중적 태도로 돌변

제758호
등록 : 2009-04-29 14:07 수정 : 2009-05-0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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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해석’의 놀음이라면 기사는 ‘야마’(기사의 주제와 문제 설정 정도를 뜻하는 언론계의 일본말 은어)의 놀음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법이 해석 과정에서 타락해버린 실태를 겨냥한 약자들의 절규나 저주다. 언론에서 야마는 팩트(사실)를 비추는 거울이다. 평면거울일 수도 있지만 볼록거울이거나 오목거울일 때도 많다.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의도적일 때도 많다. 정치 검찰은 자의적인 법 해석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하고 비뚤어진 언론은 자의적인 야마를 통해 진실을 왜곡한다. 둘 다 틀과 방향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사실을 꿰어맞추는 것도 닮았다. 그런 탓인지 둘은 궁합까지 잘 맞는다.

‘미디어 공공성 확보를 위한 사회행동’ 한국진보연대 등 100여 개 시민사회언론단체 회원들이 4월20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호텔 <조선일보> 현판 앞에서 ‘장자연 리스트’에 언급된 언론사 대표의 이름을 공개한 국회의원들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조선일보>를 규탄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종수 기자

자의적인 ‘야마’ 통해 진실 왜곡하는 언론

검찰이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체포했을 때, 조·중·동은 부창부수, 아니 청출어람이었다. 무단으로 전봇대에 기어오른 잡범을 연상시키는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미네르바를 잡아들여 졸지에 국사범의 반열로 끌어올린 것이 검찰이라면, 조·중·동은 그 국사범의 학력과 직업 등 개인정보를 열심히 들춰 3등 시민의 꼬리표를 붙인 뒤 체제 밖으로 추방했다. 외신들이 미네르바 체포·구속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바라볼 때, 한국의 대표 신문을 자처하는 조·중·동은 이런 식으로 야마를 잡아 미네르바에게서 표현의 자유와 시민권을 자의적으로 박탈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국격’이 덩달아 추락했다.

미네르바의 실명을 처음으로 보도한 곳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는 그 선구적 행위를 경기 서남부 연쇄살인 피의자 강아무개씨 보도에서도 그대로 이어갔다. <중앙일보>와 함께 강아무개씨의 실명은 물론 얼굴 사진까지 최초로 공개한 <조선일보>는 피의자의 개인정보 공개 논리를 미네르바 보도 때보다 한층 가다듬었다. ‘알 권리’와 ‘공익’을 위한 선택이라고 했다. 그러나 연쇄살인 피의자의 얼굴은 사회적 약자 누구에게도 실체적 보상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살인범의 범죄 행각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수사당국의 무능을 은폐했고, 청와대와 경찰청 사이에 오간 ‘보도지침’을 통해 드러났듯이 용산 참사의 들끓는 여론을 덮기 위한 맞불 구실을 했다.

미네르바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지난 4월20일 풀려났다. 그는 구치소에서 <중앙일보>와 옥중 서면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얼굴 사진을 공개하도록 한 적이 있다. 체포 직후 사생활이 모두 까발려진 상태에서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 사진 한 장은 보호받아야 할 개인정보가 아니라 언론의 개인정보 보호를 상징하는 면죄부로만 기능할 뿐이다. 그가 얼굴 사진 공개에 동의한 것이 영웅 심리에 의한 것인지 체념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로써 그의 얼굴 사진은 개인정보 보호 대상에서 벗어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알 권리와 공익을 위해 개인정보를 가장 앞서 공개한다던 <조선일보>가 언론 가운데 유일하게 그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다.


연쇄살인범은 공개하고 미네르바는 비공개?

몇 달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선일보>의 ‘야마’가 180도 선회한 것일까? <조선일보> 관계자는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호의적인 보도를 많이 하지 않은 매체이기에 얼굴 공개에 동의를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마음대로 얼굴을 공개하면 명예훼손에 걸릴 수 있다고 봤다”고 밝혔다. 강아무개씨의 얼굴 공개에 대해서는 “사안이 다르다. 형이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증거와 자백이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네르바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그것뿐이었을까? <조선일보>가 개인정보에 대한 태도를 뒤집은 시점은 미네르바 석방보다 앞선다. 장자연 리스트 보도 때부터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지난 4월6일 국회에서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일보> ○사장을 술자리에 만들어 모셨고, 그 후로 며칠 뒤에 <스포츠○○> ○사장이 방문했습니다’라는 글귀가 있다. 보고 받았느냐”고 물으며 신문사 실명과 대표자의 성씨를 공개하자, 조선일보사는 경영기획실장 명의의 공문을 이 의원에게 보내 법적 대응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 언론사들에도 “근거 없는 허위 사실을 보도하거나 실명을 적시, 혹은 특정할 수 있는 내용을 보도하는 것은 중대한 명예훼손죄에 해당된다”며 “본사와 임직원의 명예를 손상하는 행위가 발생하면 엄중한 법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 뒤 ‘<○○일보> ○사장’과 ‘해당 언론사’는 유행어가 됐다. 그러나 언론들이 아무리 실명을 가려도 이미 소년은 행차하는 국왕에 대고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친 뒤였다. 오히려 <조선일보>는 발빠른 대응을 하다가 스스로 빈칸 세 자리를 채워넣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조선일보>도 장자연 리스트 안에 <조선일보> 고위인사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나섰다. 김대중 고문의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의 문제’라는 칼럼은 동화가 끝난 이후 벌거벗은 임금님의 그로테스크한 대처 방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압권 중의 압권이었다.

“이것이 터무니없는 모함과 모략, 그리고 그에 편승한 권력적 게임의 소산으로 밝혀지면 그것을 주도하거나 옮기거나 음해한 측 역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대중 고문은 ‘확정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익명 보도의 규범을 언급하고 있는 듯하지만, 메시지의 본질은 으름장이었다. 개인정보와 명예의 가치를 가장 먼저 쓰레기통에 처박은 것은 정작 <조선일보>이기에 자신의 문제에 대해 아무리 특정한 원칙을 강조하더라도 그건 야마를 잡아 장난치는 궤변일 뿐이다. 모순되는 야마 사이에는 어떤 해명도 없다.

정치적·상업적 이해 따른 입장 바꾸기에 불과

보도 규범에서 ‘알 권리’와 ‘개인정보’의 관계는 언제나 논쟁적이다. 인권 변호사인 정정훈 변호사는 ‘<○○일보> ○사장’의 규범을 인정하면서도, 이 익명성이 구체적인 실명을 밝히는 것보다 해석을 풍부하게 하는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반면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는 언론사 대표가 자살한 연예인으로부터 성 상납을 받았는가는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공익적 사안이라며, ‘오로지 공익을 위한’ 진실 공개는 명예훼손보다 우월적 가치라고 강조한다. 언론이라면 마땅히 이 두 규범적 가치를 놓고 매 순간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입장 바꾸기는 이런 태도와 아무 관련이 없다. 그저 자기 본위의 로맨스다. 오로지 자사의 정치적·상업적 이해에 따라 이중 잣대를 휘두르며 카멜레온처럼 본능적으로 변색할 뿐이다. 오늘도 <조선일보>는 자신만의 ‘야마 놀음’으로 세상을 마음껏 재단하며 저널리즘을 욕보이고 있다. 이것은 실명으로 공개할 수 있는 확정적 사실이다.

안영춘 <미디어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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