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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교과서, 바꾸나 마나

일선 학교장들 연수 뒤 선정 재고 지시… ‘검정’끼리는 비슷하고 교과 자체의 시한이 2년
등록 2008-11-21 11:51 수정 2020-05-03 04:25

“우리는 왜 금성 를 쓰는 거죠? 다른 교과서도 한번 검토해보세요.”
11월11일, 서울 중랑구의 한 고등학교. 수능을 이틀 앞두고 정신없는 중에 이 학교 교장이 역사 교사 5명을 모아놓고 말했다. 하루 전인 10일 서울시교육청이 연 ‘균형 잡힌 근현대사 교과서 선정 관련 고등학교장 연수’를 갔다온 뒤다.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은 이날 “특정 교과서는 편향성 논란이 지속되는데, 방치할 경우 미래 세대에게 편향된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며 “각 학교에서 균형 잡힌 교과서를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기 서울시교육청 교육과정정책과장은 “11월30일까지 재선정하면 교과서를 바꿀 수도 있다”고 재선정 시한까지 언급했다. 이 학교 홍아무개 교사는 “교장 선생님이 전날 연수에서 들은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서 바꿔보는 게 어떤지 검토해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정권 교체 뒤 갑자기 태도 바꿔

11월10일 서울시교육청은 <한국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250여 개 학교 교장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공정택 교육감은 “미래 세대에게 건강한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교과서를 바꾸라”고 권고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11월10일 서울시교육청은 <한국근현대사>를 선택과목으로 택한 250여 개 학교 교장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공정택 교육감은 “미래 세대에게 건강한 국가관과 역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교과서를 바꾸라”고 권고했다. 한겨레 박종식 기자

그러나 각 학교의 내년 교과서 주문은 지난 9월8일 종료됐다. 초중등교육법의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에 따라 1학기 사용 교재는 6개월 전까지 주문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상황이 끝난’ 판에 규정까지 무시하면서 교육청이 재주문을 요구한 것은 교육과학기술부의 ‘결단’ 때문이다. 교과부는 10월30일 교과서를 출판한 4개 출판사에 55개 항목을 고칠 것을 권고했다.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모여 만든 교과서포럼,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의 등 각종 단체 등이 2005년 이후 끈질기게 교과서 수정을 요구할 때마다 교과부는 “검정 절차를 거친 교과서에 대한 억지 논란”이라며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랬던 교과부가 뉴라이트 세력이 지지했던 이명박 정권이 출범하면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이다.

수정 권고 55개 항목 중 38개 항목은 금성출판사에 몰려 있다. 금성판 는 교과서포럼이 집중 공격해온 교과서다. 교과서포럼은 지난 9월 A4용지 44쪽에 달하는 ‘금성 교과서 수정 요구 보고서’를 교과부에 제출했다. 금성출판사 교과서는 현재 근현대사 교과서 시장에서 점유율이 가장 높다. 1716개 고등학교 중 889개 학교(51%)가 금성 교과서를 사용한다. 2009학년도 채택률은 더 높다. 1688개 학교 중 902개 학교가 금성 교과서로 이미 주문을 끝냈다. 이 때문에 이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들의 고민만 깊어졌다. 송원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장은 “교장 임명권은 교육감이 쥐고 있기 때문에 교장들은 교육청의 요구를 외면할 수만은 없다”며 “당장 학교운영위원회를 소집해 재선정을 안건에 올리고 강행하는 학교들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요지경’처럼 굴러가는 교과서 재선정 사태 앞에서 현장 교사들은 황당해하고 있다. 금성 교과서로 수업을 하는 서울 숙명여고 김희관 교사는 “교과서를 선택할 때 이념적 잣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검정교과서인지라 6종의 내용적인 면은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 △보기 좋은 편집 △풍부한 사진과 도판 등 보충자료 △창의적인 학습 활동 등이 선정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오금고 남정임 교사 역시 “아이들이 얼마나 과목에 흥미를 가질지 고려해 금성 교과서를 고른 것뿐인데, 뉴라이트의 ‘좌편향’ 논쟁에 휘말려 교사의 교재 선택 자율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말했다.

수정권고안 “부사 빼라, 표현 넣어라…”식

여러 무리와 변칙을 무릅쓰고 교과서를 바꾼다 해도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별반 없다. 선택과목인 는 모두 검정교과서다. 일반 출판사가 교과용 도서를 연구·개발하고, 국가가 이에 대한 적합성 여부를 심사해 채택한다. 국정교과서에 비해 다양성이 인정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교과부가 정한 ‘교육과정’과 ‘집필상의 유의점’을 가이드 라인으로 삼아 작성된다. 출판사가 개발한 교과서는 다시 교과부가 만든 ‘한국근현대사 검정기준표’에 따라 심사된다. 주진오 상명대 교수(한국근대사)는 “교육과정에는 목차, 각 단원이 포함해야 할 내용, 서술 방향 등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집필자가 발휘할 수 있는 재량의 틀이 그리 넓지 않다”고 말했다.

교과서 논란 자체가 학교 수업과 동떨어져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태호 교사(의정부광동고)는 “수정권고안을 보면 부사 몇 개를 빼라 넣어라, 일부 표현을 빼라 넣어라 등 첨삭 지도 수준이 많은데, 교과서를 성전처럼 보면서 자구 하나하나를 외우고 밑줄 긋는 시대는 오래 전의 일”이라고 말했다. 김 교사는 “다양한 자료를 만들어 수업하는 과정에서 교과서 역시 하나의 수업 도구로 활용될 뿐이고, 학생들도 암기가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놓고 토론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지금의 수정 권고안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얘기다.

윤종배 전국역사교사모임 회장은 “이미 금성 교과서뿐 아니라 다른 교과서도 ‘미흡한 친일 청산’ ‘6·25전쟁 당시 양민 학살’ 등에 대한 토론을 학습활동으로 제시하는 등 금성 교과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굳이 금성 교과서만 논란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가장 많이 채택한 교과서를 주요 논쟁거리로 삼아, 지난 10년간의 정권을 부정하려는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현재 고등학교 선택과목인 는 7차 교육과정이 끝나는 2010년까지만 유지된다. 당국의 ‘권고’를 따라 이 교과서를 저 교과서로 바꾼다 해도 고작 2년 동안만 사용하게 된다. 2011년부터는 부분이 고등학교 1학년 공통 필수과목인 에 포함된다. 지금 당장의 실효도 없고 장차의 실익도 없는 셈이다. 교사와 학생들로선 이 난리굿판이 어리둥절할 뿐이다.

더 큰 문제는 그 다음이다. 2011년 과목이 새로 생기면서 필수과목의 경우도 국정 교과서 체제에서 검정 도서 체제로 바뀐다. 여러 학자들이 참여하는 여러 가지 교과서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논란은 집필자들에게 ‘자기 검열’ 장치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자구 하나하나로 이렇게 시비를 붙이는데 이제부턴 교수들이 어지간하면 논쟁이 되지 않는 무미건조한 방식으로 쓰려고 할 것”이라며 “그렇게 되면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정에서 검정으로 역사 교과서를 전환한 의의가 상실된다”고 말했다.

좋은 집필진 찾기도 힘들어

좋은 필진을 찾는 데도 어려움이 있다. 주진오 교수는 “이번 시비를 지켜본 교수들이 ‘바쁘다’ 는 이유를 대며 집필 참여를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금성 교과서 집필진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역사교육)도 교과서 집필에 참가하지 않기로 최근 마음을 굳혔다. 김 교수는 “내 전공이 역사교육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교과서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많은데, 이제는 지쳐서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잃었다”고 말했다. 결국 엉뚱한 이념 논쟁 때문에 ‘좋은 교과서’ ‘배우기 쉬운 교과서’를 쓸 수 있는 집필자들이 손을 떼고 있는 것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교육 현장으로 돌아간다. ‘이념 논쟁’으로 인해 역사 교육 전체가 퇴보할까봐 교사들은 걱정이 많다. 윤종배 회장은 “역사 수업은 자유롭게 토론이 오가는 역동적인 시간이어야 하는데, ‘올바른 국가관’ ‘건강한 역사의식’이라는 미명하에 하나의 역사적 해석만을 강조하려는 움직임이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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