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장악의 첫 시험대, 구본홍 사장 반대로 굳게 단결한 노조원들…조·중·동의 인수전이라는 또 다른 시련도
▣ 이태희 기자hermes@hani.co.kr
6월17일 저녁, 서울 남대문 YTN 사옥 앞으로 낯익은 얼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YTN의 기자와 앵커 등 임직원들이었다. 100여 명 남짓 모인 이들은 상당수가 입사 10년차 안팎의 젊은 세대들이었다. 손에는 촛불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들의 머리 위로 ‘제1회 공정방송 사수·구본홍 사장 선임 저지 YTN 집회’라는 걸개막이 펄럭거렸다. 짙어가는 어둠에 촛불이 발갛게 타오를 즈음, 참가한 이들은 이란 민중가요을 합창하기 시작했다.
“이제 끝났다”에서 기수별 성명으로
YTN의 상징 프로그램인 을 맡고 있는 임장혁 기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 저희 곁을 지나는 국민 여러분들께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여기에 모인 것은 YTN을 지켜달라고 부탁드리고자 함이 아닙니다. YTN은 저희들의 힘으로 지켜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들께는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 음모를 저지해달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다만,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 음모 저지의 첫 승리는 YTN 사장의 선임을 막아내는 것이란 것을 말씀드립니다. 막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YTN 기자들 옆에서 함께 촛불을 들고 있던 수십 명의 시민들이 촛불을 흔들며 화답했다.
YTN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YTN 기자와 앵커들은 왜 거리로 나섰을까. 사태의 중심에는 구본홍 YTN 사장 내정자가 있다. 구 내정자는 문화방송 보도본부장 출신으로, 지난해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 캠프의 언론특보로 활동했다.
현덕수 YTN 노조위원장은 “지난 4월 초부터 YTN 신임 사장에 구본홍씨가 내정됐다는 설이 돌기 시작했다”며 “사장 선임 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특정인이 사장에 내정됐다는 말이 도는 것은 누군가의 점지를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YTN 내부 정보보고망에는 이때부터 구본홍 전 문화방송 보도본부장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보고들이 잇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방송가에서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구 내정자의 배후에 있다는 설이 정설처럼 굳어져갔다.
노조는 객관적인 사장 선임을 위해 사장추천위원회(사추위)를 구성하자고 주장했다. 5월9일 이 제안대로 사추위가 구성됐다. 공모 마감일인 5월23일까지 모두 7명이 응모했다. 구본홍씨와 강갑출 YTN라디오 상무, 배석규 CU미디어 고문, 김관상 전 YTN 보도국장 등이었다. 사추위는 이들에 대한 면접을 거쳐 최종적으로 구본홍씨를 단수 사장 후보로 선임했다. 5월29일 이사회는 7월에 열릴 주주총회에 구씨를 사장 후보로 올리기로 의결했다. 구본홍씨 사장 만들기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노조는 이사회가 열리던 당일 이사회장을 점거했으나, 이사회는 시내의 한 호텔로 옮겨 절차를 강행했다. 회사 내에서는 “어쩔 수 없다. 이제 끝났다”는 패배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6월 초에 구본홍 내정자가 “업무보고를 받고 싶다”는 뜻을 회사에 전해왔다는 설이 돌기 시작했다. 내정자 신분을 넘어 사장 업무를 개시하겠다는 뜻으로 임직원들은 해석했다. YTN의 한 기자는 “이때 보도국에서는 누구누구가 구 내정자에게 줄을 대기 시작했다, 구 내정자가 이미 인사안을 마련하고 있다는 등의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노조가 움직였다. 노조는 6월5일 ‘공정방송 사수, 구본홍 저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변경했다. 공채 기수별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6월11일 공채 2기(1994년 9월 입사) 60명이 처음으로 성명을 냈다. 2기는 “수많은 위기와 도전에 응전하며 여기까지 지켜온 회사가 ‘정권의 찌라시 방송’으로 전락할 처지가 됐다”고 규탄했다. 이들은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언론특보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만들기에 온몸을 바쳤던 구본홍씨가 왜 사장으로 와야 하는가.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정권을 잡은 집단이 전리품을 나눠먹는 일일 뿐”이라고 했다. 다음날 3기(1995년 5월 입사) 20명이 성명을 냈다. 6월19일에는 1기(1993년 입사)와 4기(1996년 1월 입사)가 동시에 성명을 냈고, 6월20일에는 74명의 차장단이 성명을 냈다. ‘구본홍 사장’이 현실화된 이후에 있을지도 모를 인사상의 불이익을 각오하고 나선 일이다.
가 인수 실사 벌인다는 소문도
이들은 왜 구본홍 사장에 반대할까. 바로 정권의 방송사 장악 ‘도미노’를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현덕수 노조위원장은 “정부는 대선캠프에서 활동했던 이들을 잇따라 방송사 사장단으로 선임함으로써 방송 장악에 나서고 있다”며 “현재 가장 최전선에 있는 것이 YTN이고, YTN이 넘어가면 정부의 방송 장악은 더욱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1기들은 성명서에서 “YTN 사장 인선은 이명박 정부 방송정책의 리트머스 시험지다. 언론의 독립이 지켜질 것인가, 언론 길들이기가 시작될 것인가 가늠하는 잣대다”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도미노는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던 최시중씨를 방송통신위원장에 임명하면서 시작됐다. 선대위 방송특보였던 이몽룡씨는 스카이라이프 사장에, 특보 출신인 정국록 전 진주문화방송 사장은 아리랑TV 사장에 선임됐다. 방송특보단장이었던 양휘부 전 방송위 상임위원은 한국방송광고공사 사장을 차지했다. 현재 도미노는 언론특보 출신인 구본홍 내정자가 YTN의 사장으로 내정되는 단계까지 왔다. 다음 수순은 현재 한국방송 후임 사장으로 이름이 거론되는 김인규 전 한국방송 이사(이명박 후보 캠프 방송전략실장 출신)가 한국방송에 입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화방송의 엄기영 사장도 버티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문화방송 사장 출신인 최문순 통합민주당 의원은 “대선캠프 언론특보 출신을 방송사 사장으로 임명하겠다는 발상은 전두환 정권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라며 “이는 방송사를 권력이 ‘사유화’하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른바 ‘이명박 방송’을 만들겠다는 논리라는 것이다.
YTN 노조는 6월20일 저녁에도 구본홍 사장 내정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노조원들은 6월 중순부터 청와대 앞에서 구본홍 사장 내정 철회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하고 있다. YTN의 한 차장급 기자는 “처음에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이 지배했던 보도국 분위기가 뭉치면 막아낼 수 있다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며 “외환위기 이후 모처럼 임직원 전체가 단결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1990년 방송 총파업으로 민주화를 이뤄냈던 한국방송과 문화방송의 전례를 2008년 YTN이 이어갈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파고를 넘더라도 YTN에는 또 다른 거대한 시련이 예상된다. 바로 조·중·동의 인수전이다. 한나라당은 신문사가 방송사를 겸영할 수 있도록 방송법과 언론관계법을 고칠 예정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의 김유진 사무처장은 “신문·방송 겸영이 허용되면 조·중·동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산규모가 적고 뉴스 콘텐츠의 상호 교환으로 시너지 효과가 높은 보도전문 채널 인수전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며 “이런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 바로 YTN”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초 방송가와 증권가에선 가 YTN 인수를 위한 실사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까지 돈 적도 있다.
현덕수 YTN 노조위원장은 “한나라당이 신문·방송 겸영을 허용한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자칫 여론의 독과점을 심화시킬 수 있는 신문·방송 겸영에는 충분한 토론을 통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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