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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날 사고뭉치라 불렀다

등록 2008-04-25 00:00 수정 2020-05-03 04:25

성추행당한 뒤 ‘사병을 땅에 파묻었다’고 과장 보도된 여군 대위 “의심의 눈초리 때문에 군생활 접어”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지난 2003년 7월, 한 엽기적인 사건이 언론에 소개됐다. 한 여군 대위가 자신을 성추행한 병사를 ‘땅에 묻었다’는 얘기였다. 남성 사병이 여성 장교를 성추행한 것도 문제였지만, 가해자를 땅에 묻어버린 여군의 행위에 초점을 맞춘 선정적이고 희화화된 보도들이 쏟아졌다. 성추행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혹행위 가해자인 여군은 어떻게 됐을까? 부하를 땅에 묻을 정도로 ‘무서운’ 여군이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한 군 관계자는 “군에서 여군을 어떻게 다루고 성과 관련한 사고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며 이 사건의 주인공을 취재해볼 것을 권했다.

간부들의 태도가 돌변

“정말로 여기까지 오셨네요? 사실 딱히 할 말도 없지만, 이렇게 보게 돼 반가워요. 하하.”

지난 4월14일 저녁 경기 성남시 분당의 한 식당에서 사건의 주인공인 ㅁ(36)씨가 호탕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았다. 2006년 6월에 전역했으니 이제는 ‘군대 물’이 빠질 법도 했지만, 시원한 목소리에 화통한 태도는 영락없는 현역 군인의 그것이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당연히 평생을 군인으로 살 것이라고 생각했죠. 군에 들어간 뒤 단 한 번도 전역을 생각해보지 않고 살았거든요. 하지만 그 사건 뒤 많은 게 변했죠.”

옛날 생각에 잠겨 말을 잇던 그의 얼굴에 언뜻 회한에 찬 쓴웃음 같은 것이 지나갔다. 우선 당시 사건에 대해 할 말이 많아 보였다.

“목공병이던 병장이 밤중에 내가 묵고 있는 천막을 찢고 들어왔는데, 제가 잠귀가 밝다보니 금방 깨어나 ‘누구냐’고 소리쳤죠. 사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어요. 부대 일(동해선 연결 공사)이 너무 바빠 정신이 없었고, 솔직히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고함소리를 듣고 달려온 일직사관에게 ‘그냥 놔두라’고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그 병장이 도망치며 줄에 걸려 넘어지고 웅덩이에 빠져 옷을 버리는 바람에 금세 잡혀버린 거예요. 기왕에 잡혔으니 그냥 넘어가면 부대 기강이 무너지는 만큼, 한번 혼내고 넘어가려고 했죠. 마침 다음날 부대 안 장교 전원이 공사 현장에 투입되는 바람에 인사과장인 내가 직접 그 병사를 불러 혼을 내게 됐는데, 솔직하게 답을 안 하고 짝다리를 짚는 등 태도가 불량했어요. 그래서 땅을 파라고 시켰죠. (웃음) 물론 가혹행위이고 잘못된 일이죠. 하지만 당시 우리 둘 사이에는 사건을 헌병대에 신고해 공론화하지 않는 대신 그 수준에서 정리하고 넘어간다는 암묵적인 약속 같은 게 있었거든요. 실제 묻은 깊이도 무릎 정도에 불과해서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나올 수 있었고….”

하지만 일은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사병을 ‘묻었다’는 소문이 퍼졌고, 며칠 만에 헌병대가 찾아왔다. 이어 언론에 사건이 보도됐고, 병사가 구속됐다. ㅁ씨 또한 가혹행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하지만 정작 마음고생은 다른 지점에서 시작됐다.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고 ‘어, 내 얘기네’라고 혼자 웃을 정도로 처음에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징계도 감수할 수 있었고요. 내 잘못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평소 잘 지내던 부대 (남성) 간부들의 태도가 돌변한 거예요. 사건이 불거진 뒤로는 모든 게 내 책임이라는 식으로 등을 돌리고 험담을 했어요. 심지어 ‘평소에도 술을 잘 마시고 어디서는 춤도 추고 다니더라’는 식으로 여성으로서의 행실을 문제 삼기도 했죠. 부대와 무관한 내 개인적인 일로 처리돼야 부대와 다른 간부들에게 피해가 없을 테니까요. 지금은 다 이해하지만 당시엔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8~9년을 오직 군만을 알고 살아온 결과가 이런 것인지, 배신감이랄까….”

ㅁ씨는 결국 근신 10일 징계를 받고 다른 부대로 전출됐다. 하지만 새 부대에서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편제에도 없는 보직을 주며 ‘(사고뭉치인 너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 했다고 한다. 남성 상관들 대다수는 ‘성추행 피해자’로서의 처지는 생각하지 않고 ‘사고친 여군’이라는 선입견으로 그를 대한 것이다. 결국, ‘무슨 일을 해도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그런 상황을 참을 수 없던 그는 군생활을 접겠다는 뜻을 주변에 알렸다.

군악대장 스토킹, 비일비재한 일

이렇듯 자의 반 타의 반 10년여에 걸친 군생활을 정리하게 된 그였지만, 그 사건 전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여군이었다. 임관 1~2년 선배들과 보직을 경쟁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고, 여군 가운데 최초로 전투부대 중대장을 지냈다. 그가 전투부대 중대장직을 마친 뒤 화학병과와 통신병과에서도 여군 중대장들이 나왔고, 보병에까지 이런 바람이 확산됐다. 그를 취재할 것을 권한 군 관계자는 “남녀를 불문하고 그 기수 공병 가운데서는 톱을 달리던 여군”이라며 “솔직히 공병부대에서 잘못한 병사를 각목으로 때리거나 다리 정도까지 땅에 묻는 일이 처음 있었던 일이겠냐. 여성이라고 더 주목받고 불이익을 겪은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순탄치 않은 군생활을 한 때문인지 그는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여군 군악대장 스토킹 사건’에 대해서도 “사실 특별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 “군이 편향되게 일처리를 한 것이지만, 그런 일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다만 사건이 그런 식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나름대로 분석을 내놨다.

“군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나지만 제대로 조사가 될 수 없어요. 조사하는 사람도 군인이면, 당연히 군에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깔고 접근할 수밖에 없거든요. 심지어 여군이 조사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또 군인 대다수는 ‘상관의 지시는 모두 명령이고 그것을 안 따르면 항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성 부하가 절대적으로 불리할 수밖에 없어요. ‘지휘체계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가장 큰 전제가 있으니, 상관은 처벌 안 하고 넘어갈지언정 명령을 따르지 않은 부하는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처벌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회한에 찬 군생활이었지만 군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전역한 뒤 남편과 함께 살게 됐고, 평생 꿈이었던 유럽 배낭여행도 넉 달이나 다녀왔어요. 그래서 지금 행복해요. 하지만 내 천직은 군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물론 군이라는 조직을 아직 사랑해요. 군에 나쁜 상관도 많지만, 정말 좋은 사람들이 더 많거든요. 그리고, 사회에도 나쁜 사람들은 많더라구요? (웃음) 그래서 군이 너무 매도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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