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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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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비상구, 부동산 백지신탁

등록 2008-03-07 00:00 수정 2020-05-03 04:25

국가가 실수요 증명 못하는 부동산 처분하는 제도… 2005년 법안 제출됐으나 유야무야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이종찬 기자rhee@hani.co.kr

이명박 정부의 초대 내각을 구성할 예비 국무위원들에 대한 투기 의혹이 절정으로 치닫던 2월26일 오전 세종로 정부청사 후문 근방에서 20개 시민단체들로 이뤄진 토지정의시민연대 주도로 기자회견을 겸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대 맨 앞열의 펼침막과 시민단체 회원들의 손에 들린 팻말은 투기 혐의자의 사퇴와 함께 ‘고위 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을 촉구하고 있었다.

고위 공직자 원죄 덜어줄 수 있다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 주장을 시민단체들의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만 치부하기엔 장관 후보자들의 과거 부동산 거래 실태에서 빚어진 문제가 너무나 심각했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건물을 두 채에서 다섯 채씩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데다 전국 곳곳에 무더기로 땅을 사놓은 경우도 있어 투기 의혹에 휩싸였다. 소유주가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절대농지를 불법·변칙적으로 보유한 후보도 있었다. 몇몇 후보들이 자진 사퇴 형식으로 낙마했지만, 후임 인사들의 행적 또한 대차 없을 것이란 게 세간의 관측이다.

과거에 저질러진 장관 후보들의 다양한 투기 행태 이상으로 걱정을 낳는 대목은 미래의 정책 왜곡 가능성이다. 전국 곳곳에 부동산을 대거 보유한 이들로 꾸려진 내각이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온전히 벗어나 공정한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투기 의혹에 대한 장관 후보들의 황당한 코미디성 해명은 그같은 1차원적 의심을 거두기 어렵게 했다. 자기 땅에 노골적으로 혜택을 안겨주는 식의 결정을 내리지는 않는다 해도 투기 의혹에 따른 원천적인 신뢰 상실 탓에 부동산 정책의 공정성 시비는 원죄처럼 두고두고 따라다니기 십상이다. 토지정의시민연대는 부동산 백지신탁제로 이런 의심과 원죄를 어느 정도 덜어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토지정의시민연대에서 제안한 부동산 백지신탁제의 골격은 고위 공직자 및 직계 존·비속 소유의 부동산 가운데 ‘실수요’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부동산은 별도 국가기구에 백지 상태로 처분을 맡기도록 하자는 것이다. 곧바로 강제 처분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퇴직 때 백지신탁된 부동산의 시가와, 매입가의 원리금 중 낮은 금액으로 돌려주도록 하면 ‘백지’ 위임의 의미를 살릴 수 있다고 토지정의시민연대는 밝힌다. 남기업 토지정의시민연대 협동사무처장은 “이렇게 되면 백지신탁자는 불로소득의 상당 부분을 포기하게 되기 때문에, 과거의 행위가 투기가 아니었다는 구차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또 취임 뒤 정책의 공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있으며 부동산 불로소득은 안 된다는 강력한 신호를 시장에 보내는 효과도 있다고 남 처장은 덧붙인다.

고위 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 제안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에도 이 사안을 둘러싸고 한 차례 논란이 벌어진 바 있다. 당시 선도적으로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을 주장한 주체 역시 토지정의시민연대였다. 김윤상 경북대 교수(당시 토지정의시민연대 공동대표)가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 방안은 그해 4월 토지정의시민연대 주최 토론회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남기업 처장(당시 토지정의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부동산 투기를 한 고위 공직자의 사퇴라는 인적 청산도 필요하지만, 제도 개혁이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며 한시적 대책으로 “부동산 백지신탁 입법화”를 주장했다. 이헌재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강동석 건설교통부 장관, 최영도 국가인권위원장이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줄줄이 사퇴한 직후인데다 홍석현 당시 주미대사가 부동산 투기 혐의로 궁지에 몰려 있던 때였다.

‘실소유’ 기준 정하기 어렵나

토지정의시민연대 토론회에서 제안된 부동산 백지신탁제를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이는 지병문 열린우리당(현 통합민주당) 의원이었다. 지 의원은 당시 토론회에 참석해 “고위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기 위해 한시적 대책으로 부동산 백지신탁이 필요하고 또 근본적 대책으로 토지 불로소득이 환수돼야 한다는 발제자의 주장에 찬성한다”고 밝혔으며, 그해 6월 부동산 백지신탁제 실시를 규정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토지정의시민연대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예전과 똑같은 주장을 외치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지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 개정안은 열매를 맺지 못했다.

지 의원의 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기 전부터 정치권에선 여야 할 것 없이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에 찬성을 표시했다. 잇따라 터져나온 고위 공직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부글부글 끓고 있던 유권자들의 분노를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4월 국회 대표연설에서 “주식은 물론 부동산까지 포함하는 ‘자산 백지신탁제도’를 반드시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도 주거용이나 선산, 업무용 사무실 등 실수요를 뺀 ‘잉여 부동산’을 위탁기관에 맡긴 뒤 공직 재임 기간에 매매를 금지하는 백지신탁 방안을 내놓은 상태였다. 이처럼 여야가 모두 부동산 백지신탁제 도입에 강한 의지를 보였음에도 실제론 아무런 진척을 보이지 못했던 건 무엇 때문일까?

부동산 백지신탁제에 반대한 정치권과 학계 일각에선 주로 법적·기술적 난점을 근거로 들었다. 백지신탁에 따른 자산의 처분 방식이 사유재산권 침해라는 위헌 시비로 이어질 수 있고, 백지신탁 여부를 판단하는 ‘실소유’의 잣대를 명확히 정하는 게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것이었다.

지병문 의원은 “(2005년에 발의했던) 그 법 개정안은, 부동산을 소유한 과정을 소명하지 못할 경우만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며 위헌 논란을 일축했다. “부동산 취득 과정에서 법을 위반했는지 소명할 기회를 줬는데, 못한다면 불법을 했다는 얘기다. 더욱이 그런 부동산을 팔아서 원금과 법정이자까지 지급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재산권 침해라고 볼 수 없다.” 실소유 여부를 판단하는 기술적 난점에 대해선 “생존과 거주의 목적”으로 어렵지 않게 분별할 수 있다고 지 의원은 밝힌다. 농민 아닌 사람이 논을 사고, 자기 거주 목적 없이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매입하는 게 투기 아니면 뭐냐는 것이다.

김윤상 교수는 “법적·기술적 난점이 일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관건은 의지와 결단의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백지신탁제의 의미를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불로소득 환수 장치를 확실히 갖추는 디딤돌을 놓게 된다는 것이다. 부동산 매입 원가에 기간 경과에 따른 법정이자만 얹어주고 나머지는 국가에 귀속하는 백지신탁제의 도입에 따라 불로소득 환수의 당위성을 굳힐 수 있다는 것이다. 백지신탁제는 또 공직 후보의 인재풀을 보호하고 공직자들을 투기 의혹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백지신탁제를 도입하면,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취득한 게 아니다’는 해명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과거의 행태와 미래의 결정 모두에 대해 떳떳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후보 시절 동의

지난해 7월21일 제주 문화방송 스튜디오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선 후보들의 첫 TV 합동토론회에서 부동산 백지신탁제가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다. 원희룡 후보가 이명박 당시 대선 후보에게 “공직자 부동산 백지신탁 제도와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한 강력한 환수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은 것이다. 이 후보는 이에 “부동산 문제에 대해 환수 같은 급격한 정책보다는 시장경제 원리에 맞게 과세하는 게 옳다”고 밝히면서도 “백지신탁 제도는 동의”한다고 답변했다. 그로부터 7개월 만에 청와대에 입성한 이명박 대통령의 지금 생각은 어떨까? 부동산 백지신탁제에 동의한 후보 시절의 발언은 ‘진심’이었을까?



5월말에 법안의 생명도 끝나

부동산 매각해 취득 가격에 법정이자 더한 금액 지급하도록 규정

고위 공직자의 ‘부동산’을 백지신탁하도록 한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은 2005년 6월 지병문 열린우리당(현 통합민주당) 의원 대표 발의로 제출된 뒤 빛을 못 보고 지금도 국회에 계류돼 있다. 국회는 앞서 그해 4월 고위 공직자의 ‘주식’만 백지신탁하는 쪽으로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한 터였다.
지 의원의 법 개정안은 고위 공직자의 재산 등록 때 본인과 배우자, 직계 존·비속들이 소유한 부동산에 대해 ‘실수요’임을 해명하게 하고, 해명을 하지 못한 부동산은 (가칭)‘부동산백지신탁위원회’에 처분을 맡기도록 하고 있다. 고위 공직자가 소유한 부동산의 실수요 여부는 행정자치부에 9인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부동산백지신탁심사위원회’가 거주 또는 생산에 활용되는지를 잣대로 판단하도록 했다.
개정안은 또 백지신탁된 부동산은 신탁계약 체결 60일 안에 매각해 취득 당시 가격에 법정 이자를 더한 금액을 지급하고 나머지 매각액은 국고에 넣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공직 취임 이전에 매입한 부동산의 가격이 크게 올랐다고 하더라도 투기로 땅을 샀다는 논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는 취지다.
지 의원은 법 개정안에서 “토지 불로소득을 용인하는 현재의 제도 아래에서는 고위 공직자가 재임 중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사퇴할 가능성이 상존할 뿐 아니라 고위 공직자가 직무상 알게 된 정보를 이용한 탈법적인 부동산 거래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는 것을 방지할 수 없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부동산 백지신탁제 법안의 생명은 5월 말 17대 국회의 임기 종료와 함께 끝난다.






2% 부족한 주식 백지신탁

직무 관련성 주식 3천만원 이상 보유하면 매각하거나 백지 상태 위임

부동산 백지신탁제 논란은 자연스레 고위 공직자 주식 백지신탁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주식 백지신탁제는 2005년 4월 공직자윤리법 개정으로 도입돼 올해로 시행 2년을 넘긴 상태다. 대상 공직자는 재산 공개 대상자(1급 이상)를 비롯해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의 4급 이상 공직자 가운데 ‘직무 관련성’이 있는 주식을 3천만원어치 이상 보유하고 있는 경우다. 상장 주식은 시가, 비상장 주식은 액면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직무 관련성 여부의 판단은 행정자치부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에서 맡고 있다.
해당 공직자는 대상 주식을 매각하거나 금융회사에 백지 상태로 위임함으로써 그 주식의 운용에 대해 간섭할 수 없게 된다. 직무 관련성이 없는 주식은 보유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현대중공업 주식 21.3%를 그대로 쥘 수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정 의원은 2005년 주식 백지신탁제 도입 뒤 소속 상임위를 과학기술정보통신위에서 통일외교통상위로 옮기는 방식으로 주식 백지신탁제의 ‘직무 관련성’ 조항을 피했다.
행자부 윤리심사팀 관계자는 “주식 백지신탁제 도입 뒤 대상자들은 대부분 관련 주식을 매각 처분하는 선택을 했다”며 “현재 중앙 행정부처에서 주식을 백지신탁한 고위 공직자는 없다”고 말했다. 행자부 쪽은 그러면서도 주식 백지신탁제의 구체적인 실태나 수치는 공개하지 않았다.
현행 주식 백지신탁제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다는 지적이 제도 시행 전부터 제기돼왔다. 원칙적으로 1급 이상 공직자들만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실질적인 정책 결정권을 행사하는 2~4급 공무원들은 대상에서 빠져 있다는 점이 우선 거론된다. 또 공직자가 직접 부양하지 않는 직계 존·비속의 경우 재산등록 고지를 거부할 수도 있어 직계 존·비속 등 주변인들을 통한 편법적인 주식 운용을 막을 수 없다는 한계를 아울러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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