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단일화, 그 아슬아슬한 불씨

등록 2007-12-14 00:00 수정 2020-05-03 04:25

방식과 패배주의 때문에 논란을 빚은 범여권 후보 단일화 협상, 미래는 있는가

▣ 최성진 기자csj@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12월5일 오후 6시, 서울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촛불이 하나둘 타오르기 시작했다. ‘수사 무효, 진실 승리’라는 구호가 메아리쳤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서 마련한 촛불집회였다.

같은 시각, 서울 명동성당 앞에는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 지지자들이 몰려왔다. 역시 촛불이 켜졌고, 검찰을 규탄하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즉각 사퇴하라”는 외침도 터져나왔다.

TV토론, 문 후보의 노림수

이날 오전 검찰은 ‘BBK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명박 후보에게 ‘면죄부’를 줬다. 동시에 검찰은, 마침 이틀 전인 12월3일 비로소 후보 단일화 협상의 물꼬를 튼 정동영·문국현 두 후보가 자연스럽게 뭉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셈이기도 했다.

두 후보 쪽은 애초 공동 집회를 계획했다. 촛불집회가 시작되기 직전까지 문 후보 선대위에서 지지자들에게 알린 집결 장소는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이었다. 문 후보가 명동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 계기는 이날 오후 5시께 끝난 선대위 회의였다.

회의를 마치고 나온 문 후보 쪽 핵심관계자는 벌게진 얼굴로 “아무래도 후보 단일화는 결렬될 것 같다”고 말했다. “촛불집회도 우리는 따로 한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인 이유를 묻자 이 관계자는 “왜 그래야 하는지, 나로서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 관계자는 후보 단일화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쪽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문 후보 쪽에서는 내놓은 입장의 요지는 이렇다. “정동영·문국현 후보의 단일화를 위해 나섰던 9인의 재야 원로들에게 단일화 방식을 결정할 포괄적 위임을 할 수 없다.” 시민사회 원로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두 후보의 단일화 논의는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12월7일 일단락됐다. ‘협상 결렬’이었다.

문 후보 쪽 장유식 대변인은 이날 오후 과의 통화에서 “(단일화 협상) 결렬이라고 써도 좋다”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TV토론이었다는 게 장 대변인의 설명이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일화’의 결과물보다는, 단일화를 이루는 과정이었다. 선관위가 TV토론뿐만 아니라 라디오, 인터넷 토론 등 모든 생중계 수단을 막아놓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 협상이 불가능했다. 그럴 바에는 정 후보는 정 후보대로, 문 후보는 문 후보대로 각자의 지지율을 끌어올리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문 후보의 TV토론 집착에는 나름의 노림수가 있었다. 문 후보는 12월4일 단일화를 제안하는 기자회견에서 “(정 후보가) 무엇을 반성하고 책임져야 하는지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정책을 놓고 경쟁하는 ‘포지티브’ 토론이 아니라 참여정부의 실정 등 정동영 후보의 아킬레스건을 집중적으로 공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대선보다는 단일화만을 위한 ‘네거티브’ 토론을 해보자는 제안과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문 후보 쪽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범여권이 대선에서 패할 경우 마치 문 후보가 단일화에 나서지 않아서 졌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런 우려 때문에 일단 단일화 협상에 나서기는 하겠지만 TV토론 내내 정 후보와 참여정부 실패론을 제기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문 후보는 단일화가 무산되기 직전까지 최소 여섯 차례의 TV토론이 없다면 단일화를 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심지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단일화 TV토론은 불법이라는 유권해석을 내린 12월6일에도 문 후보 쪽에서는 “어차피 이런(선관위가 불법이라고 금지한) 상황이라면 의지를 가지고 돌파해야 하는 건데, 정동영 후보 쪽에서 그런 의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BBK 수사 발표로 어려워졌다?

하지만 선관위가 허용하지 않은 TV토론을 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정 후보뿐만 아니라 문국현 후보도 알지 못했다. 정동영·문국현 후보 단일화는 이렇게 물 건너갔다. 그리고 그 책임의 대부분은 문 후보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는 평가가 많다. 문 후보 쪽에서도 일정 정도 동의하는 대목이다. 곽광혜 창조한국당 대변인은 “(단일화 협상 결렬 책임론에 대한) 부담이 없다고 할 수 없다”며 “우리는 나름의 소신을 지킨 것이지만 외적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단일화 협상 결렬 직후, 문 후보를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은 곱지 않다. 정치 컨설팅 업체인 폴컴의 윤경주 대표는 “단일화를 위한 TV토론을 통해 참여정부의 실정을 짚겠다고 했는데, 이런 토론이 개혁·진보 진영의 대선 승리에 도움이 됐을지 의문”이라며 “단일화에 임한 문 후보의 자세가 대선보다는 내년 총선을 염두에 뒀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단일화 협상이 꼬이게 된 표면적인 이유다. 좀더 아래를 파보면, 단일화 이후에도 대선 승리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 걸림돌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12월5일 BBK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가 범여권으로서는 비극이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비극으로 이어졌다.

검찰 발표는 당연히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었다. 그렇다고 범여권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질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기회로 만들 수도 있었다. 절반이 넘는 국민이 검찰 수사를 신뢰하지 못하는 국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면, 자칫 ‘야합’이라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후보 단일화를 ‘반부패 연대’로 자연스럽게 발전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탄력을 받으면 플러스알파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히 문국현 후보는 BBK 사건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를 보수적으로, 아주 보수적으로 해석했다. 문 후보 쪽 핵심 인사는 단일화 협상 결렬 직후, “(협상 실패) 책임론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 뒤 “다만, ‘단일화해서 부패한 보수세력의 집권을 막을 수 있다면’이란 단서를 달고 시작한 협상이었는데, BBK 사건 수사 결과 발표로 어려워진 것 아니냐”라고 말했다.

씨를 뿌릴 마음이라도 있다면

합치면 이길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단일화 협상에 나서는 것과, 승리에 대한 바람이 제거된 상태에서 협상하는 것은 차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대선을 그 자체보다는 내년 총선과 묶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문국현 후보와 창조한국당의 딜레마였다. 승산이 보이지 않는 대선 후보 자리라고 하지만, 이마저도 정동영 후보에게 내준다면 문 후보와 창조한국당에는 남는 것이 없다. 민주당이 그랬던 것처럼 지분을 5 대 5로 나누는 협상도 가능하지 않다. 대선에서 이긴다면 모를까 대선에서 만약 진다면 총선까지 대통합민주신당과 함께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한귀영 한국사회여론연구소 연구실장은 “신당과 민주당 간의 단일화 협상은 각각 후보와 지분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오히려 간단했지만, 창조한국당과 문 후보는 신당의 지분에는 관심이 없다”며 “정 후보 쪽에서도 그런 문 후보에게 줄 게 없다는 사실이 협상을 어렵게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한 실장은 “문 후보 쪽에서 내년 총선을 염두에 뒀다면 대선에서 지더라도 내년 총선까지 수도권의 개혁정당으로 남겠다는 쪽으로 갔어야 하는데, 후보 단일화 틀에 들어가면서 이도 저도 어렵게 됐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시 정리하면 후보 단일화 협상은 단일화 방식의 문제, 그리고 BBK 수사 결과 발표로 인한 패배주의 탓에 무산됐다. 개혁·진보 성향 유권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올 수 있는 동력은 사라졌다. 남은 변수는 없다. 12월7일 현재로선 그렇다. 마침 이날 이명박 후보는 쓰러져가는 범여권을 향해 ‘확인사살’이라도 하듯, 300억원 규모의 재산 사회 헌납을 선언했다.

범여권이 이대로 무기력하게 패배를 맞이한다면 이들에게는 총선도 미래도 없다. 얼어붙은 동토에 씨앗을 뿌릴 마음이라도 남아 있다면 방법은 여전히 후보 단일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채 대선을 치른다면 내년 4월 총선에서는 1963년 11월 제6대 총선 이후 최악의 ’야당 난립’을 피할 수 없다.

만약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될 경우 대통합민주신당, 민주노동당, 민주당, 창조한국당 등은 모두 야당으로 전락한다. 여기에 이회창 무소속 후보가 정당 결성을 추진한다고 했을 때, 야당은 모두 5개로 늘게 된다. 물론 신당이나 한나라당 등 기존 정당의 분화로 야당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6대 총선의 경우, 여당이었던 공화당은 총의석 175석 가운데 110석을 휩쓸었다. 제1야당인 민정당은 41석을 얻는 데 그쳤고, 민주당은 13석을 얻었다.

12월12일까지, 시간은 남아

늦으면 늦을수록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지만 단일화 효과는 여전히 살아있기는 하다. 적어도 여론조사를 할 수 있는 마지막 시한인 12월12일까지만이라도 후보 단일화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단일화는 유효하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단일화는 최소한 범여권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안정적인 2위를 탈환하는 효과라도 가져올 수 있다”면서 “이렇게 될 경우 침묵하고 있던 전통적 친여 성향의 유권자가 돌아오는 여건도 마련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개혁·진보 진영의 분열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일화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면, 테이블을 걷어차기는 아직 이르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