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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미술지존’ 홍라희

등록 2007-12-07 00:00 수정 2020-05-03 04:25

세계 굴지의 컬렉션과 최고의 인맥을 자랑하는 홍 관장의 카리스마, 비자금으로 추락하나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국 미술동네에는 청와대에 살지 않는 ‘또 다른 대통령’이 있다. 군림하려 하지 않는데도, 그의 권위는 미술판 곳곳에 군림한다. 자기를 굳이 내세우지 않지만, 미술인 누구나 그를 ‘지존’으로 인정한다. 가끔 미술관, 화랑가를 찾으면, ‘알현’을 하려는 화랑주들과 작가, 기획자들이 몰려온다. 자기네 작품을 설명하고 한 번이라도 눈길을 받으려고 안달이다. 그가 유심히 본 미술품은 당장 인기 그림이 된다. 드러난 일거수일투족은 언론의 화제가 된다. 기하학적 화면의 미니멀리즘 그림을 좋아하는 그는 서구에서 30년 전 끝난 이 그림풍을 1990년대 이후 한국 화랑가의 최신 유행으로 만들어내는 괴력도 보여주었다.

홍송원 대표와의 관계 부각

이 ‘미술 대통령’은 홍라희(62)씨다. 국내 최고 재벌인 삼성그룹 이건희(65) 회장의 부인이며 삼성미술관 리움의 관장이다. 신중한 성격을 지닌 삼성가의 안주인이자 삼성문화재단을 12년째 운영해온 그는 매년 미술언론 등의 영향력 조사에서 1위를 놓지 않는 사람이다. ‘관저’ 격인 미술관은 세 곳이다.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경기도 용인 호암미술관이다. 수장품은 1만5천 점이 넘는다. 이 땅의 옛 고고 유물과 미술품, 국내외 근현대 미술품들을 망라한다. 규모와 질 모든 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이며 세계 굴지의 컬렉션이다. 그가 거느린 인맥에는 이종상, 이우환씨 등의 화단 실력자와 평단의 주요 인사들이 포함되며,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김홍남 국립중앙박물관장 등도 영향권에 들어간다. 리움이나 로댕갤러리 전시 개막 때는 삼성문화재단 간부들은 물론, 국공립 박물관장을 지낸 학계, 예술계 인사들도 도열해 홍 관장과 시선, 발걸음을 맞춘다. 한 미술평론가는 “미술판에서 삼성의 힘은 홍 관장이 지닌 카리스마로 표상된다”고 말했다.

그런 홍 관장이 지금 자신이 쌓은 인망을 한꺼번에 날려버릴지도 모를 위기를 맞았다. 자신과 시누이 이명희 신세계 회장 등의 삼성가 여인들이 2002~2003년 거액의 비자금으로 세계적 대가들의 현대미술품을 무더기 구입했다는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가 나왔다. ‘비자금 화살’이 자신을 겨냥해 날아온 것이다. 그는 2000년대 이후 삼성에버랜드 편법 상속, X파일 파문 등 쏟아진 각종 의혹과 추문에서 늘 비켜서 있었다. 하지만 비자금 회오리는 피하지 못했다.

삼성가의 수상한 미술품 사재기 의혹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거액 미술품을 대리해 사준 의혹이 제기된 서미갤러리 홍송원 대표와 홍 관장의 관계가 부각됐다. 100억원대의 작품인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그림 과 프랭크 스텔라의 미니멀 그림 을 삼성 쪽이 소장했는지, 그 작품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등이 구설에 올랐다. 삼성은 소장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특검에서 미술품 사재기가 비자금을 세탁하고 매매수익도 챙기는 꼼수였다는 사실이 확인될 경우 홍 관장의 명예는 치명적 손상을 입게 된다. 예술 지원 사업을 해왔으면서도 실상 비자금 컬렉션에 골몰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미술판에서 기업들이 세운 미술관이 비자금을 챙기거나 세탁하는 유력한 창구란 말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미술관 재원을 개인 컬렉션을 사는 데 쓰거나 구입 자금을 부풀려 차액을 비자금화하는 것은 공공연한 관행으로 이야기될 정도다. 특히 비싼 외국 거장의 작품들은 시세에 따른 가격 차액이 커서, 재벌들이 전문 중개 화랑을 동원해 거액의 비자금을 챙기는 용도로 쓸 개연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대로라면 삼성가의 고액 미술품 구입은 이런 편법 도식과 들어맞는다. 자본의 치밀한 공모와 전략 아래 짜여진 탈법이다. 삼성의 막강한 ‘미술 파워’가 외국산 고가 그림 구입으로 비자금을 세탁해주는 과정에서 커졌다면, 범법에 따른 처벌과 별개로 삼성의 문화예술 지원(메세나) 사업은 도덕적 치명타에 주저앉을 가능성이 크다. 재벌가 수집 컬렉션은 증여세와 상속세를 크게 줄이면서 물려줄 수 있는 재산이란 측면까지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프라이빗 갤러리’ 관행 드러나

이번 폭로로 홍 관장은 그의 집사 구실을 해온 서미갤러리와의 미묘한 관계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더욱 곤혹스런 처지에 놓였다. 전시 없이 재벌가 등의 고급 컬렉터에게 고액 미술품 중개만 하는 ‘프라이빗 갤러리’의 거래 관행이 세간에 구체적으로 드러난 셈이다. 서미갤러리는 김 변호사의 폭로로 알려진 것 이상의 놀라운 거액 미술품을 중개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서미갤러리의 홍 대표는 90년대 홍 관장이 좋아하는 서구 거장들의 미니멀 그림들을 납품하면서 끈끈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진다. 미술시장 관계자는 “‘입속의 혀’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홍 대표가 홍 관장의 미술 집사 구실을 잘했고, 삼성가 경조사 때는 파티장 세팅도 도맡아 해줄 정도였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004년 이후 삼성 내부에서 지나치게 홍 대표에게 의존한다는 건의가 올라가면서 현재 삼성과의 거래는 크게 줄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술 동네에서는 지금도 홍 관장과 서미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말들이 파다하다. 단적으로 홍송원 대표의 갤러리 계열사인 서울 청담동 서미앤투스는 2004년 설립 당시 홍 대표와 삼성가 등의 재벌 인사 등 7명이 출자해 만들었다. 홍라희 관장의 며느리이자 삼성 후계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의 부인 임세령씨, 임씨의 친어머니인 박현주씨(대상그룹 임창욱 명예회장 부인)가 함께 10억원을 출자했고, 인기 탤런트 ㅅ씨의 부인도 출자했다고 한다. 여기서 근무했던 한 직원은 “홍라희씨가 박현주씨를 통해 서미앤투스에 투자했다는 괴소문이 돌아 난감했다”며 “직원들끼리는 2002~2003년 당시 서미가 올린 수백억대 경매 거래를 화제에 올리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특검이 시작되면 홍 관장은 수사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김 변호사의 폭로에 대한 삼성과 서미 쪽 해명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다. 상상하기도 힘든 거액의 미술품 구매 행태에 대한 국민적 위화감도 크다. 서울지검 외사부에서 벌금형으로 종결된 홍송원 서미갤러리 대표의 거액 외화 유출 수사 기록도 남아 있어 비자금 미술품 건은 특검 초반부터 집중 조명을 받을 것이 확실하다. 김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기자회견에서 비자금을 이용한 고가 미술품 구입에 대해 횡령, 조세포탈, 외국환관리법 위반 혐의 등의 수사를 해야 한다고 요구한 바 있다. 리움미술관 사정에 정통한 삼성그룹 계열사의 관계자는 이런 쓴 소리를 했다.

비자금 파문, 고통스런 성찰을 요구

“사실 컬렉션을 공공재단(삼성문화재단)에 넘겼으면 그것으로 끝인데, 삼성가는 재단을 마치 사유물처럼 여겼다. 서구 미술관처럼 이사회 등에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하지 않고 관장에게만 힘이 집중했다. 소유·경영 분리도 없었다. 운영권을 꼭 쥔 채 자기들 취향으로 미술관을 이끌고, 개인 컬렉션 관리 기능까지 떠넘기다 보니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물론 홍 관장이 95년 현 리움 전신인 호암미술관 관장에 취임한 이래 이룬 성취는 주목할 만하다. 시아버지 이병철 회장 때부터 컬렉터 경험을 쌓아온 그는 과감한 현대미술 컬렉션과 기획전으로 삼성미술관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굴지의 컬렉션으로 키웠다. 뉴욕에서 수학한 동생 홍나영씨가 총괄 부관장으로 참여하면서 전시도 젊어졌고, 삼성에 비판적인 진보 성향 작가들도 과감히 초대했다. 한국 현대미술의 전시, 지형을 개선하는 데 국가기관보다도 훨씬 큰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 홍 관장에게 비자금 파문은 삼성 컬렉션의 운영에 고통스러운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번뇌에 빠져 있을 그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취할 것인가. 미술계는 한남동을 주시하고 있다.



어떤 경로로 미술품 사들였나

2002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서미갤러리 쪽이 전화로 응찰

김용철 변호사가 구입 목록을 제시하며 2002~2003년 서미갤러리를 거쳐 삼성가 쪽에 넘어갔다고 주장한 미술품 30점의 시가총액은 3400만달러를 넘는다. 1달러당 1200원대였던 당시 환율을 감안하면 400억원이 넘는다. 엄청난 액수의 미술품들을 어떤 경위로 서미가 사들이게 됐을까.
5년 전인 2002년 11월13일 저녁 미국 뉴욕에서 경매사 크리스티의 전후 현대미술 경매가 열렸다. 이 경매는 시작부터 세계 미술계의 떠들썩한 화제를 모았다. 한 거대 보험사와 유력 컬렉터 등으로부터 눈길을 끌 만한 거대 매물이 쏟아졌다. 김 변호사가 공개한 구입 목록의 거래품 30점 가운데 26점이 이 크리스티 경매 거래에서 낙찰된 것이다. 세계 곳곳에서 응찰자들이 몰렸다. 경매시장 정보를 전하는 인터넷 사이트 ‘아트넷’의 기사를 보면, 김 변호사의 폭로 뒤 세간의 화제가 된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작품 은 재스퍼 존스의 대작과 더불어 경매의 최고 관심 작품이었다. 추정가만 500만~700만달러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사는 컬렉터가 내놓은 것이었다. 전화로 응찰한 서미갤러리 쪽은 경합 끝에 당시 작가의 최고가 기록인 715만달러에 작품을 손에 넣었다.



구입 목록의 다른 작품인 바넷 뉴먼의 추상화 (385만달러)와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의 (286만달러) 등도 작가의 이전 경매가 기록을 단숨에 깼고, 에드 루샤의 문자그림 (176만달러)도 고가에 낙찰됐다. 서미 쪽이 과감히 고액을 베팅한 결과였다. 아트넷의 기사는 서미 쪽이 사들인 작품들의 낙찰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데, 작품 소장자의 면면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보인다. “익명의 전화 응찰자들이 구매 열기를 더욱 떠들썩하게 부추겼다. 같은 구매자가 리히텐슈타인과 에드 루샤의 작품을 가져갔다. 그사이 또 다른 응찰자는 매튜 바니와 온 카와라, 바넷 뉴먼의 작품을 가져갔다. 또 다른 응찰자는 울과 도널드 저드의 조형물을 사갔다.”
이 기사에 나온 작가의 작품들은 모두 김 변호사가 공개한 서미 쪽의 구입 목록 작품이다. 낙찰액, 제목, 응찰 번호(세일링 넘버) 등이 일치한다. 그런데, 기사 내용으로 미뤄 작품의 전화 응찰에 응한 컬렉터는 최소한 3명 이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컬렉터 주문 없이 자신이 작품을 샀다는 홍성원 서미 대표의 주장에 따른다면 기사에 나온 이 컬렉터들은 모두 홍 대표가 된다. 홍 대표는 특히 이 작품들을 일단 낙찰받은 뒤 구매자를 찾는 방식으로 팔았다고 주장했다. 화랑 스스로 거액의 미술품 구입을 결정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경매사와 화랑 관계자들은 이런 구매 방식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런 모험을 하기는 힘들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10억원대 아래 단위에서는 화랑, 경매사가 그림을 사서 컬렉터들에게 구입을 권유하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그 이상 액수면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케이옥션 관계자는 “경매는 현금 거래가 우선이다. 수십억, 수백억원대의 현금이 있으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돈을 빌려 100억원대의 작품을 구입할 경우 당장 엄청난 이자 부담이 생긴다. 설사 자기 돈으로 100억원대의 그림을 구입한다고 해도,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이자도 없이 거액 덩어리를 방치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판로가 확실치 않으면 시도하지 못할 모험이라는 말이다. 지난 11월28일 <ytn>은 2002년 11월 크리스티 경매와 비슷한 시기에 서미 쪽이 제출한 설립신고서를 신용평가회사가 분석한 결과 납입 자본금은 3억원, 신용등급도 C등급이어서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고 보도했다.
홍송원 대표는 지난 11월23일 인터뷰에서도 2002년 크리스티 경매 당시 다룬 것은 바넷 뉴먼의 작품밖에 없었으며, 컬렉터가 대금 지급을 미뤄 큰 손해를 보고 경매사 쪽에 돌려줬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김 변호사의 폭로 뒤 그의 말은 180도 바뀐다. 삼성이 을 사려다 서미 쪽에 돌려주었다고 해명하자, 홍 대표는 구입 목록 작품들을 거래한 사실을 시인했다. 이와 함께 을 주문 아닌 자기 판단으로 사서 구매를 타진했다고 강변했다.
흥미로운 건 올해 2월에도 서미 쪽이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870만파운드(약 165억원)의 해외 미술품을 사들인 사실이 현지 일간지에 크게 보도됐다는 점이다. 현지 언론들은 서미갤러리를 최고의 큰손으로 평가하면서 세계적인 딜러 화랑인 래리 가고시안보다 종종 더 높은 값을 불렀다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초 서미가 사들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홍 관장이 선호하는 미니멀, 팝아트 취향의 작품이었다. 삼성그룹의 한 관계자는 “2004년 이후로 서미와 거래 규모를 크게 줄였으나, 매년 대형 거래 1~2건씩은 챙겨준다는 이야기를 미술관 쪽에서 들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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