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회장 지시사항’ 발언록 분석…각계 인사들 로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노조 설립에 대응</font>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의 지시에 따라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정·관계와 법조계, 언론계, 학계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이 회장의 발언록을 통해 드러났다. 비자금 파문에 이어 또 한 번 요란한 파열음이 예고된다. ‘삼성공화국’ 논란도 다시 불거질 전망이다.
이 확보한 ‘회장 지시사항’이란 제목의 이 문건에는 이건희 회장이 정치권을 비롯해 각계에 대한 로비를 지시한 흔적이 ‘날것’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 문건은 이 회장의 서울 한남동 자택이나 공식 회의, 행사 등에서 이 회장이 지시한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소수의 고위층들에게만 배포돼 그룹의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방향타 구실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는 “지시사항은 구조본 안에서 ‘헌법’으로 간주돼 그 이행 상황이 이 회장에게 상세히 보고된다”고 밝혔다. 입수된 문건은 2003년 8월20일에서 12월27일까지의 지시사항을 담고 있다. 문건의 주요 내용을 분석했다.
추미애 당시 새천년민주당 의원(현재 정동영 통합신당 대선 후보 선대위에서 활동 중)을 돈 안 받는 인사로 거명한 게 눈에 띈다. 회의 장소로 적혀 있는 ‘보광’은 강원도 평창에 있는 ‘보광휘닉스파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돈 받는 사람’에겐 돈을, ‘돈 안 받는 사람’에겐 호텔 이용 할인권이나 포도주를 돌리는 식의 관리가 회장의 직접 지시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이다. 회의가 열린 시점이 2003~2004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벌어지는 와중이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회장 지시사항’에 거론된 추미애 전 의원은 삼성으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의받은 적이 있다고 한국방송이 10월12일 보도했다. 지시가 실제 집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용철 변호사는 이 회장이 ‘호텔 할인권 발행 검토’를 지시한 뒤, 자신도 호텔신라 숙박권 50여 장을 회사에서 받아 지인들에게 돌렸다고 밝혔다.
이건희 회장에서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로 이어지는 불법·변칙 경영권 세습을 지속적으로 비판해온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이 발언 내용을 전해듣고 “정·관계, 법조계 인사들에 대한 삼성의 불법 관리가 회장 차원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했다. 삼성은 왜 정·관계, 법조계 인사들에게 돈이나 할인권 또는 고급 포도주를 돌리는 것일까? 또 그 자금의 출처는 어디일까? 이 회장 가문이 그룹의 경영권을 불법·변칙으로 세습하려 한다는 혐의와는 무관한 일일까?
언론사들의 기사를 비교해 광고를 수단으로 에 압력을 행사하라고 지시했다고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이다. 언론이 다양한 관점을 갖고 보도하는 건 상식인데도 경제신문을 중심으로 한 국내 대다수의 언론매체들처럼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게 긍정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언론을 동원해 삼성에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는 흔적이 뚜렷하다. 수입의 대부분을 기업 광고에 기대고 있는 국내 언론사들의 재정적 취약성, 언론 광고 시장에서 차지하는 삼성의 막대한 비중을 감안할 때 자금력을 수단으로 언론을 위협하고 여론 조작을 일삼는다는 비판을 낳을 대목이다. 10월29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기자회견 형식으로 삼성 비자금의 정황증거가 제시됐음에도 를 제외한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이 관련 기사를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배치했던 현실을 떠올려보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이건희 회장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삼성의 조직적인 관리를 받는 대상에 학계까지 포함돼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 대목의 발언은 대학들에 제공하는 돈이 조건 없는 기부가 아니라 학계를 우호 세력으로 포섭하려는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대학과 학문의 자유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다는 분석을 낳을 만하다. 삼성의 힘이 경제 영역을 넘어 정치·사회·이데올로기 분야로까지 넓어지는 걸 이건희 회장이 직접 기획해 실행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학계를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흔적은 아래처럼 여럿이다.
참여연대는 당시 돈을 받지 않았지만, 시민단체에 대한 이 회장의 인식과 대처 방식을 알 수 있다.
이 회장의 발언록에서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금산 분리) 문제를 언급한 대목이다. 2003년 12월 ‘보광’에서 열린 회의 때의 발언이다.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경쟁력에서 핵심 요소로 꼽히는 금융망을 근거로 금산 분리 원칙의 철폐 논리를 개발하라는 지시로 해석된다. 이 회장의 발언 뒤 1년5개월 만인 2005년 5월 삼성생명 산하 삼성금융연구소는 ‘삼성금융 계열사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로드맵’을 마련한 것으로 드러난 바 있다. 금산 분리 원칙을 공격하는 다양한 논리를 개발하고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로비 작업을 펼치는 게 주내용이다. ‘삼성은행’의 탄생을 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내부 문건은 삼성생명·삼성카드 등 그룹의 금융부문 최고위 기구인 삼성 금융사장단 회의에서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산 분리 원칙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 이건희 회장의 관심과 지시에 의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정황증거다.
심상정 민주노동당 의원이 지난 10월17일 국회 재정경제위 국정감사에서 삼성금융연구소 문건을 공개한 직후 삼성 쪽은 “(삼성의 막강한 자금력 덕에) 은행에 손 벌릴 일이 없는데, 왜 은행을 가지려고 하겠느냐”며 “연구자 개인의 견해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그럴까? 문건 공개 직후만 해도 삼성 쪽의 이 해명을 수긍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이번 비자금 파문으로 재벌의 은행 인수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삼성이 우리은행과 짜고 비자금을 조성하고 자금을 세탁했다는 흔적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을 중심으로 한 재벌들이 금산 분리 원칙을 공격해 은행을 소유하려는 의도가 단순히 ‘자금 조달’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금산 분리 원칙(쉽게 말해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은 후보들 사이의 이견 표출로 대선 쟁점으로 부각돼 있다는 점에서도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금산 분리 원칙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지 않고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라 즉각 완화하거나 폐지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문국현 창조한국당,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금산 분리 원칙을 유지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김상조 교수는 “글로벌 스탠더드는 금산 분리 원칙을 유지하는 것임에도 삼성 쪽에서 허위 논리를 만들어 정치인, 학자들에게 전파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건희 회장의 발언록에는 회사의 이익과 총수의 이익을 구반하지 않은 이른바 ‘황제 경영’ 논란을 낳을 대목도 엿보인다.
지배주주의 개인적인 사안인, 선대 생가를 돌보는 일에 회사의 자원과 인력을 사용해 지원하라는 내용이다. 이는 회사 자원 및 기회를 사적으로 유용하지 말라는 ‘상법상 이사의 충실 의무’ 위반에 해당한다.
‘노조 설립 시도 관련 보고 들으시고’라는 별도 설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노조 설립 움직임을 빌미로 주요 사업 부분을 떼내라는 지시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의 ‘무노조 경영’ 원칙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대목으로, 봉건적 노조관도 문제이거니와 상법 정신에도 어긋난다. 분당플라자 사업부문을 안고 있던 삼성물산은 상장회사여서 중요한 사업부문의 매각이나 양·수도는 이사회 논의, 주주총회 결의를 거쳐야 할 사항이다.
이 회장의 지시에서 비롯된 것인지, 삼성물산은 실제로 지난해 분당플라자 사업부문을 애경그룹에 매각했다. 이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사외이사들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고용 불안을 느낀 삼성물산 유통사업부문 임직원 366명은 지난해 11월 분당플라자의 매각 중단을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발표 사흘 전 매각 사실을 통보받아 협상 과정에서 배제됐다는 주장이었다.
김상조 교수는 “이건희 회장의 경영능력이 탁월한지는 모르겠지만, 삼성그룹의 지배주주로서 기업 차원을 넘어 삼성이 우리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바탕을 둔 폭넓은 가치관이나 인식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김용철 변호사의 이번 양심선언은 대기업의 불법 비자금 조성과 관리, 또 그걸 통한 부당 행위를 청산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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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광 이건희의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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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삼성 회장이 ‘영화광’이라는 얘기는 이미 웬만큼 알려져 있다. 는 수십 번씩 봤고, 한 해 1천 편 가량의 비디오를 본다는 얘기까지 있다. 일본 유학 시절엔 연간 1300여 편의 비디오를 봤다고 전한다. 출장 때문에 놓친 TV 드라마가 있으면 이후 밀린 분량을 비디오로 녹화해 몰아서 본다고 한다.
이 확보한 이건희 회장의 ‘지시사항’ 자료는 그가 영화광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고 있다. 20쪽에 이르는 이 문서 자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단연 DVD(디지털비디오디스크)이다. 이 회장은 2003년 8월24일 한남동 자택에서 열린 회의에서 “소니 DVD 플레이어를 써보니 장시간 사용시 열이 많이 나서 디스크가 저절로 이젝트(Eject)되는 등 오동작이 생긴다”며 “우리 제품은 소비 전력도 덜 들어가게 하고, 부품 수도 줄여서 열이 발생치 않도록 해 볼 것”이라고 지시했다.
2003년 10월26일 도쿄에서의 지시사항은 ‘DVD 관련’이란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다. “DVD 플레이어 데논(DENON) 것을 밤새도록 사용했는데 문제가 없었음. (중략) 데논 DVD 플레이어는 뜨끈뜨끈한데도 문제가 없었음. DVD 플레이어의 리와인드(Rewind), 포워드(Forward) 등 속도조절 기능이 있는데, 그런 기능을 써먹으려고 해도 써먹을 수가 없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음. VTR를 쓰다가 DVD로 넘어오는 과정에 있음. (중략) 삼성 제품이 DVD가 VTR와 비슷하게 작동할 수 있어야 소비자가 받아들이는데, 똑같지 않으면 다른 제품과 비교하고, 경계하고(Alert), 두리번거리게 됨. VTR 중 M/S가 제일 높은 제품 전부 모아서 기능을 분석해보고 그 기능을 전부 DVD에 반영할 것.” 2003년 11월14일 한남동 회의, 2003년 11월20일 전자 디지털 미디어 보고 및 만찬회 등에서도 DVD를 주제로 삼아 세부적인 사항까지 지시를 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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