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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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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인의 실체를 보았나

등록 2001-04-03 00:00 수정 2020-05-02 04:21

방송매체에 드러난 너무 비현실적인 노인… 멸시받고 왜곡된 노인상 바로잡아야

혼자 사는 두 노인이 있다. 80살 먹은 프랭크와 그보다 조금 젊은 월터. 공원에서 마주치다가 친해진 두 사람은 공원에서 극장으로, 동네 어린이 야구장에서 다시 공원으로 일상의 동선을 공유한다. 두 사람에게는 흠모하는 여인이 있다. 뱃사람 출신인 프랭크는 흑백의 로맨스 영화를 보러 매일 꽃단장하고 극장에 출근하는 고운 할머니에게 추파를 던지고, 퇴역 이발사 월터는 매일 가는 식당의 젊은 웨이트리스를 짝사랑한다. 백발성성한 노배우 리처드 해리스와 로버트 듀발이 주연한 (1994)는 이렇듯 무심한 시선으로 두 노인의 일과표를 따라간다. 두 사람은 거리에서 고함치며 싸우기도 하고, 2인승 자전거를 타고 불꽃놀이 구경을 가기도 하며, 생일날조차 찾아오지 않는 자식의 무심함에 “중요한 일을 하니까” 애써 위로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연의 아픔을 겪는다. 턱시도 차림으로 패기만만하게 공주 할머니에게 다가갔던 프랭크는 친구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월터는 비밀스런 사랑을 젊은 해군에게 속절없이 떠나보낸다. 사랑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상실은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평범한 젊은이들의 사랑이 그렇듯이 말이다.

정형화·희화화로 노인상 부정적으로 묘사

우리는 공원에서, 허름한 식당에서 매일 월터와 프랭크를 만난다. 그러나 텔레비전 드라마나 한국영화에서 월터와 프랭크는 존재하지 않는다. 스크린에서는 마치 우리 사회에 60대 이상의 연령층은 모두가 이민을 떠난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극장이야 젊은이들의 놀이터로 변한 지 한참 됐으니 그렇다고 넘어가더라도 많은 노인들의 오락거리인 텔레비전에서조차 노인들의 이야기는 그저 무대의 작은 소품처럼 왜소하다.

물론 아직까지 브라운관에서 머리 희끗희끗한 인물들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는 인물은 거의 없다. 의 최불암씨는 20년 동안 양촌리 김 회장이며, 김수미씨는 20년 동안 일용 엄니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노인들은 박 노인이거나 최씨 할머니이며, 누군가의 아버지나 할머니다. 이들은 결코 명명되지 못하며 언제나 그 자리에 걸려 있는 벽걸이처럼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 문제를 일으키고 풀어가는 자식들을, 손자들을 맞고 있다.

노인을 묘사하는 방식 역시 지극히 단선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양촌리 김 회장처럼 단 한번의 실수도 없는 ‘걸어다니는 가훈’이거나 의 여운계씨처럼 집안 망신을 시키고 다니는 주책스러운 모습으로 희화화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부잣집 시어머니로 자주 등장하는 강부자씨처럼 고집불통인 집안의 애물단지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인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드라마 역시 과장되고 왜곡된 묘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성서대 원영희 교수(사회복지학)는 “치매를 다룬 특집 드라마들은 치매에 대한 이해를 돕기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을 가중시켜 노인부양은 못할 짓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노년기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중시켰다”고 지적했다.
최근 들어 병약하고 무기력한 노인의 모습이 비교적 사라지면서 ‘건강한 노인=웃기는 노인’이라는 이상한 등식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종영된 서울방송의 는 가족 시간대에 농촌노인들을 참여시켰다는 이유로 방송위원회로부터 좋은 프로그램상을 받았지만, 노인들한테서는 불쾌한 반응을 얻은 대표적인 프로그램이다. 서울YMCA 좋은 방송을 위한 노인의 모임은 모니터 보고서에서 이 프로그램이 ‘쉬운 외국어 하나 몰라 헤매는 무식한 노인이나, 상스런 욕지거리를 남발하는 노인으로 비춰지면서 노인들을 방송용으로 희화화했다’고 비판했다.
프로그램 전반에서 갈등하고 화해하며 자기성찰하는 노인의 모습이 전무하다시피한 상태에서 황혼의 사랑에 대한 묘사는 애당초 기대하기가 무리다. 박완서씨의 원작을 드라마화한 문화방송의 베스트극장 이 98년 방영되기도 했지만, 이런 작품은 가뭄에 나는 콩보다 모자란 숫자다. 한국방송의 이나 문화방송의 와 같이 중년의 사랑은 이제 브라운관 안으로 성큼 들어왔지만 아직도 노년의 사랑은 주말 드라마나 일일 드라마에서 가끔씩 등장해도 동네의 웃음거리처럼 간략하게 묘사되고 있다.
텔레비전 시청을 가장 큰 여가선용으로 보내는 90%의 노인들, 하루 평균 7시간15분을 텔레비전 시청으로 보내는 60대 남성노인들(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전국노인 생활실태조사, 2000년)에게 텔레비전은 시간을 때우는 것 외에는 실상 아무런 도움도, 위로도 되고 있지 못한 형편인 것이다.
방송가의 큰 흐름에서 황혼의 사랑이 여전히 금기시되고 있는 가운데 문화방송의 은 노년의 만남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는 유일한 프로그램이다. 오락 프로그램에서 한때 유행했던 짝짓기 컨셉을 빌려온 이 프로그램의 ‘실버 데이트’코너는 사별하거나 이혼한 60∼70대 노인들에게 만남의 자리를 마련한다. 세련된 편집으로 참가자들의 프로필을 소개하고, 스튜디오에 나와 남녀 사회자를 통해 간접적인 대화를 하면서 쑥스러워 하는 남녀간의 긴장을 자연스럽게 풀어주는 등 섬세한 배려가 돋보이는 이 프로그램에는 하루에도 열통 이상씩 신청전화가 밀려온다. 의 배준호 PD는 “사회자인 이상용씨가 지방에 갈 때마다 ‘우리 동네 김씨 좀 연결시켜줘’하는 청탁에 시달린다”며 노인 시청자들의 좋은 반응을 은근히 자랑한다. 참가자들의 꾸미지 않은 대화나 단추를 눌러 성사와 실패까지 확인하는 결말은 에 못지 않은 재미를 주지만, 이 프로그램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일요일 아침 6시에 방송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월터와 프랭크를 기다리며…

뿐 아니라 한국방송의 실버 프로그램 역시 같은 시간에 방송한다. 같은 방송사의 는 월요일 밤 11시40분에 방송한다. 노인 대상 프로그램은 이처럼 편성시간에서 소외된다. 한국방송의 한 관계자는 “노인들에게는 아침 6시도 이른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편성에 무리가 없다”고 일축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은 다르다. YMCA 좋은 방송을 위한 노인의 모임 대표 계성렬(74)씨는 “노인 프로그램들이 지나치게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편성돼 있어 실제로 노인들 대다수가 시청하기도 어렵다”면서 “고령화사회가 되면서 노인문제가 사회문제로 확대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노인 프로그램도 가족시간대에 편성돼 가족 모두가 함께 시청할 수 있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최근 일본에서는 노인들의 농밀한 사랑을 그린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이 개봉돼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70대 노인들의 정사신이 등장하지만 관객들은 이 영화에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갈채를 보냈다. 이는 일본이 고령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인을 짐덩어리에서 한명의 사회구성원이자 인격으로 보게 됐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이제 고령사회를 앞둔 우리 방송이나 영화도 노인의 아름다운 사랑이나 정사를 그릴 준비가 됐을까. 방송인 전여옥씨는 아름다움으로 승화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만 “미디어에서 노인들의 현실을 보다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줄 것”을 당부한다. 가끔 주책도 부리고, 고집을 피우지만 때로 흔들리지 않는 자손들의 지지대가 되어주기도 하고 봄바람에 마음 설레며 사랑의 아픔도 느끼는, 월터와 프랭크로 말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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