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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표는 왜 분열하는가

등록 2007-10-05 00:00 수정 2020-05-03 04:25

사표심리 등으로 민주노총 절반도 민노당에 투표 안해…변화된 환경에서 그들이 ‘계급투표’에 나선다면?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이건희 삼성 회장도 1표, 현대자동차 노동자도 1표다. 1500만 명의 노동자들이 ‘계급투표’에 나선다면 민주노동당이 집권하는 선거혁명도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자들은 왜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대표 체제인 민주노동당에 계급투표를 하지 않는 것일까?

민주노총의 ‘조합원 정치교육안’(2007년 6월)은 “2004년 총선 때의 원내 진출 감격을 떠올리면서 ‘처음에야 신선했지, 이제는 한물간 거 같아’라고 생각하지만 자본가들은 결코 따라할 수 없는, 우리 노동자의 무기가 바로 계급투표”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실상 계급투표는 민주노동당만의 고유한 득표 전략일 수 있다. 1997년 대선 때도 “민주노총 조합원 50만 명이 가족 한 명만 조직해도 100만 표를 얻는다”는 구호가 나왔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절반도 민주노동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계급투표는 선언에 머물렀고, 노동자들은 계급 정체성보다는 단순히 한 사람의 선거인으로서 투표하는 성향을 보여왔다. 민주노동당이 아직 노동자 계급과 민중들로부터도 전폭적인 지지를 못 받고 있는 것이다.

“후보는 당원만 뽑고 우리는 표 대냐?”

그동안 계급투표를 가로막은 대표적인 요인으로는 분단 이데올로기, 지역주의, 사표론이 지목돼왔다. 노동자들 역시 분단과 지역주의에 갇혀 보수적인 투표 행태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분단과 지역주의 문제는 크게 약화됐다. 사표론은 어떨까?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가 2006년 8월 ‘민주노동당 지지층’(현재 지지층 301명과 잠재적 지지층 2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07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가 61.8%(‘반드시 지지하겠다’ 21.3%, ‘아마 지지할 것 같다’ 40.5%)였다. 또 노무현 정부에 대한 이탈층이 늘어나고 있지만, 지지층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반한나라당 연대론’에 공감(51.5%)하고 있었고, 지난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에 투표하지 않은 이유로 ‘낮은 당선 가능성’(29.8%)을 꼽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진보정치연구소는 “민주노동당 지지층의 정당 충성도가 강하지 않고, 사표심리가 여전히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풀이했다. 2004년 총선 원내 진출을 계기로 사표심리가 크게 줄었다는 분석도 있지만, 공세적인 대선 의제 형성을 통해 대선 구도에 민주노동당이 주요 변수로 등장하지 못하면 막판에 또 사표심리에 휘둘릴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는 1년 전에 이뤄진 여론조사 결과다. 민주노총 이영희 정치위원장은 “여야 대선 후보가 오차범위에서 접전을 벌일 때는 민주노동당이 (사표심리 작용으로) 표 도둑을 맞았고, 2002년에 노무현 후보를 찍은 노동자도 많았다”며 “그러나 지금은 이명박씨가 독주하고 범여권은 죽을 쑤고 있는 판인데 이런 국면에 변화가 없다면 이번에 민주노동당이 득표를 크게 늘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민주노동당의 표가 늘어나는 건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민주노동당의 작은 딜레마(?)이기도 하다. 2002년 한국노총 대선기획팀장을 지낸 박동 박사(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는 “올해 대선 구도는 진보정당 입장에서 볼 때 사표심리가 크게 약화되고,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선호하는 계급투표가 이뤄질 수 있는 좋은 환경”이라며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이데올로기만으로는 득표율 10%의 벽을 넘기 어렵고, 대선에서 어떤 정책 전략을 구사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의 올해 대선 목표는 300만 표(투표율 68% 기준·득표율 12%)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정치 방침으로 표방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계급투표에 불을 붙이자’는 구호를 전면에 내걸고 노동자들의 계급투표를 독려하고 있다. 이영희 정치위원장은 “민주노총이 ‘100만 명 민중참여경선제’(민주노총 전체 조합원 80만 명과 민주노동당 당원 10만 명 등 총 100만 명이 참여하는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선출 방식)를 요구했는데 무산돼 아쉽다. 아래에서부터 정치 일정과 정치 투쟁에 조합원이 적극 참여하도록 해 흔들리지 않는 계급투표의 토대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민주노총 조합원들 사이에 ‘후보는 당원들만 뽑고 우리는 표 대고 돈만 대냐?’는 분위기도 있다”고 말했다. 사실 영국 노동당과 영국노총 간의 오랜 동지 관계가 점차 약화되고 있듯이, 민주노동당이 민중참여경선제를 수용하지 않은 배경에도 ‘표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의 물질적·조직적 기반이란 점이 부각될수록 표 획득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해 당이 부담스러워한 것이다.

계급도 시민도 아닌 어정쩡한 의식

영국에서는 광부의 아들이 고위 공무원이 됐을 때 그 부모가 아들한테 “네가 우리 노동자 계급을 배반했다”는 말을 할 정도라지만, 한국의 노동자들은 계급도 시민도 아닌 어정쩡한 의식을 갖고 투표장에 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2001년 말에 민주노총이 조합원 739명을 대상으로 벌인 정치의식 조사를 보면, ‘끝까지 민주노동당의 강화를 위해 함께해야 한다’는 의견은 42.6%, ‘당이 안정화될 때까지 (배타적 지지 방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은 15.0%, ‘민주노총은 대중조직으로서, 특정 정당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20.4%에 달했다. 계급투표보다는 조합원의 정치적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식도 꽤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영희 정치위원장은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을 바꾸고, 연대임금 정책 등을 통해 모든 노동자들이 결속하도록 해야 계급투표와 민주노동당 몰표가 현실화될 수 있다”며 “전략적으로 울산 북구, 광주 서구, 광주 북구, 성남 중원 등 계급투표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 재정과 인력을 집중해 계급투표 모범 사례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당원 중 민주노총 조합원은 약 3만5천 명이다. 그러나 당의 정체성에 대한 조합원들의 부정적 인식이 커지고 있고, 당의 역할에 대한 실망감까지 겹치면서 정치 참여도 정체되고 결합력도 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연맹·지역별 노동선대본 구성을 통해 100만 민중대회를 조직해 ‘승리하는 계급투표’ 분위기를 띄우고, 민주노총 소속 당원 명단을 파악해 이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기로 했다. 선거 국면을 투쟁과 결합시켜야 정치의식이 고양되고 계급투표도 성사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서구의 다른 진보정당과 달리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란 대중조직의 조직적 결의가 탄생과 성장의 주요 동력이고, 따라서 노동자 계급투표가 집권의 관건이다.

지난 5월 민주노총 경주시협의회가 소속 조합원 1522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를 보면, 2002년 대선 당시 권영길 후보에 투표한 조합원은 41.7%로 나타났다. 실제로 2002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이 획득한 95만7천 표(득표율 3.9%) 가운데 약 60만 표가 민주노총 조합원이 던진 표로 분석된다. 당시 민주노총 조합원의 약 40%(약 30만 명)가 권 후보한테 투표했고, 이들이 가족 중 한 명 이상을 설득해 민주노동당에 표를 던지게 하는 방식으로 약 60만 표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전체 조합원(80만 명)이 이런 방식으로 계급투표에 나선다면 올해 160만 표는 획득되는 셈이다.

한국노총의 계급투표 가능성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한국노총 조합원들의 정치의식은 어떨까?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한 이후인 2004년 12월에 한국노총이 조합원 1193명을 대상으로 벌인 조사를 보면, 향후에 지지할 정당으로 민주노동당 25.2%, 한국노총 독자정당 18.5%, 한나라당 18.1%, 열린우리당 10.0%였다. 또 ‘민주노동당에 참여해야’가 33.0%, ‘한국노총이 계속 독자 정당을 추진해야’가 23.6%, ‘민주노동당 이외의 우호 정당과 손잡아야’가 9.6%였다. 비록 한국노총이 전체 조합원 투표를 거쳐 특정 정당 후보와의 ‘정책연대’를 이번 대선 정치 방침으로 정했지만,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 성향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노총 노동자들의 민주노동당 계급투표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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