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으로 훌쩍 날아간 킹콩걸 누나, 가부장제가 부여한 성역할에 얽매인 나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누이는 ‘킹콩’이었다. 어릴 때부터 욕심이 많았다. 하버드나 예일 같은 느낌이 나는 외국어들을 동경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이다음에 크면 외국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 초 어느 해던가, 누이는 지금은 ‘헤럴드미디어’의 사장이 된 홍정욱씨의 도미 유학기 을 읽으며 밤을 지새웠다. 책 속엔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의 푸른 캠퍼스와 그 속을 활보하는 싱싱한 젊음들이 빛나고 있었다.
가벼워진 여성들, 중간에 낀 젊은 남성들
근처에 킹콩이 한 마리 있으면, 주변 사람들은 힘겨워지기 마련이다. 킹콩은 코코넛도 많이 먹고, 바나나도 많이 먹고, 소리도 크게 지르며, 물도 많이 마신다. ‘외국으로 뜨고야 말겠다’는 누이의 고집은 끈질기고도 집요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년 동안 그 학교의 교직원 생활을 하며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그 무렵 집에는 불행이 닥쳤다. 1997년 아버지는 간암을 얻어 8개월 만에 숨을 거뒀다. 이듬해 누이는 훌쩍 캐나다로 떠났다. 그때 누이는 스물다섯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 어린 게 겁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는 어머니와 대학교 3학년에 다니던 내가 남았다. 김포공항에서 누이를 떠나보내고 한 달이 못 돼 군대에 갔다. 그해 장마로 중랑천이 범람했고, 서울 상계동 아파트의 지하실이 침수됐다. 논산에 있던 한 달 반 동안 어머니와 수십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머니는 “홍수 때문에 밤에 불이 안 들어와 무섭다”고 했고, “혼자 생활하니 겁이 난다”고도 썼다. 비가 많이 온 탓에 훈련은 생각보다 고되지 않았지만, 허리가 아파 마지막 훈련 코스인 ‘행군’ 때는 완전군장을 지지 못했다. 그래도 힘들 것은 없었다. 대학교 2학년 때 ‘토익 고득점자’의 반열에 오른 덕에, 훈련을 마치고 의정부에 있던 미군부대로 배치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쯤 집으로 나와 어머니와 밥을 먹었다. 그때, 깃털처럼 가볍게만 보였던 누이의 인생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것은 당신의 편견”이라는 지적이 가능하겠지만, 또래 여자아이들에게서도 깃털 같던 누이의 가벼움이 느껴질 때마다 밀려오는 질투심을 감춘 채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려야 했다. 지난 시절 가족을 위한 여성들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숨통을 옭아매는 가부장제 아래서 여성들은 ‘일벌레’거나 ‘살림 밑천’이었다. 영화 가 개봉된 것은 1975년 2월11일 국도극장에서였다. 부잣집 식모로 지내던 시골 처녀 영자는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집을 뛰쳐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한쪽 팔을 잃는다. 영자는 보상금 30만원을 받는데, 그다음 얘기가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자는 “동생들을 위해 써주세요”라며 그 피 같은 돈을 전부 집으로 부치고 만다.
시간이 흘렀고, 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여성들을 억압하던 여러 제도적·사회적·심리적 기제들은 해체되는 중이다. 가부장적 질서에 기대어 혜택을 받았던 나이든 남성들은 허울뿐인 권위를 아슬아슬하게 지켜내고 있고, 평생 억압을 당했던 나이든 여성들은 다리 뻗고 여생을 호령하며 지낼 차례를 맞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가부장제의 권위를 부정하고 있는데, 남겨진 것은 중간에 낀 이도저도 아닌 젊은 남성들이다.
일상에서 관찰되는 역차별의 모습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선택’의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얼마 전 라는 여성 처세서가 나왔는데, 스물여섯에 졸업을 했고, 취업을 해야 했고, 다행히 취업을 했고, 하루하루 생활을 위해 돈을 벌고 있는 내 처지에서는 그런 고민 자체가 호사스러운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래의 여자아이들은 3년 먼저 사회에 나왔고, 가부장제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역할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으며, 그에 따라 (적어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기 혼자만을 위한 삶을 사는 데 주저함이 없어 보였다. 때로는 정말로 무모해 보이는 ‘결단’을 내리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런 킹콩들의 탄생을 보며 경탄 어린 눈으로 박수를 쳤던 기억이 여러 차례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남성들은 “결혼은 꼭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젊은 남성들이 아직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강요하고 있는 어떤 ‘성역할’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뜻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역차별의 모습은 일상 속에서도 가끔 관찰할 수 있다. 정선희 같은 여자 연예인들이 방송에 나와 남성을, 그것도 성적으로 희화화하는 말들을 쏟아내면 그것은 ‘쿨’하고 멋진 모습이 되고, 윤종신 같은 남자가 여성에 대해 수위를 넘는 발언을 하면 그것은 즉각적인 제재의 대상이 된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것이라는 여성계의 맹비난에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 몇 해 전인데, 이제는 남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광경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게 됐다. 요새는 ‘알파걸’들의 시대라는데, 군 가산점 문제로 광분하며 인터넷 공간을 오염시키는 ‘베타보이’들의 모습을 보며 그 도를 넘는 ‘찌질함’에 좌절하기도 했다.
내게 킹콩이 될 기회가 없었다고 말할 순 없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한다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의 일부 또는 전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사회가 네게 강요한 억압이며, 그것을 깨뜨리는 게 인간 해방”이라는 충고는 정중히 사양한다. 내겐 용기가 없었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밝히고, 그것에 당당해지려면, 주변에서 만만찮은 비난과 도덕적 훈계를 들어야 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남성들은 그리고 여성들은 킹콩이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미남이나 미녀가 될 수도 없다.
킹콩이 되면 삶은 더 고달파져
누이는 어떻게 됐을까. 누이는 ‘킹콩’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25살에 외국으로 떠난 젊은 여자아이가 헤쳐가야 했던 고된 삶에 대해 나는 짐작만 해볼 뿐이다. 이따금 전화를 걸어와 “그때 미안했다”는 말을 빙빙 돌려 말하길 좋아한다. 이제는 결혼하고 싶다는 얘기도 하고, 때로는 “네가 부러웠다”(아니, 내가 왜!)는 말도 한다. 나는 누이로부터 전화가 오면 퉁명스럽게 받고, “잘 지내냐”고 안부를 묻는다. 킹콩이 되면 삶은 더 고달파진다. 킹콩은 많이 먹고, 많이 싸고, 전투기들의 기총소사를 피해가며 우렁찬 함성도 질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행복은 잠시뿐. 세계와 화해하지 못한 킹콩은 처절한 싸움 끝에 비참한 사냥감으로 최후를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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