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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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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여러분, 은혜 받으셨습니까

등록 2007-04-13 00:00 수정 2020-05-03 04:24

상품 가격 하락으로 후생 증대한다고 선전하지만 가계의 고용과 소득수준에 미칠 영향은 간과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면 국민들의 소비 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우선 대규모 개방으로 소비 품목마다 가격경쟁이 격화되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지금보다 싼값에 국산·외제 상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재정경제부는 한-미 FTA 체결의 기대 효과로 ‘소득 증대와 소비자 후생 증가’를 꼽고, 수입품과 국내 상품의 가격이 낮아져 물가가 안정되고 상품 선택폭도 다양해짐에 따라 소비자들이 직접적으로 후생 증대 효과를 누릴 것으로 전망했다. 그동안 ‘제한적 경쟁’ 속에서 국내 소수 독점기업이 누려온 생산자 잉여를 이제 한-미 FTA 개방을 통해 소비자들이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개방의 수혜자는 소비자들”이라고 밝혔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한-미 FTA가 발효되면 10년 뒤에 한국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2007년보다 7.75%(352억달러), 소비자 후생 수준은 6.99%(281억달러)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대량실업 예고

그러나 정부는 경제를 단순히 생산자(기업)와 소비자(가계)로 구분해 개방의 소비자 후생 효과를 홍보하고 있을 뿐, 한-미 FTA가 가계의 ‘고용’과 ‘소득수준’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간과하고 있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한국 경제의 각 부문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불어닥치면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급증할 공산이 크다. 지난해 6월 미국 국제경제연구소(IIE)의 보고서를 보면, 쌀을 제외하고 한-미 FTA를 맺을 경우 1차 산업 분야에서 14만4천 명, 기타 기계·장비 분야 종사자 9만1천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의 용역보고서도 한-미 FTA 타결 때 제조업에서만 최대 6만7천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고 전망해 ‘대량 실업’을 예고했다. 수입차 매장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한우의 절반 값에 외국산 등심을 사먹을 수 있게 된다고 말하지만, 투자자의 ‘이행의무 부과’가 금지돼 다국적 기업들은 기업 인수·합병 때 고용승계를 피해갈 수도 있다.

한-미 FTA로 가격이 크게 떨어질 것으로 보는 대표적인 품목은 자동차다. 자동차업계는 수입관세(현행 8%) 철폐와 자동차 세제(특소세·보유세) 개편에 따라 미국산 자동차의 국내 판매 가격이 대략 4∼7% 정도 낮아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대해 포드코리아 쪽은 “한국의 관세가 철폐되면 하역 비용, 마케팅 비용, 부가세 등을 감안할 때 5∼6% 정도 차값 인하 요인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발 더 나아가 포드·GM·다임러크라이슬러 등 미국산 자동차 쪽이 적극적으로 한국 시장 마케팅에 나서면서 차값이 10% 이상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쪽도 있다. 수입자동차공업협회에 따르면, 이들 미국 자동차 ‘빅3’의 국내 시장점유율은 포드 4.17%(1600여 대), 다임러크라이슬러 6.4%, GM 1.13% 등 12% 가량이다. 물론 미국 공장에서 생산되는 BMW와 도요타·혼다 등 다른 수입차 브랜드들도 관세 철폐 효과를 누리기 때문에 가격을 낮출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관세는 판매가가 아니라 수입원가 기준으로 매겨지고, 국내 운송·보관 과정에서 별도의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관세가 내린 만큼 판매가가 낮아지는 건 아니다. 특히 노동자 가계가 한-미 FTA로 인해 실직 사태를 맞거나 고용 불안에 직면하게 되고, 자신이 다니는 국내 기업의 제품 가격이 떨어지면 해당 기업의 수익성도 나빠져 결국 자신의 근로소득까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아무리 미국산 자동차 가격이 낮아진다 해도 고용이 불안하고 소득이 떨어진다면 소비자 후생은커녕 오히려 손실만 입게 된다.

미국산 쇠고기 들어오면 한우 가격 폭락

농산물 가격은 어떨까? 상품·농산물 관세양허 합의안의 관세 철폐 기간은 연간 균등 비율로 관세를 줄여나가는 방식이다. 예컨대 현재 수입관세율 40%인 쇠고기 관세를 15년간 철폐하기로 했다는 건 해마다 균등 비율(연간 2.66%)로 관세를 낮춰 15년 뒤에 관세를 완전히 없앤다는 뜻이다. 따라서 산술적으로 해마다 2.66%씩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가격이 떨어지게 된다. 현재 한우 등심(500g 기준) 소비자 가격은 대략 4만원선인데, 비슷한 부위의 호주산 쇠고기는 2만원에 팔리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적어도 가격면에서는 (관세 40%를 물고 들어오는) 호주산보다 싼값에 미국산 쇠고기를 사먹을 수 있게 된다. 또 값싼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따라 가격경쟁이 붙으면 호주산 쇠고기도 1만5천원대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재경부는 ‘소비자 후생’을 강조하면서 한우와 수입 쇠고기가 더욱 차별화되고, 미국산 쇠고기의 상당 부분이 호주·뉴질랜드산으로 대체 소비될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한우 가격이 폭락할 것”이라는 농민들의 우려와 달리, 오히려 소비자 선택에서 한우와 미국산 쇠고기가 차별화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건국대 윤병선 교수는 “값싼 미국산 쇠고기가 들어오면 국내 한우 가격이 크게 떨어지게 되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며 “특정 농축산물 가격은 다른 농축산물과 보완 또는 대체 소비되는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쇠고기 가격이 떨어지면 돼지고기, 닭고기 등 육류 가격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게 되고 다른 전체 농산물로 이 효과가 파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장벽이 크게 낮아진 만큼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한우 등 국내 육류 가격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커졌다.

감귤의 경우, 감귤 비수확기에는 미국산 오렌지 수입관세(현행 50%)를 7년에 걸쳐 철폐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국내 감귤의 절반 가격에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를 사먹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특히 감귤 수확기에는 계절관세(현행 관세 유지)를 적용하되 일정한 양(2500t)은 무관세 수입쿼터를 보장해줬다. 외교통상부 한-미FTA기획단 관계자는 “현행 관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상징적인 개방의 의미로 소량을 무관세 수입쿼터로 보장해 시장 접근을 허용해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식용 감자(현행 관세율 304%), 식용 대두(487%)에도 소량 무관세 수입쿼터를 보장해줬는데, 식용 감자의 경우 ‘소량’은 3천t으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병선 교수는 “농산물 가격은 약간의 공급 충격에도 크게 출렁이게 마련”이라며 “농산물 가격이 떨어졌다고 해서 수요가 갑자기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국내 오렌지 값이 떨어지면 사과·배 값도 크게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산 농산물의 수입 파고로 인해 국산 농산물의 가격도 떨어져 도시 소비자의 후생은 높아지겠지만,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인 농가는 농사를 접고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다.

물론 리바이스 청바지와 나이키 신발 등 미국 브랜드라도 현지가 아닌 타이·중국 등에서 생산된 경우엔 관세 철폐 혜택을 보지 않기 때문에 가격 변화도 별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미 FTA는 미국 안에서 생산된 제품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휴대전화 같은 주요 정보통신 제품은 이미 1990년대 말부터 관세가 없어졌다.

비싼 외국 신약에 기대야하는 환자들

반면, 한-미 FTA에 따른 소비자 후생 ‘손실’의 대표적인 품목으로는 의약품이 꼽힌다. 오리지널 신약의 특허 기간이 연장돼 미국 제약사는 더 오랜 기간 신약을 독점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국내 소비자들은 비싼 외국 신약에 의존해야 한다. 정부는 “(오지지널 신약의) 특허 심사 완료 기간과 법원소송 기간만큼 의약품 특허 기간을 연장해주기로 했는데, 그 기간 동안 국내 제약업체의 복제약(제네릭·신약 가격의 약 80%)이 나오지 못해 발생하는 매출 손실은 전체 국내 의약품 시장 매출(연간 9조원)의 1%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보건의료단체연합 우석균 정책실장은 “특허 연장 기간이 최소한 30개월은 될 것으로 보이는데 특허 연장에 따른 제약업계 피해가 연간 4천억원 이상”이라며 “제약업계의 피해뿐 아니라, 약값을 깎겠다고 우리 정부가 내놓았던 ‘약값 적정화 방안’이 한-미 FTA로 사실상 무력화됨에 따라 소비자의 기대 이익도 사라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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