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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손학규인가, 왜 정운찬인가

등록 2007-03-30 00:00 수정 2020-05-03 04:24

<font color="darkblue"> 위기감에 휩싸인 범여권이 배팅을 시작했나… 대선가도에 깔려있는 변수들, 시민사회 세력과의 연대 가능한가</font>

▣ 류이근 기자ryuyigeun@hani.co.kr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국회·언론사·시민단체·학계 등 정치 분야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범여권 대선 후보로 누가 가장 적합하냐’는 질문을 던졌더니,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25%로 1위를 차지했다. ‘깜짝 결과’였다. 다음으로 고건(23%), 김근태(10%), 박원순(6%) 순으로 나타났다. 천정배, 강금실, 정동영은 각각 4% 수준이었다. 시간이 좀 지난 2006년 12월28일의 조사 결과지만, 정 전 총장이 범여권의 유력한 대선 예비후보로 떠오른 결정적 조사였다.

범여권의 인물난과 개인적 욕망

지난 1월28일엔 좀더 놀랄 만한 조사가 나왔다. 와 미디어리서치가 전국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여론조사에서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범여권 단일후보 적합도’에서 14.9%의 지지를 얻어, 2위인 정동영(14.0%)을 오차범위 안에서 앞섰다. 강금실(6.6%), 김근태(5.2%), 유시민(3.1%), 정운찬(2.1%)이 뒤를 이었다. 손 전 지사는 한나라당 당적을 가진 한나라당의 예비후보였다.

과거형의 두 조사는 조사 대상과 시점, 방식이 다 다르지만 현재성을 띤 공통점이 있다. 범여권의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어느새 정운찬과 손학규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이 시비할 만큼 ‘범여권’이란 말은 명쾌하게 규정되는 단어가 아니지만,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을 뺀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탈당파, 열린우리당의 전신인 민주당 등의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앞서 말한 공통점은 손 전 지사가 1월19일 한나라당을 탈당하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물론 손학규는 한나라당을 떠났을 뿐 아직 어떤 세력과 결합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현실성이 아주 낮지만 범여권이 아닌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뒤 대선 출마로 나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정운찬은 대선판에 뛰어들지 여부를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두 사람이 범여권의 후보에 도전한다는 것은 여전히 불확실한 명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불확실한’이라는 수식어에 개의치 않는다. 몇 발짝 더 나아가, 오랫동안 거론되고 있는 정동영·김근태·천정배 등의 이름마저 빼고 정운찬과 손학규 가운데 누가 범여권의 ‘구세주’가 될 것인가라는 성급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그 바탕엔 그나마 손학규와 정운찬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왜 정운찬과 손학규일까? 일차적으로 범여권의 인물난이다. 당사자들은 이런 평가에 동의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지만, 정동영·김근태·천정배란 이름은 신선함을 주지 못했다. 제대로 경쟁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한동안 ‘제3 후보론’이 범여권을 떠돌아다녔던 것도 이 때문이다. 지지자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쏠렸다. 이들의 필요와 절박함은 대선에 나설지 “나 자신도 모른다”고 얘기하는 정운찬을, 한나라당에서 지난 3년여 동안 대선 후보로 귀한 대접을 받아왔던 손학규를 범여권의 예비 후보로 만든 동력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론 다 설명되지 않는다. 손 전 지사와 정 전 총장의 개인적 욕망도 봐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손학규의 경우, 그가 지닌 이념적 색채가 범여권의 후보로서 문제될 게 없다는 동의가 범여권 중심부에 자연스럽게 퍼졌던 거다. 정운찬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 총장이 갖는 상징성과 그가 나름대로 현실정치와 정책에 대한 소신을 꾸준히 밝혀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 요소는 두 사람이 대선 후보로서 지닌 잠재적 경쟁력이다.

장외주가 제 역할 할 수 있을까

결국 범여권 후보로서 두 사람의 등장은 한나라당에 권력을 내줘선 안 된다는 공감대를 형성한 사람들의 집합적 요구이자 인물 찾기의 귀결이다. 범여권은 최소한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경선에 둘 다 참여하길 원한다. 그 속에서 손학규와 정운찬이 조우할 가능성이 있다. 범여권의 후보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감안하면 두 사람은 경쟁자다. 손학규 전 지사가 ‘드림팀’의 일원으로서 정운찬 전 총장을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치켜세웠지만, 두 사람이 승부의 결과를 함께 갖는 팀의 리더가 될 순 없다.

두 사람은 각각 갖고 있는 정치적 자산과 조건이 다르다. “정운찬은 신선하지만 검증되지 않았고, 정치적 경험이 없다. 장외주가 시장에 들어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손학규는 정치적 노련함과 경력이 있지만 지난 14년 동안 속해 있던 곳에서 하루아침에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인제와 다를 수 있겠지만, 자유로울 순 없다.”

정치컨설턴트인 김윤재 변호사는 정운찬 전 총장과 손학규 전 지사의 장단점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여기에 굳이 덧붙인다면 한국 정치를 여전히 구속하는 지역정치 구도에서 충청이란 확실한 지역기반을 가진 정운찬의 상대적 장점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운찬은 대선판에 발을 디딜지 아직 결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결심을 밝히지 않고 있다. 대신 결정을 재촉하는 목소리들은 커지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임종석 의원은 “정운찬이 정치를 할지 재고 있다. 너무 길어지면 신뢰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올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민주당 소속 의원실의 보좌관은 “자신의 세력이 전혀 없다”는 점을 정운찬의 고민의 핵심으로 짚었다. 그렇다고 정운찬이 당장 범여권에 몸을 담글 순 없는 노릇이다. 한나라당에 남아서 여전히 손 전 지사를 돕는 정문헌 의원이 “여권과 물타기가 되면 죽는다”고 한 말은, 손 전 지사뿐만 아니라 정 전 총장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

손 전 지사는 이미 모험을 시작했다. 주사위를 던졌다. 탈당이란 정치적 선택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당장 여론조사에서 손 전 지사의 지지율은 조금 상승했다. 10%가 조금 넘는 고무적인 조사(3월20일치 CBS-리얼미터 공동 조사) 결과도 나왔다. 1% 안팎의 의미 없는 수치에서 맴돌고 있는 정운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지만 ‘몸’이 가벼웠던 손 전 지사가 대선 예비후보치고는 비교적 조용히 당을 나왔지만, 이젠 자신의 세력을 만들고 다지면서 몸을 불릴 때로 보인다. 손 캠프의 한 인사는 “(2002년) 정몽준은 제도권 안에 있는 정치세력을 무시하고 밖에 있는 세력을 갖고 뭘 해보려다 망했다”며 “우린 정몽준과 같은 실수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래구상 “더 검토해 봐야 한다”

공통적인 상황도 많다. 둘 다 범여권의 기준으로 볼 때 ‘굴러온 돌’이다. 기득권이 없다. 열린우리당 등 범여권에 지분이 없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조직이 힘을 발휘하는 본격적인 경선 국면 이전까진 ‘실패한 정당’과 거리를 두는 게 나을 수 있다.

범여권은 온통 환영 일색이다. 손학규와 정운찬의 중도개혁적인 이미지는 범여권을 떠난 중도 부동층을 다시 불러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낳고 있다. 하지만 한나라당엔 불길한 징후다. 손 전 지사의 탈당은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를 향한 항해가 순탄치만은 않을 거라는 예고편이다. 산술적으로 손 전 지사가 지닌 10% 안팎의 지지율이 범여권으로 옮겨가는 것만 문제가 아니다. 손 전 지사가 범여권으로 가면서 지리멸렬하던 범여권에 생명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범여권에서 손학규와 정운찬이란 걸출한 인물의 경쟁은 그동안 이명박과 박근혜를 중심으로 진행돼온 한나라당의 대선 흥행 독점력을 반감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 이념 성향에서 당의 외연을 넓혔고, 대선 후보군의 삼각 경쟁 구도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손 전 지사가 빠진 구멍은 너무 커보인다.

범여권 내에 두사람에게 우호적인 요소만 있는 건 아니다. 이들은“여태까지 없었던 변수”(김윤재)인 노무현 변수를 맞닥뜨려야 한다. 갈수록 힘은 떨어지겠지만 이 변수가 어떤 방향으로 튈지 섣불리 장담할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두 사람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노무현은 “보따리장수 같은 정치를 해서야 나라가 제대로 되겠냐”며 지나친 정치 개입 논란을 낳으면서까지 손학규를 세게 비판했다. 또 “다음 대통령은 정치를 알았으면 한다”며 이명박 전 서울시장뿐 아니라 정운찬 전 총장까지 싸잡아 자질이 불충분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역으로 정운찬, 손학규는 ‘반노’(반노무현)다. 그래야만 사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정동영·김근태·천정배와 달리 노무현에게 정치적 부채가 전혀 없다. 계속해서 두 사람이 노 대통령과의 대척점을 분명히 할 수 있는 조건이다.

두 인물이 범여권이란 울타리 안에서 앞으로 어떤 세력과 연대할지도 관전 포인트다. 속단할 수 없지만 오픈프라이머리(완전 국민참여 경선제)에 범여권의 모든 세력들이 빨려들어올 가능성이 있다. 그 이전에 다른 대선 예비후보들과 마찬가지로 손학규와 정운찬도 자신들을 지지하는 무리의 정치세력화를 시도할 개연성이 높다. 손학규의 경우 내년 총선까지 겨냥하고 창당을 준비하는 ‘전진코리아’와의 연대에 적극적이다. 이 단체의 이왕재 운영위원은 “우리가 가는 길에 손학규가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 진영의 재집권을 노리며 정치권 바깥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창조한국 미래구상’의 경우 손 전 지사와의 관계가 아직 정립되지 않았다. 정대화 미래구상 공동실무위원장은 “논의를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한-미 FTA 찬성론자인 손 전 지사를 개혁진보 진영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지 검토할 것”이라며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인생의 100%를 민자당과 신한국당에서 보낸 정통 한나라당 사람인 그가, 과연 진보개혁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 논의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미래구상은 정운찬엔 호의적이다. 아무래도 범여권 전체가 한나라당에서 온 손 전 지사보다 정 전 총장에 친밀감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인물이 아니라 구도가 문제다”

시민사회 정치세력과 두 예비 후보와의 관계를 따져본 것은 열린우리당이 2월23일 대통합신당 추진 방향으로 시민사회 세력과의 연대를 전제로 여러 가능성을 논의했기 때문이다. 명분과 도덕성을 쥐고 있기 때문에 실제 그들이 지닌 역량이나 대중적 지지보다 과도하게 평가되고 있지만, 시민사회 세력은 한동안 범여권에서 독립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해나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인물에 급급한 현실 정치권과 정책을 우선시하겠다는 시민사회 세력의 이해가 갈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열린우리당과 통합신당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미래구상은 손 전 지사의 진보성과 정책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적지 않은 진보 진영의 범여권 지지자들은 정운찬 전 총장한테도 비슷한 의문을 품고 있다.

둘 중 누가 이길 것인가란 문제만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둘 다 역부족일 수도 있다. 김윤재 정치컨설턴트는 “두 사람이 나온다면 중도 부동층을 붙잡을 수 있지만, 진보가 고스란히 다 따라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단순한 지지기반 마련이 아니라 그런 면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좀더 개혁적인 정치세력과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지적인 셈이다.

“우리 세력 자체가 구조적으로 실패한 집단으로 비쳐지고 있다. 우리 진영은 인물보다 구도가 중요하다. 진영의 지지도가 워낙 낮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와도 지지도가 오르지 않는다.”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은 두 후보를 거론하면서 근본적인 문제를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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