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와 자신감이 보이는 손학규 전 지사…“천천히 정운찬과 연대 의논하겠다”
▣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탈당하면 시베리아에 있는 것처럼 추울까?
‘시베리아’는 탈당했을 때의 비참한 상황을 상징하는 말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겨냥해 “(탈당하면) 시베리아처럼 추운 데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시베리아’는 정치권의 유행어가 됐다. 손 전 지사가 한나라당을 탈당한 지 사흘이 지난 3월22일, 기자는 탈당 뒤 심경과 향후 행보를 묻기 위해 손 전 지사 자택을 찾아갔다. 인터뷰 약속을 잡을 수 없었기에 아침 일찍 손 전 지사의 집 앞에서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밖에서 오랫동안 추위에 떨었던 게 내심 억울했는지 손 전 지사를 만나자 대뜸 ‘시베리아처럼 추웠다’는 말이 나왔다. 손 전 지사는 기자의 농담에도 “허허” 하며 웃어넘겼다. 왠지 모를 여유와 자신감이 느껴졌다. 탈당이 마냥 춥지만은 않은 듯했다.
범여권과의 교감 부인 안해
그래서일까. 손 전 지사는 과의 단독 인터뷰 내내 ‘적극적으로’ ‘본격적으로’ ‘확신한다’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며 예전보다 능동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많이 했다. 손 전 지사는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일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무능 좌파도 수구보수도 아닌 미래지향적 태도가 필요하다. 평화와 국민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겠다. 미래와 세계를 보지 않거나 과거 영화에 머물러 향수에 젖은 정치, 낡은 정치, 구태정치를 극복하는 제3의 길을 ‘본격적’으로 모색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어나갈 거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갈 것이다.”
손 전 지사의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일단 탈당에 대한 여론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국갤럽이 의뢰로 3월19일 손 전 지사의 탈당 직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탈당에 ‘긍정적’이라는 응답은 30.1%, ‘부정적’이라는 응답은 34.9%로 나타났다. 같은 날 SBS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에서는 긍정적이라는 응답이 41.9%, 부정적이라는 응답이 39.6%로 비교적 팽팽하게 나왔다. 손 전 지사의 지지도는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7.0%,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8.2%로 나타났다. 특히 20일 CBS가 리얼미터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10.1%를 기록해 ‘마의 10%’를 넘었다. 손 전 지사의 홍주열 비서팀장은 “여론조사 결과가 생각보다 좋다.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손 전 지사의 핵심 측근은 “한나라당은 손학규란 새를 가두는 새장이었다. 새는 이제 광야를 자유롭게 날 것”이라고 말했다. 탈당이 추운 시베리아가 아닌 손 전 지사의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라고 보는 것이다.
한나라당을 등진 손 전 지사는 새로운 세력을 만들기 위해 범여권 쪽과 교감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는) 의식적으로 정치권과의 교감을 자제해왔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할 생각이다. 전진코리아는 물론이고 시민사회 세력, 청년세력, 아직 조직되지 않은 많은 개인을 묶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태도는 정치권과 거리두기를 하는 듯한 과거 발언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탈당 다음날인 3월20일, 문화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에 출연할 때만 해도 ‘(정치세력화를 위해) 제일 먼저 만날 사람은 누굽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아직은 만날 때가 아니다”라고만 말했었다.
그러나 3월22일 손 전 지사는 과의 인터뷰에서 “기존 정치권에서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선진 개혁의 뜻을 펼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여당, 야당에 많이 있다. 구태정치를 벗어나야 한다고 느끼는 분들, 벗어던지고 나오고 싶어하는 분들, 낡은 진보가 아닌 실용주의 진보로 거듭나는 정치인들이 계신다”고 말했다. ‘그런 분들과 교감하고 있냐’고 묻자 손 전 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 순차적으로 그분들을 엮어가면 기존 정치틀을 바꾸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교감하는 사람들 중 김부겸 열린우리당 의원 등 수도권을 기반으로 하는 여당 의원들도 포함되냐’는 물음에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부정하지 않았다.
손 전 지사는 범여권의 대선 예비주자들에 대해서도 여유 있는 태도를 보였다.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손 전 지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내심 싫지 않은 듯 기분 좋은 미소만 지었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에 대해서는 “지금은 (정 전 총장에 대해) 말할 시점이 아니다”라고 답변을 회피했다. 그러나 잠시 뒤 다시 “정운찬 전 총장은 경제를 보는 시각이 있고, 서울대 총장으로서 경영 능력도 있고, 품성도 좋고 신망이 있는 분”이라고 칭찬했다. 또 “앞으로 (정 전 총장과) 천천히 의논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 전 총장과의 연대 가능성을 열어둔 발언이다. 정운찬 전 총장과 가까운 김종인 민주당 의원이 3월20일 “정 전 총장은 손 전 지사와 연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과 대조적이다.
다만 지금까지 ‘중도개혁 세력’으로 알려진 손 전 지사는 자신과 자신이 연대할 정치세력들을 “‘중도’로 표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중도는 자칫 잘못하면 기회주의로 보일 수 있다”며 “민주화, 산업화에 얽매이지 않는 ‘선진화’란 과제를 해결 할 ‘선진개혁 세력’이다”라고 밝혔다. 이념이 아닌 실용주의적 면모를 강조하겠다는 것이다.
창당? 한 알의 밀알 될 것
손 전 지사에게 자신이 주도하는 신당을 창당할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드는 데 나를 앞세우지 않고 내가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역할이든 할 것”이라고 답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늦었다”며 침묵을 먼저 깬 손 전 지사는 사무실로 가기 위해 검정색 스포츠유틸리티 차량 앞좌석에 급히 올라탔다. ‘왜 편한 뒷좌석에 타지 않냐’고 묻자, “앞에 타면 훤하잖아”라고 웃으며 말했다. 손 전 지사의 앞날도 훤할 수 있을까? 시베리아에도 봄은 올까? 3월 말인데 바람은 제법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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