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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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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를 기억하게 하옵소서

등록 2007-03-09 00:00 수정 2020-05-03 04:24

유대인 수용소·뉘른베르크 법정 등을 통해 나치 범죄를 반성하는 독일…수도 베를린 한복판에도 추모 공간, 화해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다

▣ 뮌헨·베를린·뉘른베르크=글·사진 서재철 녹색연합 국장

독일 뮌헨시 중심가에서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다하우(Dachau)수용소는 나치 최초의 집단수용소로 나치수용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은 1933년 3월10일 만들어졌다. 공식 기록을 보면 전쟁 말기까지 나치수용소는 독일 남부 지방과 오스트리아에 설치됐으며 그 수는 150여 개나 됐다. 2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이곳에 수용됐다. 1945년 4월 연합군에 의해 3만2천여 명이 풀려났지만, 고문·영양실조·전염병 때문에 3만5천여 명은 살아서 수용소를 나가지 못했다.

“아시아의 미래가 안타깝다”

웬만한 교도소보다 큰 규모인 다하우수용소는 유대인 최초의 생체실험으로도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광기가 얼마나 끔찍했는가는 수용소 한쪽의 울창한 고목들 사이에 자리잡은 가스실과 실험실이 말해준다. 인간을 생체실험 대상으로 삼아 학살의 절정을 보여준 현장이다. 현장에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건물과 각종 생체실험 장비, 도구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독일 공군 소속이던 의학연구소는 고압·저온 등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 등을 실험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전하고 있는 이곳에는 독일은 몰론 근처 나라의 학생과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도 평일이었으나, 여러 지역의 학생들이 한나절에 500명이 넘게 이곳을 찾을 정도였다. 독일은 나치기록전시관과 수용소기념관 등의 방문이 역사수업 정규과정으로 돼 있다. 중·고생들과 대학생들이 수업의 일환으로 학살 현장을 방문해 나치즘의 광기와 잔학함의 실체를 배운다.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교육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북부 에센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왔다는 로타 수키에닉(17)양은 “우리 학교는 역사와 윤리 등의 과목 시간을 대부분 토론과 현장방문으로 보내는데, 역사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며 “이곳에서 확인한 사실들은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이야기들인데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억하겠다”며 소감을 밝혔다. 역사 수업이 ‘필수’에서 ‘선택’으로 바뀐 우리 현실과 비교된다. 스위스·오스트리아·네덜란드·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 등 독일과 가까운 나라들의 학교에서도 수학여행이나 역사 수업 차원에서 이곳을 방문한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스위스의 한 중등 교사는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이곳은 공유하고 나눠야 할 가치에 대해 배우는 곳이다.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다시 그런 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한국과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아시아의 미래가 안타깝다.”

다하우의 방문객에는 군인들도 포함돼 있다. 방문했던 날 오후에 독일연방군 소속 장교 20여 명이 제복을 입고 정훈교육 과정의 하나로 이곳을 관람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를 곱씹게 하는 대목이었다. 독일은 장교의 기본 의무에 독일 역사를 자세히 분석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특히 독일 역사의 어두운 면, 1939년부터 1945년까지를 세분화해 이해하는 교육을 받도록 돼 있다. 현장에서 만난 독일군 공병대 소속 디안 알피트 중위는 “독일 역사를 분석하는 독일 정치 교육 과목에 이곳 방문이 포함돼 있다”며 “우리는 윗세대나 그 윗세대가 참여하거나 배제될 수밖에 없었던 정치 체제의 배경을 간과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인간이 출생지나 정치 체제, 종교 때문에 다른 인간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다”고 덧붙였다.

원형 그대로 보존된 뉘른베르크 재판소

다하우가 독일 전체의 대표적 수용소라면 베를린 근처의 작센하우젠(Sachsenhausen)수용소는 북부 지방을 대표하는 곳이다. 이곳은 베를린 중심가에서 기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오라니엔부르크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작센하우젠 마을에 있다. 과거 동독 치하에서는 국립박물관이었다가 독일 통일 이후 원래의 역사적 의미를 담는 공간으로 조성했다. 이곳에 처음 유대인이 수용된 것은 1938년이었다. 전쟁 말기까지 작센하우젠수용소를 거쳐간 20만 명 중 10만 명이 강제노동으로 죽거나 처형됐다. 이곳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당시 상황을 전하는 수백 가지의 책과 보고서였다. 독일이 얼마나 과거 역사를 깊이 되새기는지를 단박에 확인할 수 있었다.

베를린에는 가장 최근에 조성된 대표적 나치 희생자 추모 공간이 있다. 2005년 5월10일 문을 연 베를린 홀로코스트기념관은 통일 독일의 상징인 브란덴부르크문 옆에 있다. 통일 수도의 한복판을 내준 것은 독일의 역사 인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역사에 대해 가해와 피해의 화해는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공간에서 실현하고 있는 셈이다. 죽은 자의 관을 상징하는 직사각형의 콘크리트 구조물 2711개가 격자 형태로 놓인 기념관은 과거의 사진과 문서 등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의 기억을 간결하지만, 냉철하고 날카롭게 붙들고 있다.

독일 나치 기념 시설 중 또 하나의 독특한 공간은 남부 바이에른주의 뉘른베르크 기록전시관(Dokumentationzentrum)이다. 지난 2001년 새롭게 태어난 이곳은 나치의 흥망사가 그대로 도시 속에 녹아 있어 독일의 대표적인 역사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1935년 9월15일 독일 의회는 ‘나치인종법’으로 불리는 ‘뉘른베르크 법’을 공표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배제가 법적으로 공인된 순간이었다. 이 법은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뉘른베르크에서는 나치 전범들이 법의 심판을 받은 국제 군사재판인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대규모 공습에도 훼손되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오늘날 독일 어느 곳에서도 이곳처럼 나치즘의 흔적이 새겨진 건축물이 완벽하게 남아 있는 현장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구조물의 역사적 의미는 크다. 기록전시관의 영구 전시 주제는 ‘매혹과 테러’다. 독일인이 어떻게 나치의 이념에 매혹됐고, 그 끔찍한 결과는 어떻게 드러났는지 연대기순으로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20명 안팎의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해마다 17만여 명의 방문객

기록전시관의 수석연구원이자 역사학자인 에카 디츠페빙거 박사는 “해마다 미국·유럽·중국·일본·남미 등에서 17만여 명의 방문객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들 나라의 언어로 된 오디오 정보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이런 사회적 경험들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역사적 실수를 반복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전시관 밖 시내 곳곳에도 나치 당시의 사진과 설명이 곁들인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생활 속에서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노력으로 지난 2001년 뉘른베르크시는 유네스코 인권상을 받았고, 지금은 ‘나치의 도시’라는 오명을 벗고 평화와 인권의 도시로 탈바꿈했다.

과거에 대한 독일의 태도는 명확하고 일관돼 있다. 독일 방문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일본이었다. 독일에서도 통독 이후 사회 일각에서 네오나치즘이 불거지고 있지만, 사회의 기본적 바탕과 전체적 방향은 뚜렷했다. 그것은 역사에 대한 끊임없는 기억과 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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