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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진보의 분화가 너무 빠르고 세다

등록 2007-02-28 00:00 수정 2020-05-03 04:24

참여 정부는 삶의 질 향상엔 실패했으나 의도의 진보성은 분명해…시민사회 중심으로 개헌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정책 연합 나서야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박명림/ 연세대 대학원 교수·정치학

① 노무현 정부를 단일 의제로 평가해선 안돼

노무현 정부를 진보 정권이라고 본다. 정책과 정치적 의도, 과정 셋으로 나눠보면 의도의 진보성은 분명하다. 과정에서는 사회적 한계 때문에 진보와 보수를 왕래했다. 결과적으로는 진보와 보수의 거리가 상당히 커졌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뿐 아니라 지지 세력과 비지지 세력의 거리가 더 벌어졌다.

복지와 양극화 문제에 대해 DJ의 생산적 복지 개념을 이어받아 이렇게 양극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려는 정부를 찾기 힘들다. 또 남북 관계와 한-미 관계에서도 몇 가지 구조적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한-미 관계에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로 대표되는 호혜적 관계 구축을 노력하고 있다. 남북 관계에서 역대 어느 정부보다 평화 우선 원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상당한 진보성을 인정해줘야 한다. 한 정부의 평가를 단일 의제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인권 증진이나 개혁 확대, 복지, 평등, 환경, 여성 문제 등 근본적 핵심 가치가 중첩돼 있다. 이런 측면에서 DJ 정부나 노무현 정부나 한국적 지평에서 보수라고 할 수 없다. 명백히 진보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얼마나 기여했느냐는 면에서는 평가가 가혹할 수밖에 없다. 사회의 구조변동이 구체적인 시민 개개인의 삶의 질 향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비판받아야 하는 대목은 민주적인 개혁 과제와 세계화(글로벌) 차원에서 신자유주의의 파고에 대한 진보적 대응의 문제에 있다. 세계 모든 정부가 이 이중 과제에 직면해 있다. 여기서 노무현 정부뿐 아니라 전세계의 모든 진보나 개혁 세력의 위기라고 본다. 한국 사회는 이미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추동하지 않더라도 이미 충분할 만큼 개방경제다. 박정희 이후 수출 지향, 외부 지향의 발전 전략에 더해 1997년 외환위기를 거쳐 국제 자본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중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한-미 FTA가 체결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것처럼 얘기해선 안 된다.

② 정책연합하면 순결성 위협받는 상황

1987년 이후 20년, DJ 이후 10년은 한국 사회의 거대한 구조변동을 몰고 왔다. 이는 다른 나라의 민주화 과정에서 보면, 특히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와 비교하면 민주화의 대가를 비교적 적게 치렀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 세력은 여러 조건에서 인권이나 자유, 복지, 평화, 여성 등 보편적 의제를 추구하는 가운데 사회주의 붕괴 이후, 특히 북한이 남북 체제 경쟁에서 탈락한 뒤 한국 사회의 재구성에 대한 대안을 상실했다. 또 진보 세력이 직면한 문제는 분화와 분열인데, 그 이유는 시민 세력의 분화가 너무 빨리 왔고 깊이 진행됐기 때문이다. 노동·농민·빈민, 특히 민주노동당, 민주노총으로 대변되는 민중담론과 DJ, 노무현 정부, 시민단체의 분화가 유럽 등의 사회에 비해 너무 빨리 왔다.

한국에서 정당연합이나 정책연합이 어려운 상황이다. 그렇게 할 경우 순결성과 정체성을 위협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분화가 너무 강력하다 보니 집권까지는 하는데 그 다음 정책적 괴리가 너무 크다. 사회·경제적 분야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진보 세력에 불만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은 이런 측면 때문인 것 같다. 한국 사회의 진보 세력이 더 내용을 가지려면 깊이 성찰해야 한다. 유럽에서 보수 세력을 제외하고 자유주의 세력과 노동 세력이 연합한 자유노동연합이 비교적 복지가 보장되는 사회국가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③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헌법개혁을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 개혁의 의제를 사회 개혁 의제가 아니라 정쟁 의제로 몰아간 측면이 있지만, 진보 진영이 이번 헌법 개혁에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일단 권력구조를 개혁하고 그 다음 단계에서 상시 개헌 구조로 넘어가서 경제·영토·환경·인권·평화 문제를 개혁하자는 2단계 개헌이 비교적 합리적이다. 이상적인 것은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헌법 개혁이다. 진보 진영이 계속 침묵하면 이번 개헌이 실패하든 성공하든, 차기 정부에서는 모든 사회 개혁 의제를 헌법에 걸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더군다나 보수 정부가 집권할 경우엔 진보적인 노무현 정부 아래 시민사회 공간에서 헌법 담론을 제기하는 것과 달리, 보수 국면에서 헌법 의제를 제기하는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올해 진보 진영은 묵직한 성찰을 했으면 좋겠다. 중·장기적으로 지구적 시민국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개방과 세계화 사회에 국민국가 정체성과 이익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타자(외국)에 대한 폭넓은 포섭이 필요하다. FTA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둘러싼 논쟁을 가만히 보면 이 두 문제가 얽혀 있다. 민족 담론과 세계화 담론이 얽혀 있다. 어느 하나를 버린다면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놓칠 수 있다.

④ 비판적 지지론은 옛날 의제, 정책 연합 모색해야

비판적 지지론은 지금의 담론 구도에선 옛날 의제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보수와 진보는 단기적 반응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하면서, 중·장기적 대응이나 반응에 소홀해왔다. 진보 진영이 이번 대선을 통해 더 개혁 의제를 지속시키고 싶으면 대선에 초점을 둬야 한다. 정책적인 연합이나 정당 연합을 통한 선거 연합을 모색해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차라리 한국 사회의 중·장기적 개혁 의제에 초점을 맞추는 게 낫다. 진보 진영이 선거연합을 통해서 대선 승리를 할 것인지 아니면 선거연합이 불가능하니 중·장기적인 개혁 의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냐에 따라 대선을 맞는 진보의 구심점도 달라질 것이다.

민주노동당이건 통합신당(시민사회의 제3세력 합류를 전제한)이건 정당 내에서 경쟁해서 국민들한테 의제를 제시해야 한다. 다음으로 정당 간에 경쟁하고, 그것에 일정한 합의가 모아지면 대선 경쟁에선 민주노동당과 통합신당 중 더 우세한 후보에게 다른 한쪽이 정책적인 대안 연합을 제시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⑤ 사회의 비전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자

진보 논쟁은 굉장히 의미 있는 논쟁의 시작이다. 민주주의나 사회 발전에 중요한 화두가 던져진 것이다. 최장집 교수가 처음 던질 때는 민주 개혁에 대한 성찰과 비판의 문제였다. 잘 발전시켜 학계나 사회가 ‘민주주의 논쟁’으로 확산시켰으면 좋겠다. 민주주의 논쟁의 내용은 리더십 차원에서 뭘 성찰하고 반성해야 하는지, 또 제도적인 차원에서 뭘 개혁하고 성찰해야 하느냐가 될 것이다.

민주화 이후 민주 대 반민주, 진보 대 보수의 논쟁에 묻혀 못해왔던 게 있다. 바로 한국 사회의 비전에 대한 논쟁이 없었다. 미래 비전의 논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념 논쟁이 아닌 본격적인 한국 사회의 구체적인 개혁 의제에 대한 논쟁으로 옮아가고, 그 실현 방법 또는 정책 대안 논쟁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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