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선결조건을 공물로 바치더니 1년만에 ‘본격적 구걸’을 시작한 정부…중단으로 더이상의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내부 개혁을 말해야 할 때
▣ 정태인 성공회대 겸임교수·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가관이다. 일부 언론에 보도된 문서의 유출자를 색출해야 한다며 야단법석이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외교통상부는 거의 모든 공문서에 대외비 딱지를 붙인다. 그러니 과연 그 내용이 기밀인지, 정부의 협상전략에 어떤 차질을 빚었는지가 문제의 핵심일 텐데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얘기가 없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양 민주노동당과 심상정 의원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첨부문서를 붙여 언론에 배포했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지원위원회는 입을 다물었고 민주노동당의 고발을 기다리고 있다.
투자자-국가 간 분쟁 제도, 누가 이해 못했나
뼛조각 쇠고기 문제는 한-미 FTA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면서도 본협상과 나란히 회의를 개최한다. 실제로 광우병이 발생해서 불행히도 누군가 사망한다면 그때 정부는 어떻게 책임을 지려고 이러는가. 제로잉(미국에 수출하는 제품의 부품 중 어느 하나라도 수출국 내의 부품가격보다 쌀 경우 미국이 제품 전체를 덤핑으로 판정, 높은 관세를 매기는 것)이라든가 반덤핑 조처 이후 자의적인 재심 금지, 관세의 해당 기업 재배분 등 미국 무역구제 정책의 몰상식한 독소조항은 다 제쳐놓고 별 의미도 없는 요구를 했음에도 미국은 “새로운 제안이 오면 검토하겠다”는 정도로 오불관언이니 지켜보기 딱할 지경이다.
가만히나 있으면 모를까. 통상교섭본부의 가정교사 격인 정인교 교수(인하대 경제학)는 “이제 과거와 같은 ‘밀어내기’ 수출의 시대가 아니고 최근에는 미국의 반덤핑에 걸린 사례가 줄어들고 있어 예전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며 슬며시 빠져나갈 구멍을 열어놓는다(1월22일 ). 그러나 바로 사흘 전인 1월19일 지원위원회의 홍영표 단장은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서 쏘나타를 2만달러에 팝니다. 그런데 최근 급격하게 원화절상이 되면서 2만3천달러는 받아야 할 겁니다. 가격을 올려버리면 과연 팔릴까요. 2만달러를 고수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덤핑 판정이 내려질 우려가 생깁니다. 그런데 FTA를 체결하면 이런 걱정이 없어집니다”고 말한다. 대통령 비서관이 지금 한-미 FTA의 무역구제 분야 협상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증거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등에서 미국이 무역구제 분야를 양보한 바 없으며 또한 현실의 FTA가 무역분쟁을 줄였다는 증거가 없다는 국제기구의 기본적인 보고서조차 보지 않은 모양이다.
“한-미 FTA 협상에서 논의하고 있는 투자자-국가 간 분쟁 제도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그런 우려의 대부분은 제도의 내용이나 장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올 1월16일치 에 최경림 외교부 자유무역협정국 제1교섭관이 기고한 글의 요지다. 글의 내용은 미국 쪽의 주장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과연 그럴까? 보름 뒤인 2월1일치 기사는 그 답을 말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제도에 관한 반대쪽의 지속적인 문제 제기에 대해 대통령의 지시로 지난 8월 민관 합동의 ‘투자가-국가 소송제도 점검 태스크포스팀’이 만들어졌고, 민간 전문가들이 위헌 가능성을 제기한 것은 물론 법무부, 건설교통부 등도 완전 삭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협상단은 부동산 정책과 조세정책의 예외를 미국에 요구했을 뿐 미국의 표준문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유는 넉 달 전 우리 쪽 초안에 이미 이 제도를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쪽이 ‘제도의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행동한 걸까?
요즘 유행하는 사극에 자극을 받았는지 정부는 장보고와 광개토대왕까지 한-미 FTA 찬성 광고에 등장시켰다. 마치 한-미 FTA가 미국 정벌의 장검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다. 반면에 농민들이 나락을 내어 만든 광고는 사실상 방송금지 처분을 내렸다. 경남 함안의 할머니들이 “우찌됐든 막아야 할 낀데”라며 눈시울을 훔치는 구구절절한 걱정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대기업만 좋은 서비스산업 구조조정
이것이 2007년 세계 최강국과 FTA를 맺겠다는 정부가 하고 있는 ‘꼬라지들’이다. 스스로 내세우는 ‘이익의 균형’을 찾고자 노력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든 한-미 FTA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하다. 협상 개시의 조건으로 4대 선결요건을 미리 공물로 갖다 바치는 ‘주체적 매달리기’(2005년 11월에서 2006년 1월까지)로 시작한 한-미 FTA는 이제 1년 만에 제발 체면 좀 세워달라는 ‘본격적 구걸’ 국면에 접어들었다.
정부가 한-미 FTA를 추진하는 목적은 ‘미국 시장 선점론’과 ‘경제선진화론’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수출이 대폭 증가할 것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고, 둘째는 미국의 서비스업이 한국에 대거 진출해서 생산성이 증가할 것이라는 가정에 기대고 있다. 그러나 이 어느 것에 관해서도 정부는 명확한 시나리오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학자들도 50% 이하의 신뢰밖에 보이지 않는 계산가능일반균형(CGE) 모형을 돌린 결과만 되뇌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 산업의 현실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런 ‘정교한 계산’이 단지 숫자놀음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삼성, 현대, LG 등 대기업 연구소의 보고서는 제조업에서도 별로 이익을 볼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또 하나, 정부는 중국이나 일본보다 먼저 미국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중국이나 일본이 수년 내에 미국과 FTA를 체결할 움직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룻강아지가 아닌 이상 범 무서운 줄 아는 법이다.
경제선진화론은 중국위협론과 외부 쇼크에 의한 내부개혁론으로 구성된다. 심지어 3년 내에 중국의 제조업이 우리의 제조업을 완전히 몰아낼 것이라는 식의 중국위협론은 그 자체로 검증되지 않은 주장이다. 어쨌든 서비스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은 당위론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명제지만 아무런 체계적인 산업정책도 시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 쇼크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전교조나 병원노조, 대학 등이 개혁을 저해하기 때문이라는 보충설명을 들으면 그제야 왜 이런 정책이 기획됐는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즉, ‘외부 쇼크에 의한 내부개혁론’의 핵심은 한-미 FTA를 지렛대로 사용해 서비스산업 구조조정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우리가 겪은 일이다. 외환위기 때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에 따라 단기간에 금융산업의 구조조정을 한 바 있다. 한-미 FTA는 그 범위가 전 서비스산업으로 확대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재경부 고위관료들이 공공연하게 “외환위기는 축복이었다”고 떠드는 것을 상기해보면 왜 통상교섭본부와 재경부가 한-미 FTA에 그리도 목을 매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대기업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방송 등 공기업 인수, 규제 완화, 그리고 노동시장의 철저한 유연화를 꾀할 수 있다.
미국은 한-미 FTA의 목적을 “미국 기업의 최대 이익을 위해서 상대 나라의 법과 제도, 관행을 바꾸는 것”(미 의회조사국 보고서)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의 목적도 산업 구조조정이니 미국과 한국 정부는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한-미 FTA는 철저하게 미국과 한국의 대기업, 그리고 고급 경제통상관료의 이익(시장화는 이들의 퇴직 뒤 취업 기회와 고액 연봉을 가져다준다) 및 신념에 복무한다. 물론 그 희생자는 농민, 노동자 등 근로서민 계층이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사람 대부분이 서민 계층이라는 여론조사는 이런 사실과 정확히 부합한다.
국회의 비준마저 힘든 상황
이런 상황에서 FTA 국익론(일부 손해를 보더라도 전체적으로 흑자면 좋은 것 아니냐)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양국 정부가 국익으로 포장한 것은 기실 미국과 한국 지배계급의 이익이다. 이렇게 이해가 일치한다 하더라도 한-미 FTA의 전망이 그리 밝은 것은 아니다.
한-미 대기업 간 이익의 상충도 일부 요인이 되지만(예컨대 자동차 세제 분야 등) 한마디로 미국이 해도 너무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모든 부문에서 경쟁력이 뒤처지는데(이익을 볼 것이라는 한국 제조업 분야의 평균노동생산성은 미국 수준의 40%에 불과하다) 협상력마저 터무니없이 모자라니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도대체 한국 정부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아마 딱 떠오르는 것이 없을 것이다. 있기만 했다면 130억원의 예산을 가진 정부 홍보가 그냥 지나쳤겠는가?
정부는 7차 본협상까지 관세 등 수치 조정과 문안 작성 작업을 하고 고위급 회담에서 이른바 ‘빅딜’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무역구제와 자동차 세제, 의약품 분야를 맞바꿀 것이고 섬유와 농업 간의 ‘스몰딜’도 예상된다. 최후의 결정은 양 대통령 간의 전화 통화로 이뤄질 전망이다. 결코 관료들은 책임질 일을 남겨놓지 않으니 덤터기는 대통령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은 미국이 강하게 밀어붙이고 한국 정부도 목을 매는데 과연 반대 운동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범국본, 민주노동당 등과 함께한 국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한-미 FTA는 원래 청와대의 계획대로 지난 연말에 타결됐을 것이다. 그러나 무역촉진권한법(TPA) 시한이 3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지금도 미국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는 한 부드럽게 타결되기는 어렵다. 국민들의 우려와 저항이 없었다면 농림부가 ‘손톱만 한 뼛조각’을 이유로 수입 쇠고기를 반송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설령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다 해도 2008년 총선을 앞둔 국회는 차기로 비준을 넘길 공산이 크다. 만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전격적으로 통과시킨다 해도 어쨌든 현재 상황에서 한-미 FTA가 대통령 선거의 쟁점이 되는 것을 피할 길은 없다. 누가 대선 후보로 나오든 내놓고 한-미 FTA에 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오히려 예외조항의 수를 늘리는 경쟁에 돌입하기 십상이고 그것이 4대 선결요건을 건드리게 된다면 이번에는 미국 의회가 비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모두 거친 결렬은 한-미 양국 모두에게 불행이다. 보수집단이 그리도 애지중지하는 한-미 동맹은 여지없이 흔들릴 것이다. 노 대통령의 마지막 결단은 전격 타결이 아니라, 백번 양보해도 ‘일단 중지’여야 한다. 더 이상의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이 국민이 살길이고 대통령 또한 궁지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의약품이든, 자동차 세제든, 아니면 투자자-국가 제소권이든 미국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 왜 중지해야 하는지, 국민에게 설명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며 흩어져버린 지지자들을 다시 모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산업의 발전방향 수립이 먼저다
이제 우리는 미국의 마지노선을 안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였을 때 과연 우리 경제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꼼꼼하게 점검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국민의 의견을 물어 재개를 결정해도 결코 늦지 않다. 뿐만 아니다. 한-미 FTA 여부에 앞서 우리 사회·경제가 나아갈 길이 그려져야 한다. 좁게 얘기해서 바람직한 산업의 발전 방향이 먼저 설정되어야 어떤 FTA든 그 방향에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역행하는지, 부작용은 어느 정도이고 그 대책은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현재 정부의 대외정책은 거꾸로 되어 있다. 한-미 FTA가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가 한-미 FTA 추진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한-미 FTA를 막으려면, 신자유주의의 쓰나미를 막으려면 이제 우리는 스스로 내부 개혁을 말해야 한다. 말하자면 ‘선 내부개혁론’이다. 이제 외부 쇼크 없이도 스스로 필요한 생산성 향상,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제도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바깥이나 위로부터의 성장, 양극화를 초래하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성장, 양극화를 해소하는 연대의 성장은 바람직할 뿐 아니라 충분히 가능하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한-미 FTA의 효과를 국내총생산(GDP) 7.75%의 증가로 뻥튀기할 때 쓴 가정은 전 부문 생산성 1% 향상이다. 하루 노동시간 8시간에 비춰본다면 하루 4.8분 더 일하거나 같은 시간에 1% 더 열심히 일하면 된다. 이리 간단한 과제를, 한-미 FTA라는 돌이킬 수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은 국민 역량에 대한 모독이며 리더십의 부재를 증명하는 얘기일 뿐이다. 올해는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속보] 공수처 “윤석열 체포가 목적…자진출석 고려 안 해”
[생중계] 윤석열 2차 체포 시도 현장
공조본, 3차 저지선 넘어 관저 진입…경호처와 협의
공수처·경찰 진입 안 막은 경호처…김성훈 지휘 안 따른 듯
나경원 “법 살아 있어야”… 윤석열 쪽 ‘불법 체포’ 논리 반복하는 국힘
설 민생지원금 1인당 50만원까지…지자체, 내수경제 띄우기
[속보] 경찰 “윤석열 영장 집행에 기동대 54개 부대·3200명 동원”
‘KBS 이사장 해임 취소’ 항소한 윤석열…최상목 패싱했나
[속보] 경찰 체포조, 관저 뒷산 등산로로 우회 진입 시도
민간인 윤갑근의 경호처 직원 ‘집합’…“경호관이 경찰관 체포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