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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드슨 강에 빠져 죽으려 했다”

등록 2006-12-28 00:00 수정 2020-05-03 04:24

1998년 뉴욕 외채협상 이끈 정덕구 의원… 인도네시아 모라토리엄 선언이 고비…위기의 주요 원인은 ‘거버넌스’ 문제, 사회안전망 확충에 더 노력을 기울여야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참, 허무한 일이었지. 벌써 10년이나 됐어.” 약속 시각보다 좀 늦게 나타난 무안함을 털어내려는 듯 정덕구(58) 열린우리당 의원은 사무실로 들어서면서 먼저 인터뷰 주제를 떠올렸다.

이 외환위기 10년을 돌아보는 인터뷰를 정 의원과 한 것은 위기 직전 경제정책의 핵심인 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 전신)의 고위직(기획관리실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위기를 해결하는 국면에서 중책을 맡았던 점을 감안해서였다. 정 의원은 외환위기 직후 국내 은행권 단기외채의 만기를 연장하는 뉴욕 외채협상 때 한국 대표를 맡았다.

12월18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413호에서 2시간가량 이뤄진 인터뷰에서 그는 외환위기의 원인에 대한 나름의 견해, 외채협상을 이끌었던 과정의 뒷얘기와 심정, 외채협상 타결 뒤 이뤄진 첫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평채) 발행 때의 아찔했던 순간 등을 풀어놓았다. 굵직한 국제 협상을 진행해본 처지에서 느껴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추진 과정의 문제점도 아울러 밝혔다.

금리 놓고 IMF와 일전

외환위기의 원인은 뭐였다고 보는가?

=외환위기 발생에 대한 학설이 있는데, 한국의 경우엔 잘 안 맞는다. 내가 보기에 외환위기는 개방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개방의 순서와 속도를 우리 스스로 결정한 대로 가지 못하고 뭔가에 쫓기면서 갔기 때문이다. 내부 정리와 개혁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개방의 속도가 빨라지다 보니 (양자 사이에) ‘미스매치’(불일치)가 생긴 거다. 여기에 거버넌스(경제정책 결정구조)의 위기가 겹쳤다. 이렇게 미스매치와 거버넌스 붕괴로 인해 높아진 ‘수문’을 관리하지 못한 상태에서 동남아 금융위기라는 ‘태풍’을 맞았다.

복합적이었다는 설명으로 들리는데, 주된 요인은 있는 것 아닌가?

=주된 건 경제정책의 결정 구조가 붕괴된 ‘거버넌스 위기’라고 본다. ‘박정희식 개발 모형’은 대통령의 강력한 권위 아래 ‘정치권-관료-재벌’이라는 삼각 균형의 정책결정 구조였다. 시장화·개방화 진전과 5년 단임 대통령제로 삼각 구조의 정합성에 균열이 생겼다. 5년 단임제에서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이 발휘되지 못하고, 관료와 재벌은 이익집단화했다. 국제금융 체제의 동요가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탓만은 아니지만, 주된 건 역시 ‘내 탓’이라고 봐야지. 국제금융 체제가 동요해도 위기를 맞지 않은 나라가 있었으니까.

외환위기 초기 국제통화기금(IMF)의 위기 진단과 처방은 적절했다고 보나?

=위기 극복을 위한 방안은 크게 세 가지였다. (만년필로 써가며) 첫째는 거시정책, 둘째는 구조조정, 셋째는 개방이냐 폐쇄냐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에선 (한국 정부와 IMF 사이에) 큰 이견이 없었다. 구조조정은 곧 ‘시체 처리’인데, 이걸 누가 반대하겠나. 더 개방할 거냐, 폐쇄할 거냐에 대해선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개방을 택했다. 밖에서 돈이 들어와야 할 마당에 문을 닫는다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문제는 첫 번째의 거시정책이었다. 환율 때문에 금리를 급격히 올리는 고금리 긴축정책을 편다는 데는 우리도 동의했지만, ‘하우 롱’(How long·얼마나 오래?)에 이견이 있었다. 급한 불을 끈 1997년 12월 말 이후엔 금리를 급격히 낮춰야 한다는 게 우리 정부 쪽 주장이었다. 부채 비율이 400%가량에 이르는 상태에서 27%씩 이자를 내고 장사할 수 있는 기업이 어디 있겠나. 이듬해 1월 말 외채협상 성공 뒤에는 미국 재무성과 IMF에 (고금리 고수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다.

그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고, 고금리 정책이 한동안 계속되지 않았는가?

=미 재무성이나 IMF 쪽에선 외평채 발행을 통해 ‘뉴 프레시 머니’(새로운 돈)가 들어오기까지는 계속 고금리 정책을 펴야 한다며 강하게 ‘태클’했다(걸고 넘어졌다). 이 과정에서 우리(정부 당국)는 IMF와 정면 충돌했고, 합의 전부터 서서히 금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2월 중순부터 금리를 내리기 위해 서서히 통화를 풀었고, IMF는 거기에 계속 불만을 표시하면서 공식적으로는 (저금리 정책을)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이나 IMF는 왜 그렇게 고금리 정책에 집착했다고 보나?

=1998년 3월 재경부 차관에 임명되고 나서 대통령(김대중) 특명으로 미국에 파견돼 스탠리 피셔(IMF 수석부총재)와 담판을 벌인 일이 있었다. IMF 본부에 있는 식당에서 단독 대좌해 강하게 설득했는데 피셔도 미 재무성으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미국 입장에선 정부 보조금이란 뒷받침을 받으며 팽창주의 정책을 쓰는 한국 재벌들을 흔들어놓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또 급격한 저금리 정책이 (한국의) 국제 신인도를 떨어뜨리고 외환 수급에 차질을 빚을 것이란 걱정도 했을 법하다.

‘난 너희(미국·IMF)가 반대해도 (저금리로) 간다’ ‘너희는 반대하는 걸로 하되 시간을 끌면서 가자’고 했다. 귀국하면서 한국은행에 통화를 풀라고 했다. 그때부터 한 달 동안 IMF와 완전 합의는 아니나 묵인 상태에서 금리를 급속해 내렸다. 4월 중순 외평채 발행에 성공했고, 4월 말 들어 IMF 이사회는 (한국의) 금리정책 자유화를 선언했다. 4월 말부터 시작된 저금리 정책으로 7월 말에 오면 이미 (콜금리가) 8%대로 떨어졌다.

외평채 발행을 1주일만 미뤘다면…

당시 외평채 발행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1998년 1월의 뉴욕 외채협상은 (국내 은행권의) 외채 240억달러의 만기(1주일~한 달)를 1~3년짜리로 바꾸는 빚 재조정 과정이었다. (그에 비해) 외평채 발행은 국제사회에서 한국 경제가 이제 괜찮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가 발행한 채권을 외국에서 사준다는 것이니까. 애초 외평채 발행 목표는 30억달러였는데, 주문을 받아보니 60억달러나 신청이 들어왔더라. 다 발행하면 금리에서 손해를 볼 수 있어 결국 발행 규모는 40억달러로 정했던 것이다.

그때 금리 수준은?

=연 5~6% 정도였다. 외채만기 협상 때보다 더 싼 금리를 적용받았다. 그사이에 국가 신인도가 올라갔던 것이다. 이 두 사건이 외화 유동성 위기를 종결짓는 전환점이었다. 외평채 발행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였던 게, 발행을 1주일만 미뤘다면 소용돌이에 빠졌을 것이다. 외평채를 발행해 돈을 챙겨갖고 막 나올 때 러시아의 모라토리엄(대외채무상환유예) 선언으로 세계 채권시장이 붕괴했다. 큰일 날 뻔했다.

(1998년 1월) 외채 협상대표를 맡았던 건 재경원 2차관보로 맡았던 당연직이었나?

=임창렬 부총리가 날 보자고 하더니 맡으라고 해서…. 처음엔 거절했다. 강만수 차관이 뉴욕 재무관 출신이니 더 적임이라고 추천했는데, 내가 선택됐다.

뉴욕 외채협상의 최대 고비는?

=협상은 1월 들어 시작됐는데, 1월13일부터 18일까지는 워싱턴에 가서 분위기를 잡는 일이었다. 한국의 정책 의지를 내보이고, 새 대통령 당선자의 뜻을 전하는…. 로버트 루빈 미 재무장관,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제임스 울펀슨 세계은행 총재를 상대로 ‘한국이 앞으로 잘할 테니 (외채협상은) 쉽게 가자’고 분위기 잡느라 닷새를 보냈다. 회담 기간은 총 열하루 걸렸다. 문제는 협상 기간 중(1월26일) 인도네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한 일이었다. 회담 막바지에 금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을 해야 할 판이었는데….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인도네시아의 모라토리엄 움직임은 어떤 경로로 알게 됐나?

=임창렬 부총리가 전화를 했더라. 6시간 뒤면 모라토리엄을 선언한다고 IMF에 통보했다고…. 기가 찼지.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잘될 거라는 엉뚱한 믿음과 잘못됐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함이 교차했다. 협상장 근방에 허드슨강 지류가 있는데, 거기 다리에서 떨어져 죽으려면 어떻게 올라가야 하는지 가보기도 했다. 국제채권단이 만행을 부린다면, 국제금융 체제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죽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위험관리 체제는 점차 약해져

협상 전략은 어땠나?

=인도네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순간 강공을 펴기로 마음먹고 ‘우린 절대 인도네시아와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우린 저금리로 가야겠다’ ‘이자 한 푼 안 떼먹겠다’고 강조했다. 그 강공이 오히려 채권단을 안심시켰던 것인지, 한국까지 그렇게 되면(모라토리엄 선언) 엄청난 재앙을 맞을 것을 두려했던 것인지 (우리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외채협상 결과 1주일~한 달짜리 만기는 1~3년으로 늘어났고 금리는 ‘리보(런던은행 간 금리)+100~200bp(1.00~2.00%포인트)’로 결정됐다. 이는 연 7~8% 수준이다. 채권단 쪽에선 애초 500~700bp를 주장했고 우린 내심 300~350bp면 감내할 수 있다고 봤다. IMF로부터 받은 구제금융의 금리가 350bp였기 때문이다.

국제 채권단 쪽도 일정한 책임을 물었어야 한다는 얘기가 많지 않았는가?

=그네들이 (원금에서) 손해보면 (국내 금융기관들에 대한) 금융거래 재개 기간을 늦추게 된다. 한국과 거래하는 걸 위험자산으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헤어컷’(외채원금 삭감)하면 좋다는 건 이론일 뿐이다. 인도네시아가 그렇게 해서 결국 뭐가 됐나. 말레이시아도 마찬가지다. 국제자본이 빠져나가는 걸 동결시킨 건 위험천만한 방식이었다. 결과적으로 제조업과 금융 부문을 구조조정하고 클린업(부실 털기)하는 데 실패했다.

우리 경제가 성장했지만 10년 동안의 사회경제적 변화에서 부정적 효과도 많다는 지적을 듣는다.

=위험 요소는 커지는데 위험관리 체제는 약해지고 있다. 투자와 소비는 위축돼 수출로 연명하는 한계 상황이다. 국민 72%가 연간 소득 8천달러 아래의 ‘신빈곤층’이다. 양극화라기보다 민생이 피폐해졌다. 기업들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 기업가 정신이 없다. 이게 한국 경제의 현주소다. 현명하게 대처해야 한다.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새 권위를 창출하고, 신뢰기반이 흔들리는 걸 막아야 한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시장만능주의(신자유주의) 발전 모델을 채택했다고 본다. 여기에 교정이 필요한 것 아닌가?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는 노력을 더 기울여야 한다. 각종 연금개혁이라든지 노약자, 차상위계층(기초생활보장수급자 바로 위)을 배려하는 것들…. 그러면서 성장 동력을 키워야 한다. 성장 동력은 투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를 위해선 ‘친기업주의’로 가야 한다. 가계 부문에 자꾸 뭘 하라고 호호 불어봐야 안 된다.

한-미 FTA, 첫 단추를 잘못 뀄다

한-미 FTA 협상이 진행 중이다. 외채 협상을 진행해본 처지에서 어떻게 보는가?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목표가 분명했어야 하는데…. 농업, 재래 유통, 중소기업 같은 취약 부문의 구조개혁 프로그램이 없다. (서비스업의 중심을) 단순 서비스업에서 전문 기술 서비스로 바꾸는 근본 대책을 내놓고 국회에서 토론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미국은 FTA를 중심으로 삼는 나라가 아니다. 여기(FTA)에 별 뜻이 없다.

협상이 깨질 수도 있다는 얘기인가?

=두 나라의 정치적 결단이 남아 있는데, 그 뒤엔 (협상 결과의) 수요자(국민)가 있다. 수요자를 설득하는 게 쉽지 않을 거다. 의회 분위기가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지만 (협상을) 안 할 때 않더라도 일단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DDA(도하개발어젠다) 협상과 다 연결된다. 안 되더라도 대화한 것은 축적된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정덕구 의원은 누구인가?


정덕구(58) 열린우리당 의원은 행정고시 10회 출신으로 재무부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재무부 조세정책과장·경제협력국장·국제금융국장을 거쳐,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합쳐 만든 재정경제원의 기획관리실장을 지냈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1월 재경원 제2차관보로 뉴욕 외채협상 대표로 활약했다. 뒤이어 재경원에서 예산 기능과 금융감독 기능 일부를 떼내 새로 출범시킨 재정경제부의 첫 차관을 역임하고, 김대중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민주당 총재 경제특보,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국제금융센터 소장, 중국 베이징대 초빙 교수를 거쳐 2004년 총선 때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왔다. 자신의 논리에 대한 고집이 세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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