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부·산자부의 입김으로 대폭 완화돼버린 출자총액제한제도…참여정부는 과도한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로드맵을 포기하나
▣ 이정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전 청와대 정책실장.
재벌개혁 논쟁이 진행 중이다. 정부는 11월 중순 공정거래법 중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에 관한 개정 방향을 발표했다. 그 내용을 보면 출총제는 자산 10조원 이상인 기업집단 소속 기업 중 자산 2조원 이상의 중핵 기업에 대해서만 적용하고, 지금까지 순자산의 25%로 되어 있던 출자 한도를 40%로 높인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출총제 적용 대상은 지금까지 14개 그룹의 343개 기업에서 7개 그룹의 24개 기업으로 대폭 축소되며, 이들 기업의 출자 여력은 16조원에서 33조원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출총제는 명맥만 유지할 뿐 거의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개선인가, 개악인가?
출총제 때문에 투자가 저해된다?
원래 참여정부가 2003년에 준비한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에 의하면 2006년 말까지 기업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출총제는 폐지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공정위는 이 로드맵에 따라 기업의 순환출자에 대한 규제 도입과 출총제의 폐지 혹은 완화를 하나의 패키지로 추진해왔다. 공정위의 목표는 지극히 온당함에도 이 시도는 첫 단추조차 꿰지 못하고 있다. 공정위가 마련한 시안은 세상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우선 정부 안에서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고, 이견을 조정한 끝에 도달한 최종 정부안은 엉거주춤하기 짝이 없다. 순환출자 규제는 도입하지 않고, 출총제는 대폭 완화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이는 경제의 공정한 게임에 관심이 많은 공정위의 의견이 거의 무시되고, 경제 회복에 무게를 두는 재정경제부, 산업자원부의 주장이 관철된 것으로 보인다.
출총제를 반대하는 이유는 주로 두 가지다. 첫째, 정부가 기업의 출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불필요한 규제라는 주장이다. 둘째, 출자를 규제함으로 말미암아 투자가 저해된다는 것이고, 지금과 같은 저투자·저성장 시기에는 불필요한 규제를 풀어서 투자를 촉진함이 옳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깊이 따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첫째, 출총제와 같은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은 사실이고, 글로벌 스탠더드의 관점에서 볼 때 부자연스러운 제도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또 하나 알아야 할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의 재벌과 같이 순환출자를 통해 총수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체제 자체가 없다는 점이다. 재벌의 반칙을 제어하려면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것이 정공법이지만 불행하게도 공정거래법상에 아직 이런 규정이 마련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순환출자의 폐해를 부분적으로나마 시정하기 위해서는 비록 부자연스럽지만 출총제라는 정책의 필요성이 일단 인정될 수 있다. 최선이 아닐 때는 차선이라도 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1998년 12월에서 2001년 3월까지 출총제가 폐지된 적이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재벌들의 순환출자의 폐해가 더욱 커졌다는 사실에서 출총제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고, 이 제도가 2001년 4월부터 재도입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둘째, 출총제를 폐지하면 투자가 살아날 것인가? 출총제로 인해 투자가 안 된다는 주장을 검증하는 몇 편의 연구가 나와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있지만 대세는 이 주장을 뒷받침해주지 않으며, 출총제로 인해 투자가 저해된다는 항간의 주장은 그 근거가 박약하다. 투자와 출자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양자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근거는 별로 없다. 또 출총제가 폐지됐던 1998~2001년 기간 동안 투자가 증가하지 않았다. 다만 이 기간은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어려움에 빠져 있던 시기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확실한 반증이라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백보 양보해 출자 제한으로 인해 투자가 저해된다고 가정하더라도 현행 25%의 출자 한도에 육박해 있는 대기업은 별로 없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까? 현행 제도하에서도 대기업은 대부분 출자 한도의 20% 미만에 머물고 있어서 법정 한도 25%까지는 상당한 여유가 있다. 액수로 말하면 여분의 출자 한도가 대략 20조원이나 되니 출자가 투자로 연결된다는 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출총제 때문에 투자가 안 된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게다가 현행 출총제는 적용 제외, 예외 조항이 워낙 많아서 예외가 정상보다 더 많은 기형적 모습이다. 그물이라면 웬만하면 빠져나가는 엉성한 그물이고, 칼이라면 날이 무딘 칼이다. 법이 워낙 누더기가 되어 있어서 이 법 때문에 투자를 할 수 없다는 말은 엄살에 가깝고, 솔직히 말해서 출총제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경제적·논리적 성격보다는 정치적·선전적 의미가 더 강하다.
기업지배제도 개선, 언제까지 미루나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가 도달하는 결론은 역시 정공법이 옳다는 것이다. 재벌그룹의 순환출자의 폐해가 크고, 그것이 시장경제의 기본 원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지금처럼 출총제 같은 어정쩡한 법으로 규제할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순환출자를 금지하는 법을 도입하는 것이 옳다. 출총제는 없느니보다는 나은 제도지만 반대자들이 이야기하듯 부자연스럽고, 이미 온갖 예외조항으로 누더기가 되어 있다. 그렇다면 순환출자 금지가 옳지 않은가? 현행 법에서도 갑과 을 사이의 상호 출자는 금지되어 있다. 법의 정신이 그렇다면 당연히 갑, 을, 병 사이에 뺑뺑 돌아가는 순환출자도 금지함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다.
그러므로 신규 순환출자는 금지하고, 기존의 순환출자에 대해서는 시간을 주어 점진적으로 해소해나가도록 하면서 시대적 사명을 다한 출총제는 폐지함이 옳을 것이다. 이것이 공정위가 원래 지향한 방향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합리적인 안이 채택되지 못한 것은 어찌된 일인가. 공정위가 방향은 옳게 잡았지만 정부 안에서 경제가 어려우므로 기업에 추가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경제부처의 상황논리를 논파하지 못하고 슬그머니 타협하고 말았다면 추상같아야 할 경제검찰로서의 직분을 다했는지 스스로 반추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공정위 안에서 몇 달 동안의 논리 무장이 철저했는지도 반성할 일이다.
통계를 보더라도 현재 대기업은 투자 여력이 클 뿐 아니라 투자도 활발히 늘고 있다. 문제는 중소기업이 투자 여력도 없고, 투자가 빈약하다는 점이다. 지금은 투자의 수준보다는 투자의 양극화가 더 문제다. 사실 외환위기 이전의 과잉투자 시대를 비교 기준으로 해서 현재의 저투자를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투자 활성화를 위해서 출총제를 폐지하라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은 투자 활성화와 관계없이 우리 경제가 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구조개혁 과제라고 봐야 한다.
지금 투자가 저조하고 성장률이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장기 과제를 무작정 뒤로 미룰 수는 없다. 경기가 나쁘다고 경제개혁을 미룬다면 경기가 좋아져도 개혁은 하기 어렵다. 모처럼 좋아진 경기를 죽인다고 온갖 반대를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애당초 개혁과제는 경기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미리 예고하고 일관성 있게 추진할 일이다. 개혁의 속도는 조금 더디어도 좋으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개혁의 성패는 일관성과 예측 가능성이 생명이 아닌가?
역대 정권과 차별성 보였던 시장개혁 로드맵
개혁은 우선 당장은 밥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긴 시간을 두고 그 효과를 발휘하므로 그 위력은 당장의 투자나 성장률 같은 눈앞의 가시적 성과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 기업의 지배구조가 개선되고 투명성이 높아진다면, 장기적으로 외국자본 유입이 활발해질 것이고 경제성장도 높아질 것이다. 이것이 정부가 취해야 할 방향이다. 경제를 살리고 보자는 주장이 과연 경제를 살리는 길인지 냉철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재계와 경제부처가 늘 주장하는 ‘경제논리’란 것이 논리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보면 우선 당장 눈앞의 성과는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풀어야 할 숙제를 미루고 경제에 부담을 주는 비논리에 불과한 경우가 더러 있다.
참여정부의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이 과거의 재벌개혁과 다른 점이 있다면 역대 정부가 취했듯이 정권 초기에 돌발적·일시적으로 소나기식 개혁을 추진하는 게 아니라 미리 예고하고 장기적·지속적으로 추진한다는 점이었고, 그 점은 자부해도 좋았다. 역대 정부의 재벌개혁을 돌이켜보면 정권 초기에는 서슬 퍼렇게, 심지어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경제가 어렵다는 등 이런저런 이유로 하나씩 후퇴하면서 결국은 용두사미로 끝나곤 하지 않았던가? 이런 경향은 서슬 퍼랬던 박정희 정권 때부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표방했던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거의 예외가 없다.
참여정부는 지금 재벌개혁의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최초로 합리적·점진적 개혁에 성공할 것인가, 아니면 용두사미로 끝나는 과거 패턴에 또 하나의 사례를 보태줄 것인가? 지금 저울추는 불행하게도 후자 쪽으로 기우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이 문제가 최종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닌 만큼 활발한 토론 끝에 좋은 방향을 찾아가기 바란다. 마침 열린우리당 일각에서 순환출자를 금지함이 옳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라 하겠다. 지금이야말로 재벌개혁의 기로에 서 있고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은 참여정부가 역사에 남길 선택이다. 요즈음 참여정부는 부동산 문제, 북핵 문제 등으로 사면에서 공격을 받아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성을 겹겹이 포위한 절망적 상황에서 동래부사 송상현이 비장한 각오로 쓴 시에 “외로운 성에 달무리 지는데, 우군은 높이 베개하고 수수방관하네”(孤城月暉 列陣高枕)라고 읊었던 구절이 생각난다.
물론 참여정부가 잘못한 것도 많고, 실수한 것도 많다. 그러나 지금 비판받는 문제 중에는 오래전부터 쌓여오다가 이제 와서 터진 문제가 많고, 참여정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실은 오래전부터 물려받은 문제인데 도매금으로 욕을 먹는 경우도 꽤 많다. 단적인 예로 현재 가장 큰 불만 요인으로 손꼽는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어려움 문제를 보더라도 이게 어디 참여정부의 정책 실패 때문인가? 취업자 중 자영업자 비율이 세계 최고로 높은 27%나 되어서 엄청난 과잉경쟁으로 인해 애당초 살기 어려운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역대 정부 누대의 책임이 아닌가?
참여정부를 향한 과도한 돌팔매질
사실 참여정부는 정치개혁, 부패척결, 균형발전, 빈곤과 차별 완화 등 많은 정책에서 이미 큰 실적을 올렸고, 앞으로 서서히 나타날 실적도 많이 있다. 그런데도 잘한 것은 통 보이지 않고 잘못한 것만 크게 부각되는 게 아닌지.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 중에는 옳은 비판도 많지만, 그보다는 합리성이 없는 과도한 공격이 훨씬 많다고 본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사정없이 돌팔매질하는 풍조는 없어져야 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걱정되는 점은 참여정부가 과도한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초조한 나머지 원래 잘 만들어둔 각종 로드맵의 실천을 포기하고 단기적 성과를 내려고 샛길로 접어드는 것이다. 진정 두려운 것은 이것이다. 재벌개혁도 여기에 예외가 아니다. 재벌개혁이란 중요한 시험대에 오른 참여정부는 타협적으로 우왕좌왕하지 말고, 심기일전해 원칙을 지키며 정도를 걸어가기 바란다. 우보천리라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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