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공창제에서 시작돼 현대사의 격랑을 표류한 성매매의 역사…역 주변·미군기지·유곽에 형성된 집결지들은 개발과 함께 밀려날 운명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성매매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만큼이나 오래됐지만, 한 장소에 여성들을 몰아넣고 성을 팔도록 강요하는 ‘성매매의 산업화’가 이뤄진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1996년 펴낸 에서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금품을 받고 성을 제공하는 직업이 매춘업이며, 조선왕조 말기까지 우리나라에는 공인된 매춘업이라는 게 없었다”고 적었다.
성매매에 기름 부은 한국전쟁
우리나라에서 ‘산업화된’ 성매매가 시작된 것은 일제 침탈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일본에서는 1585년부터 성매매가 공인됐고, 1924년 현재 ‘유곽’(遊廓)이라 이름 붙은 성매매 집결지가 544개나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첫 유곽은 1902년 7월24일 부산에 생겼다. 이 유곽은 일제 강점이 시작된 뒤 ‘미도리마치’(綠町)로, 해방 이후에는 ‘완월동’이라는 이름으로 명성을 떨쳤다.
유곽은 이후 서울에도 진출해 1905년 중구 묵정동에 신정(新町) 유곽이, 1906년 용산에 미생정(彌生町) 유곽이 생겨났다. 1929~30년 당시 한반도에는 25개의 유곽이 있었고, 그 안에서 510명(일본인 303명)의 포주와 3170명(일본은 1798명)의 성매매 여성들이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시대 성매매의 특징은 정부의 철저한 관리·감독을 받는 ‘공창’ 형태로 운영됐다는 점이다. 일본 정부는 외부와 격리된 지역에 성매매 업자들을 집중시켜 그곳에서만 성을 팔게 했고, 세금도 부과했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성매매 산업에 빠져든 것은 ‘가난’ 때문이었다. 손 명예교수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일제시대 소개업에서는 부동산 거래보다 인신매매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성매매 산업이 된서리를 맞은 것은 광복 이후 미군정이 들어오면서부터다. 1946년 5월17일 미군정은 법령 70호를 통해 ‘부녀자의 매매 또는 매매계약 금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법은 큰 허점을 가지고 있었다. ‘부녀자의 매매’에만 처벌을 하다 보니 금전 관계가 없으면 처벌이 어려워진 탓이다. 미군정청은 이후 ‘공창제도 등 폐지령’이라는 법을 새로 만들어 1946년 12월12일 김규식 선생이 의장이었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공창 제도는 1902년 부산에 첫 유곽이 생긴 지 4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성매매는 공식적으로 불법이 됐지만, 성매매가 없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1949년 12월31일치 는 2면에서 ‘없어지기는커녕, 늘어만 가는 사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삽화를 곁들여 보도하고 있다. “시내 인의동, 다옥동, 쌍림동을 비롯하여 각지에 득시글거리는 매춘부들의 추잡한 몰골을 만날 수 있다.” 그 흐름에 기름을 부은 것은 전쟁이었다. 6·25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젊은 여성들에게는 마땅한 호구 대책이 없었다. 성을 사고 파는 게 어떤 기준으로도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그들에게 “윤리관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이름의 폭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검찰과 포주의 유착, 그 끈질긴 역사
이후 등장한 성매매 집결지는 세 갈래로 나뉘어 경쟁적으로 발전한다. 먼저,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서울역·부산역·대구역·청량리역·용산역·영등포역 등에 자연발생적으로 성매매 집결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둘째, 부산 완월동, 대구 자갈마당, 대전 중동 10번지 등처럼 일제시대 유곽이 성매매 집결지로 굳어지기도 했고, 파주 용주골, 동두천 보산동, 용산 이태원 등 미군 부대 앞에도 어김없이 기지촌이 형성됐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성매매 집결지는 서울 종로3가 뒷골목에 길게 형성됐던 ‘종삼’이었다. 종삼은 1945년 해방 직후 형성되기 시작해 1·4 후퇴 이후 피난민 여성들의 대거 유입으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 범위는 서쪽으로는 지금의 파고다공원 근처에서 동쪽으로 종로5가까지 1km를 넘었고, 종로 남쪽으로도 드문드문 이어졌다. 는 1966년 8월21일치 8면 ‘윤락의 나상지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종삼의 화대가 “짧은 밤이 300원, 긴 밤이 800원”이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 시절 커피 한 잔 값은 30~35원이었다. 종삼에는 많은 때는 1400명, 적을 때는 1천 명 정도의 성매매 여성이 상주했다고 한다.
종삼은 수많은 문학작품의 배경이 됐다. 소설가 최일남은 1983년 5월호에 발표한 단편소설 ‘서울의 초상’에서 시골에서 살다가 서울에 올라온 성수라는 청년과 그 친구 2명이 종삼을 찾아가는 체험을 그리고 있다. 종삼에 대한 가장 세밀한 묘사는 1966년 에 연재된 소설가 이호철의 ‘서울은 만원이다’일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길녀는 서울 순화동에 방을 얻어놓고 손님을 받는 ‘프리랜서’ 성매매 여성으로, 종삼에서 일하던 친구 미경이 몸을 혹사시킨 끝에 숨을 거두는 광경을 지켜보게 된다. “몸은 고달프지만 잘 벌면 월 5만원도 벌고 보통도 3만원은 된단다.” 미경의 유품을 정리하다 나온 돈 3만원은 당연히 포주의 차지가 됐다.
정부는 1961년 11월9일 ‘윤락행위 등 방지법’을 만들어 성매매를 불법화하지만, 법이 지켜질 수 없다는 것은 법을 만든 정부도, 규제 대상이 된 포주도, 성을 팔아야 하는 여성들도 잘 알고 있었다. 정부는 성매매의 ‘관리’를 위해 서울 곳곳에 흩어진 성매매 업소들을 ‘선도구역’이라 이름 붙은 지정된 지역에 모았다. 이때 서울역 앞 양동, 영등포역 앞, 종로3가, 청량리역 앞, 미8군이 있는 용산구 이태원 일대 등이 선도지역으로 지정됐다. 이후 45년 동안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는 성매매를 불법화하면서도, 실제로는 공창제를 유지해왔다. 그 과정에서 싹튼 경찰과 포주의 검은 유착은 일일이 글로 옮겨 적을 수 없다.
집결지 사라져도 성매매 줄지 않는다
성매매 집결지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갔다. 종삼은 ‘원조 불도저’ 김현옥 전 서울시장의 집중 단속을 이기지 못하고 해체됐고, 서울역 앞 양동은 재개발로 사라졌으며, 영등포역 앞은 도심 빈민들이 모여사는 쪽방촌으로 변했고, 이태원은 주한미군 수의 감소와 함께 자연스레 쪼그라들었다. 청량리역 앞은 ‘청량리 588’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건재하다. 성매매 집결지는 사라져갔지만, 성매매는 줄어들지 않았다. 종삼에서 밀려난 성매매 여성들은 정릉천이 지나던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 88 일대 개천 뚝방에 모여 ‘미아리 텍사스’를 형성했고, 남은 사람들은 강동구 천호동의 ‘천호동 텍사스’로 밀려나 질긴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머잖아 그 집결지들도 사라질 것이다. 이전과 차이라면 건물주와 포주들이 그 땅에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을 지어 분양한 뒤 수조원대의 돈잔치를 벌일 것이란 점뿐이다. 미아리 텍사스의 김미령 자립지지공동체 대표는 “한마디로, 수치스럽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손정목 , 1권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명태균, 용산 지시 받아 ‘비선 여의도연구원’ 구상”
“‘윤·건희’ 정권 탄핵, 윤 임기 채울 자격 없어”…대학생 용산 집회
외신 “김건희, 윤 대통령의 시한폭탄…정권 생존 위태로울 수도”
“전쟁이 온다” [신영전 칼럼]
이라크까지 떠나간 ‘세월호 잠수사’ 한재명의 안타까운 죽음
“반장도 못하면 그만둬요”…윤 탄핵 집회 초등학생의 일침
[단독] 강혜경 “명태균, 사익 채우려 김영선 고리로 국회입법 시도”
해리스 오차범위 내 ‘우위’…‘신뢰도 1위’ NYT 마지막 조사 결과
“보이저, 일어나!”…동면하던 ‘보이저 1호’ 43년 만에 깨웠다
한동훈 어딨나?…윤 대통령 ‘공천개입’ 육성 공개 뒤 안 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