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애마’를 팔아버리고 환경운동가들을 만나 으스대던 나…자유의 느낌을 만끽했지만 3년만에 비통한 심정으로 화물차를 사다
▣ 최성각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나는 형편없이 웃기는 인간이다. 3년 전 어느 봄날, 나는 십수 년을 동거하던 자동차와 이혼했다. 그런데 초겨울쯤 다시 재혼했다. 사람들이 대개 이혼한 여(남)성과 다시 재혼하지 않듯이 물론 헤어진 차를 다시 만난 것은 아니다.
이혼은 아주 으스대며 요란하고 소문나게 했지만, 재혼은 비겁하게 슬그머니 했다. 계속 결혼식으로 비유해 말할라치면, 이혼은 호화판으로, 재혼은 도둑처럼 한 셈이다. 재혼한 뒤 사람들이 ‘싱거운 친구’라고 비웃을까봐 가을의 단풍도 못 즐겼고, 흐르는 강물 소리도 못 즐겼다. 한마디로 ‘쪽’팔리는 일이었다.
빌어먹을, 책 한권 때문에…
어쩌다 환경운동판에 속해 있다 보니, 솔직하게 고백하면 나만 손해지만 차가 싫어서 이혼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이 나라의 여느 장삼이사들과 다를 바 없이 차를 아주 좋아한다. 60년대 시골의 중소도시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국방색 시발택시가 시(市)에 10대도 안 되었을 것이다. 간혹 가계 사정이 좋아 10리 길 해수욕을 택시로 갈 때도 있었다. 자갈이 튀고 먼지가 날리는 신작로. 정원 초과의 자동차에 짐짝처럼 간신히 끼었지만, 그 감미로운 승차의 감각은 오랫동안 어린 소년을 뒤흔들곤 했다. 세월이 흘렀다. 나는 나라의 경제 발전에 아무 보탬도 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어쩌다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홀연 ‘마이 카’ 시대가 왔다. 덕택에 나 같은 날건달도 차를 끌 수 있게 되었다. 아랫동서로부터 폐차 직전의 차를 매우 싼값으로 넘겨받은 때가 아마 1988년 즈음이었을 게다. 고물이었지만 내 차가 처음으로 생긴 날, 나는 비장한 감정으로 깊은 밤 홀로 운전대를 잡고 중얼거렸다.
“이제 이 차에 나는 사람의 피, 동물의 피를 묻히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나 같은 평화주의자가 길바닥에서 모르는 사람과 삿대질을 하면서 싸우게 될지도 모른다.”
누가 만약 그때 의식(儀式)을 치르는 내 비장한 얼굴을 봤더라면 동이 트면 계백장군을 뒤따라 황산벌에 나갈 병졸의 얼굴을 떠올렸을 것이다. 운전대를 잡고 나는 내가 흘릴지도 모를 피부터 생각했다. 그 뒤, 자주 맞닥뜨린 “환경운동 한다는 인간이 차 끈다”는 비판에 대해선 “미안합니다. 더 열심히 일하지요” 하고 대꾸했다.
어느 날 차와 느닷없이 이혼한 것은 빌어먹을,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만날 뭘 연구할까 고심하는 풀꽃평화연구소에서는 마침 환경책을 기획하고 있었다. 어느 날 지인이 미국에서 책을 잔뜩 사갖고 왔다. 그중 한 권이
그 뒤 시간이 막 흘렀고, 어느 날 출판사에서 번역을 마쳤다며 첨부파일로 원고를 보내왔다. 놀기 좋아하고 게으른 나는 마감일 직전까지 파일을 열지 않았다. 원고 독촉 전화가 왔고, 그때서야 읽어보려고 파일을 열었더니 자그마치 2천여 장의 분량이었다. 도저히 마감일까지 화면에 띄운 채 읽어치울 재간이 없었다. 우스운 사람이 되기 직전이었다. 피가 마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말 고민스러웠다. 그동안 연구소와 출판사 간에 형성된 좋은 믿음의 관계가 일시에 무너져내릴 판이었다.
차를 버린 뒤 찾아온 후회와 자탄
방법이 없었다. 도저히 2천여 장의 원고를 다 읽고 발문을 쓸 시간이 없었다. 궁즉통이라, 내 뇌 속의 어떤 부위가 재빠르게 작동했다. 나는 차와 이혼하기로 작심했다. 그리고 내 ‘이혼기’를 발문으로 대체하기로 했다. 책 내용에 비춰볼 때 그보다 멋진 발문은 없을 것 같았다. 당시 내가 올라타고 뒹굴던 차는 길이 잘 든 지프였다. 동강에 댐 짓지 말라고 할 때에도 험한 길을 4륜기어 넣고 잘 돌아다녔고, 새만금 갯벌을 죽이지 말라고 할 때에도 서해안을 격정에 차서 돌아다니던 차였다. 평소 내 차에 눈독을 들이던 후배에게 “이유는 묻지 말라”고 하면서 차를 넘겼다. 시세보다 100만원 정도 낮춰 안기자 면허를 딴 뒤 차를 몰고 싶어 안달이 났던 후배는 선도 안 보고 덥석 ‘내 차’에 올라탔다. 본의 아니게 정든 차와 헤어질 수밖에 없게 된 슬프고 막다른 사연을 나는 발문으로 대체했다. 출판사에서는 재미있다고 큭큭 웃었다. 내 이혼이 매우 공개적이고 요란했다고 말한 까닭이 거기 있다.
차를 버리고 나니까 처음 얼마간은 불편했다. 그 책에는 분명 차와 이혼하면 많은 즐거움과 ‘거대한 안도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적혀 있었다. “그 결정으로 우리는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라는 간증도 담겨 있었다. 요컨대 차 없이 살면 지구온난화를 지연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기계적인 속도가 아니라 인간적인 속도로 삶을 체험하게 되고, 꽃향기를 맡게 되고, 낯선 이들과 교류하게 된다는 게 그 책이 이혼을 권유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말할 순 없지만, 책이 발간된 뒤 허망했다.
내 경우에는 그런 놀라운 신념에서 이혼한 게 아니라 자의긴 했지만 궁여지책으로 차와 헤어졌기에 처음 얼마간은 후회와 자탄, 불편의 감정이 더 컸다. 아아, 그때 차를 팔지 않고 발문을 쓸 순 없었을까, 그런 치사한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차를 버림으로써 굳은 돈은 당시에도 자정이 넘도록 일할 때인지라 택시비로 다 나갔기에 경제적인 이득은 별로였다. 제일 큰 이득은 눈만 뜨면 만나던 저명한 환경운동가들을 만났을 때 “나도 차를 버렸다”고 으스댈 수 있었다는 점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다소 간지럽지만 의기양양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하철에서는 책도 읽을 수 있었고,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니 허벅지 근육도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그해 여름은 집에서 연구소까지 60리 한강길을 자전거로 다니기도 했다. 차를 버리고 난 뒤 만난 자유의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직도 차를 끌고 다니는 한심한 친구들을 쯧쯧 혀를 차며 동정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가슴을 팡팡 치며 “난 엉터리다”
그러다가 그해 늦가을, 나는 결국 다시 망했다. 시골에 연구소를 짓게 된 것이다. 집을 짓게 되자 현장에 있어야 했고, 건축자재를 운반하거나 철물점에 다닐 일이 많아지게 되었다. 그뿐인가. 밭이 생기니까 거름도 실어날라야 했고, 겨울에 난로를 때다 보니 산에 나무를 하러 가야 했다. 연구소를 골짜기에 지었으므로 장을 보러 시내에 갈 때에도 하루에 두 차례밖에 시내버스가 안 다니기에 곤란할 때가 많았다. 숙고를 거듭한 뒤, 나는 비통한 심정으로 중고자동차 시장에 가서 단 10분 만에 화물차 한 대를 사버렸다. 차와 재혼하던 날, 나는 가슴을 팡팡 치면서 “난 엉터리다”라고 탄식했다. 지금 나는 차와 헤어졌을 때 의기양양하게 만나던 고명한 환경운동가들을 가급적 안 만나고 살려고 애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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