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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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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공화국, 당신은 평생수험생!

등록 2001-02-28 00:00 수정 2020-05-03 04:21

승진 위해서도 시험, 자르기 위해서도 시험… 우리는 오늘도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당시 ‘창피하게 시험도 못봐서 시험으로 잘렸다는 말을 들어야 하느냐’. ‘쫓겨날 때도 시험봐서 나가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많았다.”

인천 동구청 관계자는 연신 볼멘소리를 했다. “원래 취지는 평소 근무평가성적이 안 좋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는데….” 지난해 말 지방자치단체 하위직공무원 감축과정에서 치러진 이른바 ‘직권면직시험’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험과목은 국어와 국사. 인천 동구청이 퇴출대상자를 골라내기 위해 치렀던 생존시험은 수험대상자 80명 중 24명만 응시했는데 응시자는 퇴출대상에서 모두 구제됐다. 그러나 응시를 거부한 사람 중 15명은 끝내 눈물을 글썽이며 직장을 떠나야 했다.

시험의 비극, 직권면직시험

직권면직시험이라는 낯설기 그지없는 시험을 처음으로 도입한 충북도에서는 기능직공무원 37명 전원이 시험에 응시했다. 충북도 관계자의 설명은 인천 동구청과는 좀 달랐다. “10명 정도가 퇴출대상이었는데 대상자들이 다같이 동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는 시험 외에 객관적 잣대로 삼을 다른 대안이 없었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생존여부를 가리는 데 들이댈 판단근거로 시험 외에 달리 대안이 없는 것일까. 부산·대구지역 구청소속 기능직공무원 수백명은 직권면직시험을 집단거부하며 시험장 앞에서 격렬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지역별로 시험응시 대상자들의 반응은 달랐지만 모두 우리 사회의 시험문화 또는 시험제도가 비극적으로 표현된 사례다.

회사원 김아무개(45)씨는 가끔 가위눌리는 꿈에서 화들짝 깨어나곤 한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비슷하다. 시험날짜가 눈앞에 닥쳤는데 공부를 전혀 안해 발을 동동 구르는 꿈이다. 지긋지긋했던 시험의 악몽이 좀처럼 김씨의 잠재의식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김씨처럼 중년 이상의 세대 가운데 아직도 시험치는 꿈을 꾸는 사람들은 상당하다. 그만큼 시험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성장기를 옥죄고, 이 통과의례를 거친 모든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치열한 경험으로 각인된다.

그러나 시험의 악몽은 먼 옛날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21세기 들머리, 대한민국은 예전의 세대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훨씬 더 많은 시험들로 가득 차 있다. 날로 첨단화·전문화돼가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한국인들은 대부분 ‘평생 수험생’들의 신세가 됐다.

지난 2월22일 오후 서울 관악구 신림9동, 이른바 ‘신림동 고시촌’. 이곳 고시학원 중 하나인 한국법학교육원의 비좁은 복도 양쪽에는 의자에 걸터앉은 고시준비생들이 시험정보를 나누고 있고, 복도 끝에 붙은 강의실에는 4시간짜리 ‘한국사총정리’ 수강생 100여명이 두툼한 강의서적을 펴놓고 고시합격의 꿈에 도전하고 있었다. 복도중앙에 걸린 강의표는 새벽반부터 저녁반까지 민법, 헌법, 사시2차모의고사 등 강의로 꽉 차 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또다른 고시학원인 춘추관법정연구회 대형강의실도 수백명의 고시준비생들로 빼곡이 들어차 있기는 마찬가지다. 강의실 복도 양쪽에는 효율적인 수험전략과 고득점답안작성기법 요령을 가르친다는 전단지들과 함께 사법시험, 행정고시, 외무고시, 공인회계사, 변리사 등 각종 시험과목 강의 홍보물이 어지럽게 나붙어 있다.

‘고시의 메카’로 불리는 신림9동에는 300여개의 고시원과 2만∼3만명으로 추산되는 고시준비생이 몰려 있다. 고시관련 모든 시설과 정보가 이곳에 집중되다보니 전국의 고시준비생들이 몰려드는 것이다. 신림동에서 한달 생활하는 데 드는 돈은 보통 월 70만원선. 이들이 신림동에 뿌리는 돈만 매달 150억∼200억원이다. 하루 24시간을, 아니 청춘을 시험에 던지는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은 수많은 시험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혹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거대한 시험공화국, 대한민국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영재학원 여섯 번째 도전하는 꼬마

한국법학교육원 박종만 원장은 “과거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가문을 일으키고 특권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요즘은 법대를 나와 통과의례처럼 사법시험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기는 탓인지 고시생들이 길게 끌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사법시험 합격의 손익분기점은 40살로 알려져왔지만 이제는 점점 낮아져 35살이라고 보는 것이 고시촌의 정설이다. 실제 요즘 고시문화를 주도하는 층은 예전처럼 4∼5년 이상 경력을 지닌 ‘장수생’ 고수들이 아니라 젊은층이라고 고시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대는 거대한 고시촌’이라거나 ‘한국은 고시공화국’이란 말로 상징되는 한국인의 시험문화는 유치원생부터 이미 시작된다. 강남에 급속히 퍼지고 있는 영재학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유치원생들도 시험을 치러야 한다. 압구정동의 ㅎ영재학원은 시험 응시료만 7만원으로 유치원생에게 맞는 IQ테스트 용지로 영재판별시험을 거쳐 원생을 뽑는다. 수리·언어·창의력 시험을 한나절 동안 치러 학원에서 정한 환산점수로 전국 3% 안에 들어야 합격한다. 강남지역 한 주부는 “어떤 유명 방송인의 아들은 이 영재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여섯번이나 시험을 치른 경우도 있다”며 “유치원생들은 스펀지 머리라서 여러 번 시험을 치면 능숙해져서 결국 붙는다는 말도 있다”고 전했다. 학교에 들어가서도 초등1학년 때부터 유명 영어학원 입학을 위해 시험을 치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다. 학원에 들어간 뒤에는 고급반에 올라가기 위한 시험이 또다시 기다리고 있다.

입학시험하면 사람들은 보통 대입 수능시험을 떠올리지만, 수능시험과 고시처럼 모든 사람의 관심이 집중되지 않는 곳에도 이 시험들 못지 않게 중요한, 그러나 주목받지 못하는 시험들을 준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인 게 각종 기술자격증시험이다.

대학새내기도 공무원시험을 준비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술자격시험 종목은 무려 944개. 이중 국가기술자격시험이 기능사, 기사, 산업기사, 기능장, 기술사 등 5개 등급에 걸쳐 590개 종목, 민간기술자격 시험이 354개다. 지난해 국가기술자격종목 응시자는 필기와 실기검정을 합쳐 230만명으로 응시수수료만 해도 무려 300억원이 걷혔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주관하는 정보통신자격도 20종목에 이른다. 이 자격증 시험 응시자는 워드프로세서 부문만 1년에 100만명에 이르고, 전체적으로는 연간 300만명이 몰려든다. 산업인력공단과 상공회의소 두곳이 주관하는 시험 응시료만 1년에 1천억원에 이를 정도다.

시험준비 시작 시점도 날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공무원시험의 경우 예전같으면 남자의 경우 군 제대 뒤, 여자의 경우 대학3학년께부터 준비했으나 요즘은 대학신입생 시절부터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다. 요즘 서울 노량진의 주요 공무원시험 학원들에는 막 고교를 졸업한 대입 예정자들이 일찌감치 9급공무원 시험과목을 수강신청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노량진 한교고시학원 상담실 박병채씨는 “대학신입생 수강생들은 대부분 지방대 학생들로 입학 이전부터 이미 학교선배들을 통해 지방대 출신들은 취직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어온 터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시험공부를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다보니 지난해 서울시 지방공무원 임용시험에 3만4천명이 몰려들어 120 대 1의 사상최고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노량진 학원가는 대학교 방학이 시작되면 상담하려는 줄이 건물바깥 수십미터에 이르는 진풍경이 빚어지기도 한다. 특정 강의수업을 받은 서브노트를 복사해 1만원까지 받고 팔아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는 수험생들도 생겨나고 있다.

오랜 준비와 치열한 경쟁으로 취업에 성공한다 해도 시험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어렵다. 입사한 지 일정기간이 지나면 승진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SK(주)는 정기적으로 과장승진 때 회사의 기업관 등 직무교육에 대한 시험을 치른다. 물론 토익시험도 빠지지 않는다. 현대전자의 경우 입사 5년이 되면 대리승진 때 회사 직무관련 시험을 치른다. 과장승진 때는 논문을 제출해야 한다. 현대전자 인사팀은 “논문도 쉬운 게 아니다”며 “대개 자신이 주제를 정해 1∼2년 전부터 조금씩 준비해야 제대로 통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입사동기 중 과장승진에 5년 차이가 날 수도 있다.

시험에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일까. 지난해 지방공무원들의 직권면직시험 거부 파문에도 불구하고, 정작 승진시험을 치르는 응시자들은 대부분 승진이 심사보다는 시험으로 결정되기를 원한다. 꼭 시험만능주의라고 볼 것까지는 없겠지만, 다른 평가방법은 믿기 어렵다는 불신 때문이다. 실제 지난해 부산시가 사무관 승진제도를 시험제에서 심사제로 바꾸는 방안을 놓고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시험이 좋은 방법이다” “다소 보완이 필요하지만 심사승진제보다 시험이 낫다”는 등 72%가 현행 시험제도 존속을 원한다고 답변했다.

운전면허시험, 최대의 응시규모

입학과 취업, 승진 등 생계나 사회적 존재의 문제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부분에도 어김없이 시험은 존재한다.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제하는 스님이 되는 길에도 시험이 놓여 있다. 이른바 ‘득도고시’로 불리는 이 시험은 종단이 주관하는 승가고시의 별명이다. 승가고시는 하루 두 시간 정도 큰 사찰에서 불교사나 불교의식 등 과목에 걸쳐 필기시험을 일제히 치르는데 매년 400여명이 응시한다. 승가고시에도 응시자격이 있다. 15∼50살의 미혼자여야 하고 결혼한 이는 이혼 뒤 6개월이 지나 법률상 자녀양육권을 포기한 사람이어야 한다. 최소 4년을 선방이나 승가대 등에서 수행한 뒤에야 승가고시를 볼 자격이 주어진다. 불교 조계종 총무원은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는 게 승려지만 불가의 기본적인 법도는 알아야하기 때문에 시험을 치르는 것”이라며 “승가고시에 합격했다는 것이 곧 도를 깨우쳤다고 인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득도고시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한국인이 가장 많이 보는 시험은 무엇일까. 단연 운전면허시험이다. 지난해 응시자는 필기시험과 기능시험을 합쳐 506만명. 물론 여기에는 여러 차례 응시한 사람도 포함돼 있다. 자연히 응시료 수입도 가장 많다. 지난해 거둬들인 응시료는 820억원에 이른다.

같은날 일제히 치르는 시험으로는 대입 수학능력시험이 있다. 하지만 실업계 고교도 의무검정시험을 치른다. 해마다 5월 중순에서 6월 초면 실업계 3학년 16만여명이 ‘조용히’ 기능사자격 취득을 위한 의무검정 시험을 본다. 성동기계공고 한 교사는 “물론 수능시험처럼 대단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실업계 학생들이 한꺼번에 치르는 시험은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소외돼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합리적 잣대는 없는 것일까

이처럼 워낙 시험이 성행하고 큰 시험들을 많이 치르다보니, 출제된 문제의 수준은 제쳐놓고 볼 때, 우리나라의 시험행정과 관리는 세계일류 수준이라고 한다. 한날 한시에 이처럼 많은 응시자를 모아놓고 큰탈없이 치르는 나라는 몇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험관리’ 기술을 외국에서 배우러 오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교육과정평가원은 현재 중국과 수능시험 평가방식을 ‘전수하는’ 협약을 맺어 상호교환을 정례화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박도순 전 교육평가원장이 중국당국의 초청으로 중국에 가서 수능시험관리방식을 설명해주기도 했다. 일본쪽에서도 연구원이 교육과정평가원을 방문해 수능시험 노하우를 배워갔다. 올해는 한·중·일 3국이 수능시험 평가방식을 놓고 세미나를 가질 예정이다.

물론 시험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지만 시험만큼 객관적인 것도 없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노국향 책임연구원은 “시험 이외에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잣대라고 여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시험성적 의존성향이 우리 시험문화의 바탕에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우리의 시험문화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교육개발원 곽병선 원장은 “시험이란 게 본질적으로 교과서에 나와 있는 기존의 관점에 따라 측정하다보니 기성질서 답습으로 흐르고 개성과 창의력 있는 인간을 수용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고 말한다. 이런 제도에서는 암기식 교육과 점수경쟁이 조장될 수밖에 없고, 고득점 외의 교육방법은 설 땅이 없어지는 당연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험점수가 아닌 다른 합리적인 잣대와 근거들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그런 선발방식은 정녕 없는 것일까.



스트레스  순위  조사


미국 (94년)


한국 (82년)




순위


요인


지수


순위


요인


지수




1


배우자의 죽음


123


1


자식의 죽음


74




2


이혼


100


2


배우자의 죽음


73




3


가까운 가족의 죽음


94


3


부모의 죽음


66




4


부부 별거


82


4


이혼


63




5


심각한 부상이나 질병


80


5


형제나 자매의 죽음


60




6


해고


79


6


혼외정사


59




7


복역


74


7


별거 뒤 재결합


54




 



 


 



 




19


결혼


50


11


친한 친구의 죽음


50




 



 


12


결혼


50




32


상사와의 불화


30


 



 




 


 


 


22


입학·취직시험 실패


37




 


 


 


 



 




 


 


 


29


시댁·처가와의 알력


34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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