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레바논에서 헤즈볼라 사무총장은 어떻게 아랍 저항의 깃발이 되었나… 남부지역에서 대이스라엘 저강도 전쟁 이끌며 민심을 휘어잡아 의회 진출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지난 2000년 10월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지대에서 헤즈볼라 무장대원이 이스라엘군 3명을 붙잡아갔다. 하지만 에후드 바라크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이에 일절 대응하지 않았다. 불과 한 달여 전 시작된 제2차 팔레스타인 민중봉기(알아크사 인티파타)에 집중해야 했던 그로선 ‘전선’을 레바논으로 넓히기 어려웠을 게다.
“나스랄라를 이집트 대통령으로!”
이스라엘군이 요르단강 서안지역 재장악에 몰두하던 2002년 4월에도 헤즈볼라는 국경지대에서 이스라엘군을 급습했지만, 아리엘 샤론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오히려 헤즈볼라와 협상에 나서 팔레스타인 정치범 등 아랍인 수감자 410명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이스라엘군 주검 3구와 납치된 이스라엘인 1명을 넘겨받았다. 국경지대에서 이스라엘 도시를 겨냥하고 있는 헤즈볼라의 미사일 1만여 발을 의식한 탓이다. 지난 7월13일 ‘헤즈볼라가 붙잡아간 병사 2명 구출’을 새삼 명분으로 내걸고 레바논 침공에 나선 이스라엘의 행태를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다.
1982년 이란의 지원으로 창설된 헤즈볼라(아랍어로 ‘신의 정당’이란 뜻)는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 있던 남부 레바논을 무대로 강력한 무장투쟁과 정치 참여를 병행해온 이슬람주의 단체다. ‘과격 테러조직’이란 서구 주류 언론의 평가와 달리 아랍권에선 ‘정통성을 지닌 저항단체’이자 레바논 정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정치집단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이스라엘과 맞선 헤즈볼라의 단호하고 강경한 무장투쟁은 지난 2000년 5월 이스라엘군이 18년여 점령해온 레바논 남부에서 철군을 결정한 결정적 이유였다.
“내 메신저에 등록된 대화 상대 가운데 적어도 대여섯 명은 대화명을 (헤즈볼라 사무총장인) ‘나스랄라’로 바꿨다. 대화창에도 자기 사진 대신 나스랄라의 사진을 띄워놓은 이들도 있다. (이슬람주의 단체) 활동가가 아니어도 ‘나스랄라는 용감한 인물이다’거나 ’나스랄라를 이집트의 대통령으로!’ 등의 구호나, 나스랄라의 연설에서 따온 문구가 전자우편을 통해 발빠르게 퍼지고 있다.”
이집트 권위지 주간 이 최신호에서 전한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후 아랍의 ‘거리 민심’이다. 이 잡지는 “이스라엘 3대 도시인 북부 하이파에 헤즈볼라의 카투사 로켓이 날아들던 날 이집트 휴양지 마리나에서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젊은이들은 ‘나스랄라가 자신이 공언한 대로 하이파를 공격했다’며 ‘신이 그를 보호하실 것’이라고 외쳤다”고 전했다. 잇따른 이스라엘군의 표적 공격을 뚫고 “전면전을 원한다면, 당당히 응해주마”고 외치는 하산 나스랄라 헤즈볼라 사무총장은 지금 아랍에서 가장 ‘뜨고 있는’ 정치 지도자다.
이라크 유학 시절 무사위와 인연 맺어
나스랄라 사무총장은 1960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남부의 가난한 시아파 자영업자의 9남매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1975년 내전 발발 뒤 레바논 남부 고향 마을로 이주한 그는 청소년 시절 정치토론과 성서 코란 학습에 열심을 보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시아파 성지인 이라크 중부 나자프에서 3년여 유학생활을 했는데, 이때 헤즈볼라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사예드 아바스 무사위와 인연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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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귀국한 나스랄라는 정치운동에 뛰어드는 한편 시아파 무장단체인 아말 민병대의 케카 지역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직후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한 민족구원전선 휘하로 들어간 아말 민병대를 탈퇴해 신생 조직인 헤즈볼라에 가담했다. 그리고 1992년 무사위가 이스라엘에 암살된 뒤 나스랄라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헤즈볼라 사무총장에 올랐다.
헤즈볼라 지도자로서 그는 기존에 해오던 빈민 구제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한편 이스라엘과 맞서 레바논 남부를 기반으로 ‘저강도 전쟁’을 이어갔다. 그는 또 내전이 끝난 레바논 국내 정치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그해 실시된 총선에 처음으로 헤즈볼라 출신 후보를 냈다. 당시 헤즈볼라는 자살폭탄 공격자의 모습을 담은 선거 포스터에 “그들은 피로 저항했다. 당신은 투표로 저항하라”는 표어를 적어 민심을 파고들었고, 레바논 의회 전체 128석 가운데 12석을 얻는 성과를 올렸다.
2000년 5월25일 레바논에서 철수를 완료한 이스라엘군은 이후에도 전투기를 동원해 레바논 국경을 수시로 넘나들었다. 그때마다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북부 도시를 겨냥한 로켓과 미사일 공격으로 대거리했다. 레바논 남부에선 헤즈볼라가 사실상 국경을 방어하는 지역군 역할을 맡아온 셈이다. 메노나이트 기독교도인 에밀 라후드 레바논 대통령이 “레바논인에게 헤즈볼라는 민족적 저항운동을 뜻하며,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 영토를 해방시키지 못했을 것”이라며 “우리는 헤즈볼라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해 2월 라피크 하리리 전 총리가 암살된 뒤 찾아온 정치적 격변기에 나스랄라 총장은 각 정파의 갈등을 조율하는 중재자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또 레바논 주둔 시리아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벌어진 ‘백양목 혁명’ 때는 수십만 군중을 동원해 친시리아 시위를 벌이는 정치력을 보이기도 했다. 같은 해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헤즈볼라는 기존 8석에서 대폭 늘어난 23석을 얻었고, 이를 기반으로 7월 구성된 레바논 연립정부에 참여해 2명의 각료를 배출하기도 했다.
1500여발의 로켓, 반격은 거침 없다
“당신들이 규칙을 지킬 뜻이 없다면 좋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것이다.” 이스라엘의 파상 공세에 맞선 헤즈볼라의 반격은 거침이 없다. 레바논 침공 16일째를 맞은 7월27일 현재 이스라엘군 33명과 민간인 19명이 헤즈볼라의 반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군 당국은 “헤즈볼라가 발사한 로켓 한 발당 건물 10채를 폭파시키겠다”는 저주를 퍼부었지만, 헤즈볼라는 이날까지 1500여 발의 로켓을 이스라엘 북부에 퍼부어댔다.
레바논 언론인 이브라힘 아민은 주간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레바논과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겨냥한 이스라엘의 야만적 공격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닮은꼴이다. 아랍 대중에게 미국과 이스라엘에 맞서는 것은 값비싼 대가를 지불할 수밖에 없다는 위협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주검이 쌓여갈수록 더 많은 이들이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레바논에 대한 무자비한 점령을 끝장내는 유일한 길은 저항밖에 없음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아랍의 거리에서 하산 나스랄라의 사진이 대형 걸개그림이 돼 나부끼기 시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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