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일상적 사도마조히즘을 실천하는 커플들… 의 지배자 미칠, 고용자-피고용자의 사랑
천사 같은 여자와 천사 같은 남자가 만나서 나누는 구구절절한 사랑에 관심이 없어진 지는 이미 오래다. ‘착하다’는 말이 어느새 ‘매력 없다’의 동의어가 되어가고 있는 지금, 성격이 모난 남녀들이 티격태격 부딪히고 싸우고 화해하다가 다시 싸우는 모난 사랑의 시대다. 대중문화 속 모난 사랑의 동력에는 사도마조히즘이 자리잡고 있다.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가학-피학, 지배-종속, 우월-열등 등 다양한 일상적 사도마조히즘을 몸소 실천하는 커플들이 여기 다 모였다.
서로에게 상처 주는 커플, 미자-태준
이 커플들의 특징은 다소 억지스러운 사디스트-마조히스트의 역할을 수행하다가 막판에 가면 갑자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개과천선하고 무색무취의 인간형으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역시 ‘러브러브 판타지’를 보여줘야 한다는 드라마·영화의 현실적인 한계 때문이겠지만, 돌로 쳐도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모난 성격이 순식간에 둥글둥글해지면서 회개하고 반성한다.
또 인물과 줄거리 설정에서 ‘사디스트=악’ ‘마조히스트=선’이라는 고정관념의 공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봐야겠다.
현재진행형인 대표적 사도마조히즘 커플은 한국방송 주말드라마 의 미칠-일한 커플이다. 미칠(최정원)은 반듯한 쌍둥이 언니 설칠(이태란)의 오랜 친구인 유일한(고주원)을 남자친구로 만든다. 미칠은 자신에게 푹 빠져 있는 일한에게 일종의 지배자로 군림한다. 명령은 기본이고 연락을 끊고 잠적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일한은 미칠 때문에 괴로워하지만 그러한 관계를 끝낼 생각은 없는 마조히스트다. 혹시 속으로는 미칠의 명령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미칠의 가학 행위는 사실 언니인 설칠에게 향해 있다. 평생 반듯한 언니 때문에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미칠은 언니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미칠-일한 커플은 한동안 대표적 사도마조히스트 커플로 자리매김할 듯하다.
사도마조히스트와 사디스트가 만나면 어떤 사랑을 하게 되는지는 SBS 주말드라마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자(한고은)는 복잡한 사도마조히스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남에게 종속되고 싶지 않은 지배성, 그렇지만 절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의존성이 복잡하게 얽힌 미자는 지배성이 강한 사디스트 태준(조민기)과 성격만큼이나 복잡한 사랑을 한다.
이들은 잡아먹을 것처럼 소리 지르다가 한순간 돌변해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포옹을 하고, 따뜻하게 얘기를 나누다가 탁 뒤틀리면 서로에게 독설을 내뱉는다. 서로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내지만 이들이 계속 이런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예상도, 순탄치 않은 연애 끝에 결혼을 했지만 이들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는 것도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즐기는 이들의 성격 때문이다. 이혼 얘기가 오가면서 이 둘은 상처뿐인 결혼생활을 정리할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 번 이별하고 다시 만나면 이 둘도 달라질까?
드라마 속 사도마조히즘 커플의 또 다른 형태는 바로 고용자-피고용자의 관계에서 시작되는 사랑이다. 권력의 위아래가 뚜렷한 고용자인 남자 주인공과 피고용자인 여자 주인공 사이에는 사도마조히즘 관계가 성립된다. 이런 관계를 그린 드라마는 대부분 설정이 비슷하다. ‘외로움’ 말고는 부족한 게 없는 제멋대로인 남자와 가진 것은 없지만 발랄한 성격 하나로 승부하는 여자가 만난다.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등에 업고 여자에게 무례하게 대하던 남자는 서서히 여자의 따뜻함에 넘어간다. 남자가 갑자기 사랑이라는 묘약으로 사디즘을 일소하기 전까지 이 커플은 전형적인 사도마조히즘적 행동을 보여준다.
유치한 사도마조히즘 놀이
직장생활과 사생활을 병행한 커플의 대표적인 예는 한국방송 에서 볼 수 있다. 영재(정지훈)와 지은(송혜교)은 집주인과 가정부이며 동시에 부부인 묘한 관계다. 톱스타 영재는 소설가 지망생인 지은을 구박하고 ‘밥통’ ‘청소기’ ‘조류’라며 면박을 주지만 지은은 이에 지지 않고 사사건건 말을 받아치면서 영재와의 다툼을 부추긴다. 이 커플은 겉으로는 영재가 사디스트이고 지은이 마조히스트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영재가 지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영재는 종속적 사디스트이며, 지은은 지배적 마조히스트로 볼 수 있다.
집주인과 가정부로 시작한 또 한 커플이 있다. SBS 의 기주(박신양)와 태영(김정은)은 집주인과 가정부에서 사장과 홍보팀 직원으로 위치를 옮겨가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이 둘 관계의 중요한 열쇠는 바로 기주의 명령조 말투다. 기주는 태영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하고 태영은 못 이기는 척 끌려다닌다. 기주의 이런 성격은 ‘카리스마’로 윤색돼 여성 시청자를 공략했지만 기주와 태영의 관계 속에서는 명령과 복종이라는 사도마조히즘의 원리가 숨어 있다.
문화방송 의 황태자 이신(주지훈)과 채경(윤은혜)도 있다. 황태자와 서민 출신 황태자비라는 신분의 격차는 이신을 매번 소리 지르는 독선적인 사디스트의 위치로, 채경을 열등감 때문에 매번 놀란 토끼눈을 하고 뒤돌아서는 마조히스트의 위치로 가져다놓는다. 거기다가 이신을 향한 채경의 사랑까지 더해진 이들의 사도마조히즘 관계는 채경의 열등감이 중요한 열쇠다.
유치한 사도마조히즘 놀이를 즐기는 이들은 영화 의 그녀(전지현)-견우(차태현) 커플이다. 이 커플은 사디스트에게 창의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사디스트가 마조히스트와 관계를 이어나가려면 매번 뭔가 새로운 지배 방식이 필요하다. 마조히스트의 도전과 반항이 때로 사도마조히즘의 원동력이 되는 것처럼 사디스트의 색다른 지배 방식 역시 이들 관계에는 중요한 요소다.
그녀는 견우에게 다양한 행동들을 요구한다. 강물의 깊이가 궁금하면 견우를 물속으로 밀어버리고 심심하면 따귀 때리기 놀이도 시킨다. 또 자신의 하이힐을 억지로 신겨 힘들게 걷는 견우를 보며 즐거워하기도 한다. 이들의 만남의 결정권도 그녀 손에 있다. 견우는 그녀의 이런 명령에 어이없어하지만 점점 더 그녀에게 종속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견우가 좋아한 것은 그녀였을까? 아니면 그녀의 다채로운 명령과 지배였을까?
주인공의 친구들, 불행을 즐기다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만큼이나 큰 역할을 하는 이들은 바로 주인공의 친구들이다. 여자 주인공이 끊임없이 닥치는 불행으로 힘들어할 때 곁에서 위로해주는 친구나, 남자 주인공이 사랑 때문에 속상해할 때 술 한잔 함께 마셔주는 친구들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그런데 혹시 이 친구들, 주인공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이들을 연출자적 사도마조히스트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주변 사람들의 불행을 은근히 즐긴다. 주인공이 힘든 표정으로 찾아오면 ‘오늘은 또 얼마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하며 기대한다. 이 친구들 말고도 드라마 속 주인공의 불행에서 기쁨을 찾는 이들이 또 있으니, 바로 드라마를 보는 우리 시청자들이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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